소설리스트

환영검전-71화 (71/225)

071.

#십오행 (2)

십오행이 시작된 지 엿새가 흘렀다.

홍화와 청화는 여섯 번의 승패를 나눠 가졌다.

그러나 어느 조가 몇 번을 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결제자들의 조가 날마다 바뀌는 까닭이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적이었다.

그건 각자의 행적에 달려 있었다.

홍화 혹은 청화에 속하여 어떤 방법과 계책으로 적을 상대하는지, 위기는 어떻게 벗어나는지, 전체적인 시야를 볼 수 있는지, 개인의 무력은 어느 정도이며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는지 등이 종합적으로 기록되고 평가되는 까닭이었다.

그게 이번 십오행에서 성적을 부여하는 규칙 중 첫째였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점이 있었다.

진우선이었다.

진우선이 속한 조가 날마다 승리를 가져갔다. 다른 조는 진우선을 어떤 방법으로도 상대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진우선에게 일결제자 누가 맞서든 예외가 아니었다.

일결제자들 중 그 무위가 수위에 속하는 만총, 화설옥, 노종해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셋이 연합해도 진우선을 당해내지 못했다.

진우선은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무공 실력으로 상대를 모두 제압했다.

수적인 열세든지 지형적으로 포위되었든지, 합격진이든지 연환계든지 상관이 없었다.

모조리 검 한 자루로 위기를 극복하고 전세를 뒤집었다.

“미친! 어떻게 이기라고…….”

“제길!”

진우선은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그래서 원성이 나왔다. 엿새째가 되니 원성이 꽤 쌓여 있었다.

일결제자 중에는 그를 상대할 자가 없다. 그를 상대하려는 자도 딱히 없다.

패하여 목숨을 잃을 게 뻔히 보이는데 누가 그를 상대하겠는가.

그 사실을 무사부들도 잘 알았다. 그림자처럼 제자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사부들이 모였다.

십오행의 여섯 번째 날을 마친 지금 상황에서, 십오행을 주관하는 석자풍 부당주는 회의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강 사부님께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석자풍의 말에 흰 눈썹이 인상적인 백미검군(白眉劍君) 강무옥이 입을 열었다.

“사흘간 지켜보니, 진우선 그 아이는 실로 대단하더이다. 검이 물처럼 부드럽게 흐르고 불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며, 적은 공력으로도 능히 상대를 무너뜨리니 검의 대가를 보는 것 같았소. 다들 목격했고 짐작하다시피, 일결제자들 가운데 십 초를 버틸 아이가 있을까 싶소.”

강무옥이 흐뭇하게 웃으며 진우선을 극찬했다.

호심당에서 직접 가르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도 이럴 정도면, 사흘간 진우선을 쫓아다니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 게 틀림없었다.

“그럼 강 사부님께서도 현재의 평가 방식에 변화를 바라시겠군요.”

“그렇소. 어쨌든 우리의 목적은 제자들이 실전에 임하는 능력을 보는 것이니, 지금의 방식은 충분한 결론을 얻었다고 생각하외다.”

강무옥의 말에 다른 무사부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공에 견줄 제자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더군요.”

“그는 일결제자의 범주를 넘어섰습니다. 당장 호심당을 마쳐도 이상할 게 없다고 봅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진우선이 아직 진신 무공을 꺼내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무사부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들은 이미 호심당에 진우선의 적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는 무림말학이라 여기 계신 여러 대협의 위명에 못 미치는데, 그래서인지 진 공자를 보며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는 강호에서 십 년 넘게 장법의 대가로 이름을 날린 무사부 곽방이었다.

곽방은 명성을 허투루 쌓은 사람이 아니었다. 정무맹의 의기를 드높이며 험지에서도 적들을 소탕하고 임무를 완수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무림말학이라고 소개하고 있었으나, 강무옥처럼 명성이 쟁쟁한 사람에 비해 그럴 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무공이 약하면 무사부로 뽑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곽방은 진우선을 보며 종종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었다.

진우선은 지난봄 비무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강해져 있었으니까.

그는 평소에 온화하기에 그 강함을 잘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전투에 임했을 때는 언뜻언뜻 노도와 같은 기세가 뿜어졌다.

곽방은 그 순간 진우선이 자신의 실력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걸 알아버렸다.

동수를 이루기는커녕 한 수 배움을 청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마저 받았으니, 충격이었다.

그리고 돌아보니 아마 다른 무사부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꽤 있으리라. 다만 체면이 있어서 선뜻 고백하지 못하는 것일 뿐.

“곽 사부는 역시 겸손하시오. 어쨌든 나도 진우선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소. 그래서 무사부님들을 이렇게 모신 것이오.”

석자풍이 곽방의 면을 세워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물었다.

“곽 사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걸 보면, 무언가 생각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편히 말씀해주시지요.”

“감사합니다, 부당주님. 저는 진우선이 정말 뛰어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제자들이 진면목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방식을 보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결제자들의 성과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으나, 진우선이 아닌 다른 제자들은 딱히 빛을 못 보고 있었다.

그건 다들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석자풍이 곽방에게 물었다.

그러자 곽방은 주변의 다른 무사부들을 둘러보았다. 의견을 구한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무사부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석자풍이 말을 의제로 삼아.

“우선이를 제외하고 남은 십오행을 치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럼 우승자를 진우선으로 하자는 말이오?”

“아직 아흐레의 일정이 남았는데, 벌써 결정 낼 수는 없지 않겠소?”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저번에 보니, 실력 좋은 아이들 서넛이 힘을 합쳐도 어렵지 않게 풀어내더이다.”

“물론 그건 그렇소. 하지만 진우선을 갑자기 제외하면 그간 제자들이 경험하던 긴장감이 바로 깨져버리지 않겠소? 제자들이 긴장감 속에서 점점 잘 적응하여 나쁘지는 않다고만 봤는데.”

“그것도 맞는 말씀이지요.”

무사부들이 갑론을박하며 각자의 의견을 꺼냈다. 다들 타당한 면이 있어 논의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때, 강무옥이 의견을 하나 내었다.

“홍화와 청화의 인원수를 바꾸는 게 어떻소? 다수와 소수로 뽑고, 다수가 강한 적을 상대하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진우선이 소수겠군요.”

“그건 나쁘지 않겠군요. 실력 대신 수가 우세하여 전력의 균형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 그러면 이런 건 어떻습니까? 여태껏 합격진을 집중적으로 익힌 적이 없어 효율이 좋지 못했습니다. 서로의 손발이 어지럽고 허점을 노출하기 일쑤였지요. 지금 그 방법으로 격진과 연환진 등을 실전에서 체험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무사부들의 서로 의견을 개진했다.

하나의 방향으로 모이며 다양한 생각이 쏟아지고 있었다.

석자풍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무옥의 의견에 연이은 무사부들의 말이 상당히 타당해 보이는 까닭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나흘 간은 인원수를 달리하여 조를 나누겠습니다. 날마다 상황을 보며 조정하기로 하지요.”

“네.”

석자풍이 결론을 내자, 무사부들이 그에 동의를 표했다.

“내일 새벽에 제자들에게 공표하겠습니다.”

당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무사부들께서는 나흘 후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당주님.”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

퍼억-!

파공음이 터졌다.

공기가 터져나갔다. 그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목창 한 자루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생긴 굉음이었다.

하지만 창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어떻게 한 번을 스치지 않아!”

악에 받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총이구나.’

만총의 목소리였다. 그의 답답한 심정이 절규가 되어 폭발한 모양이었다.

그가 목창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팔뚝에 질끈 묶은 붉은 끈도 허공을 기이하게 수놓았다.

하지만 붉은 끈의 흔적은 관심 없다.

붉은 끈은 홍화니까 적의 표식이었다.

만총은 오늘 홍화에 속하여 진우선을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터턱-!

검이 창을 튕겨냈다.

목창에 실린 힘이 상당한지 충돌음이 둔탁했다. 중(重)의 묘리를 담은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진우선은 어째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듯이 검을 놀리며 만총의 창을 적당히 쳐내고, 적당히 피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에워싼 다른 이들에게 공격을 가했다.

진우선의 검은 거칠지 않았고 폭발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바람처럼 표홀하니 사방팔방에서 접근하는 이들을 상대하기에 딱 맞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검의 운용이었다.

왜냐하면, 십오행의 열흘째 되는 오늘, 청화에 속한 이는 진우선 단 한 명뿐인 까닭이었다.

진우선을 제외한 스물두 명의 일결제자가 모두 홍화에 속해 있었다.

스윽-!

타악-!

진우선의 검이 상대의 도와 검을 튕겨냈다. 한꺼번에 짓쳐 드는 예닐곱 무기들을 모조리 격퇴했다.

쩍.

파삭.

목봉 하나, 목검 하나는 분쇄되었다. 그 주인들은 반탄력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행동이 잠시 멈춘다.

진우선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컥!”

“끅!”

진우선의 목검에 둘이 베였다. 실전이었다면 십중팔구 목숨을 잃었을 타격이었다.

이 정도면 무사부들은 판정을 내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홍화 오호, 십칠호. 사(死).”

무사부가 홍화의 전력상실을 선언했다. 그의 외침은 정확했다.

그러자마자 홍화의 조장이 소리쳤다.

“십호! 십사호! 얼른 메우시오!”

오호와 십칠호의 빈자리를 메우라는 뜻이다. 십호와 십사호는 즉각적으로 명령을 따랐다.

한편 반대쪽에선 강맹한 기운이 쏟아졌다.

콰앙-!

일 권이 터졌다.

어찌나 위력적인지 허공을 때리는 파괴음마저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그 공격이 진우선의 등으로 쏟아졌다.

오호와 십칠호를 죽이며 등을 보이게 된 틈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

번쩍-!

갑작스레 빛이 터졌다.

검이 허공을 베며 섬광을 뿜어냈다.

진우선이 휙 몸을 돌리며 재빨리 검으로 권격에 담긴 기운을 잘라 버린 것이다.

순식간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도 없었다.

그러니 당황하는 것은 강맹한 일 권을 쏘아 보낸 이였다.

“진 소협! 그게! 어찌!”

우문혁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졌으나 이해할 수 없었다.

목검이 그 기운을 어떻게 상쇄시켰고, 진우선은 어느새 돌아섰단 말인가?

머리가 잠시 복잡해졌다.

그러자 아주 찰나의 순간에 손발이 살짝 엉켰다. 우문혁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한 틈이었다.

진우선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푹!

한 자루 목검이 우문혁의 배를 찔러 들어왔다.

‘찔렸다고? 보이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통증은 확실했다.

뒤이어 무사부의 외침이 우문혁의 귓전에 박혔다.

“홍화 육호. 사(死).”

육호는 우문혁이었다.

우문혁이 눈을 부릅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니, 진우선의 솜씨가 귀신같은 거겠지.

그렇게 우문혁이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승패는 계속 판가름이 났고, 곧 승리를 가져간 쪽이 결정되었다.

청화였다.

그건 곧 진우선이었다.

***

“황 사부, 그간 진우선의 실력이 저 정도일 줄 예상했었소?”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황백이 강하게 부정했다. 정말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허허허-!”

강무옥도 그저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진우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우선은 혼자서 일결제자 전부를 상대하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들을 제압하더니, 승리마저 가져갔다.

혀를 내두를 실력이었다.

기가 막혔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벌어졌으니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헛웃음만 나오고 있었다.

“내일이 기대되는구려.”

“지지는 말아야겠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질 수도 있소.”

“사실 진짜로 그럴까봐 우려됩니다. 진우선은 아직 자신이 가진 검공을 보여주지도 않았으니까요. 봄에 비무 때나 좀 펼친 듯한데, 지금 실력을 보면 그마저도 옛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건 그럴 거요.”

황백은 진우선이 비무 때 보였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소용없을 가능성이 컸다.

바로 그때 강무옥이 황백의 마음을 알아챘다.

“인제 보니 황 사부는 호승심이 있었구려. 그래서 이토록 긴장했소? 허허허.”

“그렇군요. 부끄럽습니다.”

“괜찮소. 뭐가 부끄럽소? 오히려 저 아이가 황 사부의 호승심을 자극한 것일 텐데.”

진우선의 모습에 황백이 자극받았다. 그의 무인으로서의 심장이 오랜만에 뛰었다. 그 여파 때문인지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황 사부, 그런 심정이면 다시는 제자로 느끼지 못할 것이오.”

강무옥이 조언했다.

진우선을 호적수로 생각하게 되면, 더는 제자로 여기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선이는 저에게 더 배울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황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진우선을 제자로 맞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실력을 가리는 게 뭐에 부끄럽겠는가.

강무옥이 그런 황백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럼 갑시다. 준비를 잘해야 할 테니!”

***

십오행의 열흘째 일정이 끝난 밤.

석자풍이 일결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변동사항이 있다네. 내일부터 여러분은 한 조일세. 청화와 홍화로는 더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지.”

일결제자들은 그 점을 대충 예상했던 바였다.

나흘 전부터 청화의 인원을 줄이고 홍화의 인원을 늘리더니, 급기야 오늘은 진우선과 그를 제외한 나머지가 대결하지 않았는가.

이제 인원을 조절할 수 없었다.

그러려면 다른 변동사항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 변동사항은 십오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계획된 바였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로 뭉쳐 새로운 적을 맞이하게 될 걸세. 그리고 감사하게도 무사부들께서 여러분을 직접 상대해주시기로 하셨다네.”

“……!”

좌중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동안 각자의 무공을 지도했던 무사부들을 적으로 만나야 한다니.

무사부들의 강함은 당연하거니와, 일결제자들의 장단점마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이걸 어찌 이기란 말인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일결제자들이 곧 그것을 깨달았다.

십오행은.

십 일간의 결투와.

오 일간의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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