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70화 (70/225)

070.

#십오행 (1)

산에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나무들은 숨을 죽였고, 새들은 지저귀지 않았고, 동물들은 기척조차 없었다.

가을 하늘은 푸르고 높으며 햇볕은 온화하고 따스하며 사방은 고요하여 편안하기만 한데, 오직 이곳만은 달랐다.

하늘이 맑고 화창한데도 을씨년스러웠다. 해가 들어도 그늘진 것처럼 음산했다.

소름 끼치는 적막이었다.

물소리마저도 서슬 퍼런 소리로 들렸다.

산과 시내, 골짜기와 숲을 포함한 이곳은 바로 십오행의 격전지, 무곡(霧谷)이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아도, 무언가 들리지 않아도, 암암리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계속 벌어질 장소였다.

그 주체는 일결제자들이었다.

호심당의 일결제자들이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채 야전을 치르고 있었다.

그게 이미 사흘째였다.

피융-!

파공음이 들렸다.

화살 소리였다. 누군가 활을 쏜 것이다.

사사사삭-.

낙엽이 밟혀서 부서지는 소리가 마구 났다. 몇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는 듯했다.

평소에는 발소리조차 없는데, 지금은 동시에 들려왔다.

탁-! 쩌억! 채챙-!

무기들이 맞부딪칠 때, 단말마의 비명도 들렸다.

“컥!”

골짜기 상류였다.

위치가 짐작이 갔다. 수풀이 잔뜩 우거져 육안으로는 살피기 쉽지 않은 장소였다.

그곳에서 짧은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홍화. 칠호, 구호, 십호. 사(死).”

“청화. 구호. 사(死).”

무곡을 울리는 한 외침이 있었다.

죽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 음성은 전혀 크지 않았으나 무곡 어디서든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음성에 내공을 실은 까닭이었다.

바로 근처에서 직접 확인한 무사부들의 판정이며 선언이었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은 전투가 끝난 후 하는 것이니, 방금 전의 접전은 이미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이제 십오행을 주관하는 곳에서 이를 듣고 기록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어쨌든, 이제 저들은 죽었다.

물론 실제로 죽은 건 아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십오행의 셋째 날이 종결된 것뿐이다. 셋째 날의 성적이 정해질 일만 남은 것이다.

그게 십오행의 규칙이었다.

십오행은 하루하루의 성적을 열닷새 간 합쳐서 평가하는 방식이니까.

그걸 위해 일결제자들을 두 조로 나누었다. 홍화(紅花)와 청화(靑花)였다.

그리고 날마다 조의 구성원을 바꾸며 서로 승부를 내고 있었다.

지금 벌어진 작은 승부에서는 청화가 득을 보았다. 청화에서는 하나가 죽고, 홍화에서는 셋이 죽었으니까.

그들의 접전이 짧았던 걸 고려해 생각해본다면 유추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청화의 암습.

그로 인해 홍화의 제자 셋이 사망하고, 싸움 중에 청화에서도 한 명 사망했다.

홍화 소속의 제자 세 명이 함께 다녔기에 교전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홍화에서는 아까 숨을 거둔 넷을 포함해 오늘 총 일곱의 목숨이 사라졌다.

청화의 사망자가 이제 두 명이 되었다는 사실과 비교해보면, 홍화는 지금 수적으로 큰 열세에 몰려 있었다.

“…….”

다시 산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사부의 외침 이후로 무곡은 한층 더 짙은 적막에 잠겼다.

묵직한 긴장감만이 홀로 가득 차 있었다.

적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몇 명이 급습해올지 모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한 점들이 무곡에서 움직이는 일결제자들의 심신을 지배했다. 한시도 편히 마음을 놓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긴장 한 번을 안 하는군.’

십오행에 참가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일결제자들과 다르게 긴장조차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진우선이었다.

무사부 황백.

그는 사흘째 진우선을 전담하여 졸졸 쫓아다니며 살피고 있었는데, 그동안 진우선이 숨 한 번 거칠어진 순간을 보지 못했다.

그게 뜻하는 건 단 하나였다.

‘진우선은 전혀 긴장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다!’

황백의 결론이었다.

진우선에게는 십오행이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조금 전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진우선은 청화 소속.

바로 전에 벌어진 습격의 현장에 있었다.

상황은 청화의 급습에 홍화가 당했다고 볼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흔적으로 판단하면 그랬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결과와 상황이 달랐던 까닭이다.

홍화에 속한 세 명이 죽었으나, 그들이 습격을 받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홍화가 비밀리에 화살을 쏘며 급습해온 상황이었다. 그 화살에 맞아 청화의 한 명이 사망했다.

이제 청화에서 남은 이는 진우선 하나다.

진우선은 홀로 홍화의 습격자 세 명을 상대했다. 그리고 불과 서너 수 펼치기도 전에 모두를 제압했다.

순식간이었다.

‘무공의 경지가 아예 달라. 그래서 전혀 상대되지 않는다!’

홍화에서 명을 달리한 세 사람도 일결제자 중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당장 실전에 투입되어도 임무를 완수하기에 충분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러나 셋이 모여도 진우선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애초에 습격의 시작이었던 화살 공격도 총 세 발 중 두 개를 진우선이 쳐냈던 걸 감안하면, 실력 차이가 더욱 크리라.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지난번 비무 대회에도 대단했는데! 이젠 그때의 모습조차도 비교되지 않겠구나!’

황백이 명확히 파악했다.

진우선의 실력은 이제 일결제자를 상대로는 비교선상에 있지도 않았다. 보름달과 반딧불의 밝기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명확했으니까.

그래서 진우선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며 더 면밀하게 알아보는 걸 목표로 삼고 있었다.

‘호오-! 검을 저렇게 펼치는 게 진정 가능하단 말인가?’

황백이 감탄했다.

사실, 지난 사흘간 벌써 몇 번째 탄복했는지 모른다.

그는 검을 가르치는 무사부였다.

검으로 유명한 진천검문 출신으로, 강호인들이 귀주검호(貴州劍豪)라 부를 만큼 검술에 대한 조예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황백이지만, 진우선이 펼치는 검을 보며 계속 놀라고 있었다.

‘현기가 가득하군. 놀라울 정도로.’

진우선의 검을 보고 있노라면, 정종무공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 진가를 다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검에 담긴 이치가 너무나 깊고 묘한 까닭이었다.

문득 황백은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진우선은 무사부를 찾지 않았는데, 만약 자신이 진우선을 가르쳐야 했다면 어땠을까?

‘막막했겠군.’

금방 답이 나왔다.

사실 지난 비무대회에서 진우선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면 이제는 가르치기는커녕, 도리어 진우선에게서 배운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도대체 누구의 제자일까?’

이제 의문은 진우선의 스승에게로 이어졌다.

듣자 하니 기연이 있었을 거라 했다. 호심당주 호연광과 부당주 석자풍은 그 이상은 함구하여 말하지 않았다.

‘은거기인이셨구나.’

틀림없었다.

이토록 뛰어난 제자를 키웠는데, 이름이 알려지는 걸 꺼리는 사람은 누굴까?

천하를 위진시켰던 노고수가 강호를 떠나며 이름을 숨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더는 속세의 인연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혹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알릴 의사도 없는 재야의 고수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런 은거기인이 진우선을 제자로 키워낸 모양이었다.

‘아! 그분께서는 직접 가르치며 얼마나 기쁘고 즐거워하셨을까?’

황백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 중 하나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즐거움이라는데, 황백은 최근에 그걸 깨닫고 있었다.

호심당의 무사부로서 무재가 있는 제자들을 지도하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된 상황이었다.

‘허허허. 내일부터 강 대협이셨지? 진우선을 보시면 또 반하시겠군.’

내일이면 진우선을 맡는 무사부가 바뀐다. 황백은 다른 제자를 맡게 되고, 강무옥 무사부가 진우선에게 올 예정이었다.

그는 호심당에서 이번에 새로 모신 무사부였다. 사십 줄에 접어든 황백보다 한 배분이 높은 무림의 선배요, 실력으로는 비교조차 어려운 절정의 노고수였다.

그런 강무옥이 호심당에 오자마자 진우선에게 매료되었다. 지난 봄에 있었던 일결제자들의 비무에서 흠뻑 빠져버렸다.

강무옥은 노년에 후학들을 가르치는 게 즐겁다고 했다.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흐뭇하다고 했다.

‘강 선배께서는 이제 사흘간 행복하시겠군.’

황백이 강무옥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이제 진우선과 함께할 사흘의 시간이 시작될 테니까.

그 말은 곧, 황백에게 주어진 사흘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막 진우선이 홍화의 조장을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홍화. 일호, 삼호, 십일호. 사(死).”

황백이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크게 외쳤다.

홍화의 조장인 일호를 비롯한 세 사람이 죽어 있었다. 진우선의 솜씨였다.

아까 골짜기 반대편에서 홍화의 두 명인 이호와 오호가 숨을 거두었었다.

그러니 홍화는 이제 열두 명 전원이 숨을 거두었다.

홍화의 패배였다.

즉, 청화가 승리.

그렇게 황백의 임무도 끝났다. 사흘간 진우선을 뒤따르며 살피는 것이.

황백은 전투가 다 끝나자, 진우선에게 인사를 건넸다.

“축하한다. 오늘도 네가 승부를 마무리 지었구나.”

“감사합니다, 무사부님.”

“감사는 무슨. 네 실력으로 이루어낸 일인데, 내가 감사받을 게 뭐가 있다고.”

“사흘 동안 보살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무사부님.”

“허허.”

황백이 흐뭇하게 웃으며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올바르게 자란 제자가 이런 느낌일까?

진우선은 무공 실력이 뛰어난데 차분하면서도 예의 바르기까지 하니, 흡족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한 일은 사흘간 네가 해낸 성과를 공표한 것밖에 없지 않으냐?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그렇게 답하며 황백이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참으로 열심히 하더구나. 보기 좋았다. 근데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네가 우승할 것 같은데, 혹시 이리 활약하고 있는 이유가 있느냐?”

“창궁관에 꼭 가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창궁관에?”

“네.”

진우선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두 눈에서는 단호한 빛이 엿보였다.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런 포부도 좋구나.”

황백은 창궁관에 ‘꼭’ 가고 싶다고 말하는 진우선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창궁관은 온갖 무공비급이 갖추어져 있는 정무맹의 보고다.

이토록 뛰어난 실력을 이룬 진우선이 그곳에 가기를 열망한다는 건, 무학에 대해 계속 궁구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이대로만 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구나. 그렇게 된다면, 네게 좋은 연이 있기를 바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정진해다오. 수고 많았다.”

황백이 흐뭇한 마음으로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때 무곡 아래에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오늘은 청화가 승리했소.”

십오행을 총괄하는 석자풍 부당주의 목소리가 무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렇게 십오행의 사흘째가 저물었다.

***

황백은 착각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진우선의 포부는 실제와 완벽히 부합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진우선이 무학에 대해 계속 궁구하며,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진우선의 마음은 마냥 그런 게 아니었다.

진우선의 머릿속엔 아직도 사흘 전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십오행이 열리는 바로 그 시점이었다.

일결제자들이 창궁관 앞에서 십오행의 서막을 알리는 호연강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

진우선은 창궁관에 어린 금빛 광채를 보았다. 몹시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신기해.”

진우선이 넋을 잃은 것처럼 창궁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찬란하게 빛나는 창궁관은 사방에서 홀로 돋보이고 있었다.

황홀한 장관이었다.

하지만 우문혁은 진우선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말이오?”

“창궁관에 후광이 비치고 있는 거 말이야. 그 모습이 너무나 신비로워.”

“후광? 진 소협,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런 게 있소?”

“응? 혁아, 안 보여? 창궁관 봐 봐.”

“무엇을 보란 말이시오? 본인에게는 그냥 창궁관으로 보이오. 햇빛이 슬쩍 어리긴 하는데, 후광이라 하기엔 부족하지 않소?”

“아닌데? 지금 창궁관 전체가 눈부시게 금빛을 발하고 있는데?”

“창궁관 전체가?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도대체 모르겠소.”

진우선과 우문혁이 서로를 보며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로 상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안 보이는데?”

만총도 우문혁과 같은 반응이었다. 그 역시 진우선을 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여전히 창궁관은 황금빛 광채가 일렁거린다.

진우선의 눈에는 분명 그랬다.

좌우를 둘러봐도 창궁관만이 눈부시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창궁관을 바라보는 검노야가 보였다.

검노야가 찬란한 황금빛에 온통 휩싸여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창궁관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금빛 후광이 어려 있었다.

때마침, 검노야가 진우선을 시선을 의식하여 다가오며 물었다.

[우선아. 창궁관에 금빛 광채가 어렸다고?]

[네, 그렇습니다. 스승님.]

[허허. 이상하구나. 나 역시 달리 보이는 게 없거늘…….]

“……!”

믿을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창궁관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는데.

검노야의 환영도 똑같이 빛나고 있는데.

그 황금빛이 오직 진우선에게만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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