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69화 (69/225)

069.

#창궁관 (3)

“후우-.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아니요, 진 소협. 나는 괜찮소. 그리고 이렇게 바로 알아봐 줘서 고맙소. 그렇지 않았다면 언제고 내 몸이 터져나갔을 거잖소?”

“…….”

진우선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우문혁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우문혁이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허허허. 시험을 최선을 다해 치러야겠소. 창궁관에 들어가려면. 온갖 책이 다 있으니, 좋은 답을 구할 수 있을 거요.”

“그렇겠지. 창궁관이라면…….”

“하하. 그리고 그나마 다행이오. 이번에 세 명을 뽑으니, 자리가 딱 맞지 않소? 진 소협이나 총이는 실력이 있으니 당연히 들어갈 테고, 본인만 열심히 하면 우리 셋 다 들어가겠소.”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궁관에 대한 소문을 어제오늘 계속 듣고 있었다.

소문대로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그리고 우문혁은 자신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진우선과 만총은 가진 실력이 이미 일결제자들 중 최고인 까닭이었다.

“그러고 보니 총이는 어때?”

“총이도 창궁관을 간절히 바라면서 준비하고 있을 거요.”

“총이는 왜?”

“춘추관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소.”

“아!”

진우선이 또 탄식을 흘렸다.

만총이 익힌 것은 상승의 절기인 혼원벽력창이었다.

하지만 그도 무언가 해결책을 찾고 있는 걸 보니, 벽에 막힌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문혁에게는 염왕신권의 온전한 내용이 없고, 만총에게는 혼원벽력창을 지도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수련하며 나아가는 데 큰 어려움을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들 둘에 비하면 검노야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검노야가 있어서 배움에 막힘이 없었다.

덕분에 오행진기를 습득하고 완성했으며 광륜을 보았다. 광영무를 온전히 깨우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검노야의 은혜였다.

항상 생각했었지만, 우문혁의 상황을 보고 만총의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우문혁이 툭 던지듯 물었다.

“진 소협, 근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었소? 이런 적은 처음이라, 그걸 미처 물어보지 못했소.”

“그냥, 네가 궁금해서 찾아왔어.”

“본인에게 궁금한 게 있었소? 그럼 뭐든 물어보시오.”

“더 물어볼 건 없어. 사실 남가철방에 너와 총이가 왔을 때, 둘 다 풍기는 기세가 달라져 있더라. 그래서 궁금했거든. 우린 친구인데 내가 너무 모르는 거 같아서. 근데 조금 전에 다 말했잖아.”

“……!”

우문혁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아! 그랬군. 알겠소.”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진우선이 ‘친구’라 말한 게, 우문혁을 싱글벙글거리게 하고 있었다.

***

어둠이 내린 시각.

오늘따라 달빛은 유난히도 밝았다.

밤하늘은 물결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별이 따라 흐르는 듯했다.

그러던 중, 별 하나가 다가왔다. 급류를 타듯이 빠르게 달려들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졌다.

별이 점점 크게 보였다.

무언가 형체가 있었다.

여태껏 별인 줄 알았는데, 별이 아니었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한 인형(人形)이 천도관 지붕에 내려섰다.

그는 달빛을 머금은 백발을 비단으로 묶고, 기품 있어 보이는 연청색 경장을 입었다. 그래서 온몸이 흐릿한 가운데서도 은은하게 빛나니, 별처럼 보일 만도 했다.

전체적으로 마치 속세를 벗어난 사람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검노야였다.

[허허. 그랬구나. 그랬어.]

실없는 웃음이었다.

천도관 지붕에 오롯이 서서 맞은 편을 바라보며 그저 자꾸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맞은편에는 거대한 전각이 있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탑처럼 층층이 쌓아 올려서 만든 건물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위용은 달빛 아래에서도 장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천도각은 그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허허허허허-.]

웃음소리가 길어졌다. 마음이 흡족하고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웃음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허허허허…….]

잦아드는 웃음 속에서 흐느낌이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

슬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기뻐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또는 원망스러워서, 혹은 감격에 벅차서, 어쩌면 그리워서 흐느끼고 있었다.

고풍스럽지만 세상을 잊었을 법한 탈속한 얼굴에서 세속의 오만 감정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이런 건 뭐에 쓰라고…….]

쇳소리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두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눈동자에 거대한 전각이 담겨 있지만, 전각이 아무리 웅장해도 눈동자의 넓고 깊음을 채우지는 못하고 있었다.

멍한 시선은 허공에서 맺혔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달빛이 흐르는 검은 하늘밖에 없는데.

[허허허…….]

힘없는 웃음소리건만, 신기하게도 짙은 여운이 묻어났다.

밤하늘 어딘가에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별처럼, 수많은 기억이 떠오르고 있는 까닭이었다.

옛 추억은 끝이 없었다.

검은 하늘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겹겹이 두르고 또 둘러쌌다.

그 모두가 잃어버렸던, 어쩌면 잊어버렸던 기억이었다.

망각의 때를 지나서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 시절이 주마등 같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아련한 그리움들이 밀려오기 때문이었다.

봇물이 터진 듯 쏟아져 오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 시초는 단 하나였다.

지금도 눈동자에 담겨 있는 창궁관이었다.

창궁관은 생전에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무맹 한가운데, 그리고 정무맹의 주인이 거하는 천도관 맞은편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위엄차고 위풍당당한 전각은 그 이름표도 눈부셨다.

현판을 금으로 만들었는데, 한밤 중에도 달빛에 번쩍이며 광채가 나고 있었다.

거기에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창궁관이라 새겨져 있는 게 어둠을 뚫고 또렷이 보였다.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 내려간 글씨에서 웅혼한 기상마저 느껴졌다.

경천동지할 고수의 필적이 틀림없었다.

또한, 잊을 수 없는 이가 자신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너는…… 너는 나를 잊지 않았었구나!]

정무맹에 저렇게 웅장한 전각을 세울 사람.

그 전각에 창궁관이라 이름 붙일 사람.

날마다 볼 수 있도록 처소 맞은 편에 세울 사람.

그럴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생전에 단 하나뿐이었던 친우.

그의 이름은……

[……문신.]

그 순간, 물줄기 하나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목이 잔뜩 메어 간신히 말을 꺼낼 수밖에 없는 건 한줄기 눈물이 가슴을 적셔서였다.

드디어 생각난 그 이름, 조문신.

그는 일생에 벗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와의 마지막 기억이 떠오르며 심장이 아려왔다.

“자네는 갈 수 없다네!”

“문신,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내가 가야만 한다는 걸.”

“그래도 나는 이렇게 자네를 보낼 수 없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내가 찾아내겠네!”

“자네는 여태껏 최선을 다해왔고, 언제나 최고의 결과를 얻었지. 이제는 나를 쓸 차례네. 저들을 막으려면 그래야 해. 그러지 않으면 의미 없는 피해와 희생이 너무 많아져.”

“괜찮다네. 그 정도쯤은! 나에겐 자네가 더 소중해.”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하지만 문신, 자네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어. 자네의 선택에 수많은 맹도의 운명이 달려 있고, 강호의 안녕과 앞날이 걸려 있지 않은가. 지금 내가 가는 게 그 모두를 위해서 최선이라네.”

“물론 나도 그 점을 잊은 바는 아니네…… 아니! 갑자기 왜 무릎을 꿇는…….”

“맹주님.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들은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가서 그들을 잠재우겠습니다. 천마마저도 쓰러뜨리고 정무맹의 영원한 승리를 가져오겠습니다.”

“허! 이러지 말게. 제발 이러지 마. 나는 허락할 수 없네.”

“맹주님!”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이건 강호 최고수인 자네를 상대하기 위해 펼치는 그들의 사악하고 간교한 술책이야. 천마교 뒤에 사황성마저 숨어들었어! 믿을 수 없게도 둘이 연합했다고!”

“맹주님,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천마교든 사황성이든, 어느 누구도 무사히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안 되네! 난 허락할 수 없어! 그러니 제발…….”

“맹주님-!”

주르륵.

꼭 감은 눈에서 물줄기 하나가 또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눈물이 점점 하염없이 흘렀다.

옛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돌이켜보면 그날은, 살아 있을 때 천도관에 마지막으로 다녀간 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환영이 되어 돌아왔을 때, 항상 천도관만 기억이 났었다. 그래서 천도관만 한없이 다녀갔었다.

다른 기억이 수없이 많았는데, 이 순간을 가장 잊지 못했었나 보다.

멍하니 창궁관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창궁관이 가득 담겼다.

이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문신. 우리는 이렇게 백 년을 사이에 두고 창궁관을 보고 있구나.]

생전에 함께 보았으면 좋으련만, 그때는 창궁관이 없었겠지.

그렇다고 지금이 나쁜 것도 아니다. 지금은 지금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허허.]

편안한 웃음소리가 났다.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현묘하여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정무맹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시선이 창궁관에 모였다.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그윽했다.

곧장 창궁관으로 몸을 날릴 태세였다.

바로 그때, 검노야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 멀리에 있는 호심당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심당의 숙소였다.

[우선아.]

검노야가 호심당의 숙소에서 자고 있을 진우선의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진우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찾고 몰입한 순간에, 공교롭게도 최근의 기억이 맞물리고 있었다.

이건 검노야로서 가졌던 기억들이었다.

[허허허허.]

검노야가 흐뭇한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한 해가 지났다.

처음에 소년이었던 진우선은 이제 부쩍 성장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삼재검법을 시작으로 기초를 닦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오행진기를 깨닫고 광영무를 완성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허허허-.]

감탄이 나왔다. 기뻤다. 놀라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미소는 작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절대 작지 않았다.

이전의 삶에 비한다면, 일 년은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절대 길지 않았다. 무공을 전하기에도, 익히기에도, 그리고 친해지기에도.

그러나 진우선이 있어 그 시간은 너무나도 뜻깊었다.

또한, 진우선이 광영무를 완성함으로써 검노야는 안개에 휩싸인 듯했던 기억이 또 돌아오고 있었다.

[우선아. 네 덕분이구나.]

검노야가 자애로운 눈빛을 지었다.

진우선이 눈앞에 있지는 않으나, 그를 생각하고 있으니 저절로 마음이 따스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건, 인연이었다.

그게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검노야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달 밝은 밤이다. 하늘은 오늘따라 참으로 맑아 한없이 높고 한없이 넓어 보였다.

[하늘의 뜻이 무엇일까.]

검노야가 천기를 헤아렸다.

그러기를 잠시, 돌연히 즐겁게 웃었다.

[허허허. 아직 줄 게 남았구나.]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궁관의 모습이 눈에 닿았다.

그리고 검노야의 환영이 창궁관으로 쏘아졌다.

그는 하나의 빛살이었다.

그가 간 길은 천도관에서 창궁관으로 이어진, 곧게 뻗은 새하얀 직선이었다.

그때 갑자기 검노야가 눈을 부릅떴다.

오래전 친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고 있어서였다.

-창궁자.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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