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각자의 길 (2)
“어허허. 사람이 또 달라졌군.”
남회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제 진우선에게서 압박감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몸짓과 표정이 바람결에 실려 있는 듯 가벼웠고, 약동하는 나무에서나 느낄 법한 싱그러운 향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함께하는 것만으로 생기가 넘치는 기분이 들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는 듯했다.
그는 완벽하게 자연에 녹아든 것 같았다.
사람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지만 진우선은 지금 눈앞에서 순박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
“다행입니다. 이제 부담스럽지 않으시군요.”
진우선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야 광륜을 제대로 갈무리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간 광륜을 다스리기는 쉽지 않았다.
광륜은 오행진기의 끝에서 폭발하듯이 형체를 이루어냈고, 일순간에 번져나가 온몸을 꽉꽉 채웠다.
그 과정에서 육신의 온전하고 단련된 곳은 물론이요, 그렇지 못한 곳에도 광륜이 스며들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솜털 하나 빼놓지 않고 광륜이 가득 들어찼다.
불순한 것들은 모조리 밖으로 밀어냈다. 일전에 정원에서 눈을 떴을 때 몸에서 악취가 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진우선에게 깃든 광륜은 자연의 힘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오행진기의 정수였다.
그래서 혼과 백이 완벽히 단련되지 않은 사람은 이 기운을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남회와 남지홍은 진우선을 마주할 때마다 섬뜩함을 느꼈고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진우선은 이런 광륜을 다스려내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광륜이 진우선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적응하는 시간이 열흘 가까이 필요했을 뿐.
남회가 편하게 물었다.
“그들도 적잖이 놀랐다고 들었네.”
“네, 그랬습니다.”
“혹시 처음에 마주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는가?”
“아니요.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아쉽군. 진 공자의 첫 눈빛을 보았다면 그들의 기억 속에도 영원히 각인되었을 텐데.”
남회가 농담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늘 그의 모습은 확실히 최근의 며칠과는 다르게 자유롭고 좋아 보였다.
그러면서 남회가 길쭉한 목함 하나를 꺼냈다.
“진 공자. 받으시게.”
남회가 목함을 탁자 위에 올리고 직접 열어주었다.
한 자루 검이 보였다.
진우선이 곧바로 검을 집어 들었다.
스릉-!
검이 칼집에서 나오며 맑은 소리가 났다.
가만히 새겨진 광륜(光輪)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양각된 글씨는 크게 반짝이지 않았고, 필적도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획이 굵고 빛이 깊으니, 글자의 뜻이 바로 서 있었다.
딱 마음에 들었다.
몸이 광륜의 힘을 갈무리했듯, 검이 광륜이라는 이름을 차분하게 받아들인 느낌이라서 더 흡족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만족스러워하니 다행일세.”
진우선이 검을 든 채 환히 웃었다. 그러더니 허공에다가 칼을 몇 번 휘둘렀다.
남회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지난 이틀간 밤을 쪼개며, 이화로써 쇠를 다시 두드렸다. 그 결과, 광륜검은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뛰어난 검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진우선이 그 변화를 몸소 느끼며 만족하고 있었다.
뿌듯한 순간이었다.
잠시 후, 검을 몇 차례 힘껏 휘둘러본 진우선이 동작을 멈추더니, 검을 칼집에 꼽았다.
그리고 남회를 바라보았다.
“…….”
“…….”
잠시, 둘은 말이 없었다.
오직 눈빛만이 오고 갔다.
진우선과 남회 모두 기쁘고 흡족하고 보람찬 눈빛이었다.
이제 다 되었다.
나무와 검, 수련과 이화, 각자의 모든 사정이 다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둘에게 남은 건 인사뿐이었다.
마치는 인사.
“감사했습니다. 그간, 정말로.”
진우선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그 한마디로 잠깐의 적막이 깨졌다.
진우선이 애써 미소 지었다.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말하는 게 힘들었다.
이 짧은 말이 무어라고 이리 어렵단 말인가.
그때, 남회가 입을 열었다.
“진 공자. 혹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는가?”
“네. 괜찮습니다.”
진우선이 바로 남회에게 귀 기울였다.
남회가 주섬주섬 움직이더니, 책자 하나를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렸다.
책은 겉과 안이 시커멓게 손때가 묻어 있었는데, 이름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이화를 다스리는 법이 쓰여 있더군. 조부님께 받은 책이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얼마 전에야 기억이 났다네.”
청동화로에서 이화를 발견한 후 책도 찾아낸 모양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조부님의 비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네. 자네의 검도 그걸로 한 번 더 연단하여 더욱 튼실하게 벼려냈지.”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대답하며 책에 시선을 주었다.
실로 귀중한 책이었다. 어쩌면 이 책이 남가철방의 제일가는 보물일 수도 있었다.
남회가 그런 책에서 무언가를 묻기 위해 종이를 휘리릭 넘겼다.
“그런데 여기를 보면, 의문이 드는 곳이 있네. 뜬금없이 등장한 문구가 하나 있는데, 당최 이해가 안 가더군. 한 번 살펴봐 주겠나?”
진우선이 남회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이화(離火)를 품는다면.
-이화(離和)를 이룰 것이다.
딱 한 곳에서만 이화가 다르게 쓰여 있었다.
앞장이나 뒷장을 살펴보면 푸른 불꽃을 설명하기 위해 글과 그림이 한가득한데, 남회가 펼쳐서 보여준 종이에는 글귀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책을 잘못 엮어놓은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더군. 그렇다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무언가 더 들은 기억도 없으니…….”
남회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 진우선은 점점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대하게 했다.
“혹시 알겠는가?”
“어르신. 이화(離和)는 불로써 세상을 화평케 한다는 말입니다. 이화(離火)는 순수한 불의 정화이니, 그것으로 세상을 밝혀 화평으로 이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
남회가 두 눈을 부릅떴다. 진우선의 입에서 글귀의 해석이 술술 흘러나온 까닭이었다.
남회가 다급하게 연이어 물었다.
“그러면 이화를 품는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건 저 푸른 불꽃의 기운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
진우선의 말문이 턱 막혔다.
자신처럼 기운을 받아들이려면 특별한 내가심법이 필요하다. 이는 무공의 기본적인 이치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책에서 이화를 품는다고 했으니, 이화를 위한 내가심법(內家心法)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남회에게 속한 영역이었다. 진우선이 알 수가 없었다.
진우선은 문득 남회가 자신이 한 질문에 대해서도 잘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 혹시 책에 그 방법이 나와 있지 않은 것입니까? 그건 아마도 내가심법일 것입니다. 심공(心功)이라거나, 내공(內功) 같은 말로 쓰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짧은 구결일 수도 있습니다.”
“아! 무공처럼…….”
남회가 탄식을 흘렸다. 그제야 문맥과 상황을 모두 이해한 모양이었다.
이화(離和)는 무공이었다.
진우선이 단박에 글귀 속에 담긴 의미를 꿰뚫어 본 것도 무공인 까닭이다.
이화라는 순수한 기운을 품어 내력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척사와 항마의 성질을 가진 이화로 사마(邪魔)를 제압해 천하를 평온케 할 수 있을 터였다.
진우선처럼 무공을 익혔으면서 이화에 대한 이해가 쌓인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글귀였다.
그러나 남회처럼 대장장이로서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와 같았으리라.
“허허. 그래서 선문답 같았구나.”
남회가 허탈한 표정을 짓더니 곧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진 공자, 자네의 말처럼 구결 같은 건 본 적이 없다네. 내가 책을 맨 뒤까지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그 비슷한 것도 전혀 없었어.”
“아-.”
진우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쉬운 눈길로 청동화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푸른 불꽃이 좌우로 마구 일렁거렸다. 이화가 고개를 젓는 느낌이었다.
마치 그게 아니라는 듯이.
남회가 진우선의 시선을 좇았다.
“그러고 보니 저 청동화로의 이름이 건천이화대화로(乾天離火大火爐)더군. 조부님은 저게 구천(九天)의 보물이라고도 하셨다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는데, 어쩌면 그게 사실일 수도 있겠어.”
그 순간, 진우선과 남회의 눈동자에 건천이화대화로에서 푸른 불꽃이 용트림하듯 타오르는 게 비쳤다.
그 모습이 마치 ‘나를 아느냐?’라고 물어오는 것만 같았다.
“건천이화대화로라…… 이름을 알고 나니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도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름이 거창하긴 하지. 나도 갑자기 달라 보이는군.”
남회가 대장간 한쪽에 놓인 청동 화로를 보며 그 이름을 입안에 되새겼다.
그러더니 진우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후련하군. 고맙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그래도 고마운 건 맞지. 어쩌면 영영 몰랐을지도 모르네. 사실 아무리 진 공자 자네가 은인이어도 이 책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회도 배울 게 있을 정도로 남가철방의 비전이 담긴 책이니, 무인에게 있어서는 신공절학의 무공서나 다름없었다.
그런 걸 누가 함부로 보여준단 말인가.
“사실 요 며칠간 생각이 많았다네. 어쩌면 자네를 마주하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호심당에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그랬고.”
남회의 예감이었다.
그는 철방에 왔다가 떠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겪었다. 그러면서 본능적으로 인연의 끈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 감각이 지금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화를 찾아준 것도 자네이니, 인연이 있지 않을까 싶었네. 내가 이화에 대해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사람도 자네밖에 없고 말이야.”
이게 남회가 결심한 이유였다.
진우선이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물어보길 잘했지.”
남회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선도 편안해 보였다.
이제 정말로 끝났다. 두 사람 사이의 일들이.
“종종 오겠습니다.”
“그리하게. 마음대로 자네의 길을 가다가 잠시 머물 데가 필요하면 들르시게. 광륜검도 쉬었다 갈 겸 말이야. 허허허.”
“네, 그러겠습니다.”
진우선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대장간을 나섰다.
잠시 후.
남회는 문득 대장간이 평소보다 더 넓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사내가 자신의 길을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찾은 건 그 사내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화를 잘 지켜서 꺼지지 않게 하는 게 내 길이려나?”
철방에는 금방 켤 수 있는 불이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수십 년간, 어쩌면 백 년 넘게 켜지지 않았던 불이 있었다.
남회는 그런 불을 지켜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사라져가는 사내의 흔적을 향해 작게 말을 흘렸다.
“조심히 가게.”
***
그날 늦은 오후.
진우선이 길을 나섰다. 거기에 그를 데리러 온 만총과 우문혁이 동행했다.
“진 소협. 정말 진 소협이 맞소?”
“맞아.”
“허! 물론 변할 리 없는데…… 근데 이상하게도 어제와 다른 사람 같소. 어제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른 사람이오.”
우문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진우선을 만났을 땐, 그의 눈빛에 압도되고, 심혼이 사로잡히고, 온몸이 굳었었다.
오늘 아침은 어제보다는 나았다. 짓눌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달랐다. 이전의 압박은 온데간데없고, 상쾌하고 편안한 느낌만 가득했다.
“나도 그래. 참 아리송하네. 이리 다르게 느껴질 줄이야. 마치 무공을 하나도 안 익힌 것 같잖아.”
만총도 우문혁의 의견에 동감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시선이 진우선에게로 쏠렸다. 설명을 바라는 눈초리였다.
진우선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 다행이네. 이제야 무공이 온전히 내 걸로 된 것 같아.”
그 순간, 우문혁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축하하오! 진 소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