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만만치 않은 임무 (5)
장원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현청각의 무인들이 소관에서 적의 잔당을 섬멸했다는 전갈이었다.
그들은 수라객이 혈련수라종의 절반을 이끌고 추적을 나간 틈을 놓치지 않고, 남아 있던 적들을 쓸어버렸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사람들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지고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진우선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소관에서도 완승이네.”
상관적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말대로 현청각의 무인 열 명은 혈련수라종의 마교도 열다섯을 무리 없이 제압했다.
현청각의 무인들은 애초에 사상자가 속출한 광명이대를 보호하면서도 혈련수라종 무리와 대등하게 접전을 치렀고, 광명이대가 퇴각할 틈도 만들어냈다.
물론 그 가운데서 광명이대에 속한 호심당 이결제자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었지만, 어쨌든 현청각 무인들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맞았다.
그런 현청각 고수들에게, 수라객이 없고 절반이 빠져나간 혈련수라종 무리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결국, 혈련수라종의 인원을 나눠 두 무리를 모두 노렸던 수라객의 계획은 최악의 수였다.
“현청각은 정무맹의 모든 것을 지킨다던데…… 진짜로 그런가 봐요.”
민연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와 표정이 한층 밝아져 있었다. 안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여태껏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는데, 지금 모습은 이전과 조금 달라 보였다.
“맞아. 나도 그렇게 들었어. 현청각은 정무맹의 법과 규율을 살피는 일을 하는데, 그보다 사람을 구할 때가 많다더라.”
“아예 정무맹의 수호자라고도 하더군요.”
상관적과 우문혁도 민연하의 말에 동조했다.
그들도 민연하처럼 현청각의 다양한 활약상을 많이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청각의 위용도 지금 상황에선 둘째다.
현청각을 존경하는 그들 세 사람이었지만, 지금 가장 실감하는 대상은 현청각이 아니었다.
“진 소협, 소협의 공이 제일 컸소. 본인은 또 한 번 소협께 탄복했소.”
“맞아. 정말이지…… 나는 우선이 네가 너무나도 놀라워. 매복한 마교도들을 찾아내는 것도 그렇고, 그들의 작전을 파훼한 것도 그렇고…… 수라객마저 네가 제압했잖아. 나는 진짜…… 감탄밖에 안 나오더라.”
“진 공자. 정말 대단했어요! 정말…….”
세 사람이 진우선을 칭찬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존경하는 빛마저 담겨 있었다.
특히 상관적은 목이 메어와 말도 채 잇지 못할 정도로 감회에 젖고 있었다.
“과찬입니다. 운 좋게 제 능력이 발휘될 수 있었고, 다들 함께 힘을 모았기에 적들을 빠르게 물리쳤던 겁니다. 수라객도 대주님께서 먼저 큰 타격을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진우선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일행이 즉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진 소협. 그리 겸손해할 필요 없소.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도 그렇고, 광명칠대의 분들도 모두 다 진 소협의 공을 알고 있소.”
우문혁의 말에 상관적과 민연하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래, 우선아. 넌 당당해도 돼. 우리가 너를 이토록 자랑스러워하게 만들었잖아. 네 모습을 볼 때마다 놀라게 하고. 넌 정말 대단해.”
상관적이 진우선을 추켜세웠다.
그의 말대로, 그들 세 사람은 매우 흡족하고 흐뭇하여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을 정도였다.
진우선은 그들의 진심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자 가슴속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던 뿌듯하고 고마운 감정이 크게 일어났다.
이걸 흐지부지 넘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도 들었다.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우문혁이 진우선을 배려하며 마주 인사했다.
“진 소협, 우리야말로 감사하오.”
상관적은 슬쩍 웃는 것으로 분위기를 쇄신했다.
“하하! 우선아. 편히 웃으며 좋아해도 돼. 네가 잘한 거니까. 가끔 보면 너는 너무 겸손한 거 같아. 무공 실력이 그토록 뛰어나면, 으스댈 법도 한데 말이야.”
상관적이 보는 진우선의 모습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그가 보기에 진우선은 일결제자 중에 이미 최고이며, 이결제자를 포함한 호심당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실력자였다.
게다가 이번에 혈련수라종을 상대하며 특출함을 보였고, 일전에 마기가 뻗친 형산파의 대제자도 제압한 일도 있었다.
진우선은 내로라할 실력자였다.
하지만 진우선은 지금처럼 칭찬받는 순간이 오면 어색해하기 일쑤였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언성을 높이는 일도 없었다.
최고의 실력을 갖췄으니 우쭐거릴 법도 한데, 그런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이다.
상관적으로서는 처음 겪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참 낯설었다.
그때 우문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진 소협의 그런 모습에 더욱 호감이 갑니다. 진 소협이 남을 존중하며 소탈하니, 얼마나 진국입니까? 오히려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만 집중하여 수련에 매진하니 너무나도 존경스럽습니다. 그 모습에 저 자신을 많이 되돌아봤습니다.”
우문혁이 진심을 담아 상관적에게 말했다.
마치 진우선을 변호하는 것 같았다. 진우선조차 ‘내가 그랬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그러나 상관적은 감탄을 터뜨렸다.
“그렇군. 혁이 네 말이 맞아. 나도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군.”
상관적이 우문혁의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무공 실력을 자랑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진우선과 비무 시험을 치른 후, 더 정진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신은 어느새 경험했던 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원치 않는 모습이었다.
“우선아, 고마워.”
상관적이 진우선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하핫. 저는 지금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리 말씀하시니 민망합니다.”
“아니야, 혁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네 덕이지.”
상관적의 말이 옳다는 듯, 우문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민연하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진 공자. 공자는 참 인간적인 거 같아요. 상관 공자와 우문 공자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만 봐도 느껴져요.”
“아! 민 소저도 고맙소.”
진우선이 어색하지만, 또렷하게 대답했다.
입가에 미소도 머금고 있었다. 웃는 모습이 다소 어설프게 보이 기도 했지만, 그래도 진심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전과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제 진우선은 흐지부지 넘기지 않고 있었다.
***
손님들이 진우선을 찾아왔다.
호심당의 이결제자 네 명이었다. 광명이대와 함께 고전을 치렀던 이들이었다.
“진 소협, 고맙소. 혈련수라종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소협 덕분에 이렇게 숨을 돌리게 되었소. 정말 감사하오.”
이결제자들 가운데 조장인 전낙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혈련수라종을 상대하시면서 분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우선과 상관적이 차례대로 말했다.
그 순간, 전낙소가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왠지 공허해보였다.
“힘들었소. 암습을 당해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그저 다들 힘을 합쳐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소.”
초점 잃은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전낙소의 얼굴에 감돌던 씁쓸한 빛이 한층 도드라져 보였다.
“수라객의 마공을 상대하는 게 참 버거웠소. 상당히 강맹하면서도 몹시 음험하니 제대로 대처하는 게 쉽지 않았소. 추량이도 혈련 수라종에 당했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버티는 것밖에 없었소. 분전이라……. 그 말이 딱 맞소. 우리의 모습이 딱 그랬소.”
그의 목소리에 자조가 섞여 있었다.
이길 수 없으니 잘 버텨내야 본전이고, 버티지 못한다면 목숨을 잃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고, 특히 동고동락하던 이결제자 문추량도 숨을 거두었다.
비관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도 전낙소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의 말속에서 자책하고 아쉬워하고, 자신에게 역정을 내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에 진우선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광명이대가 혈련수라종의 기습을 버텨내고, 이렇게 많은 분을 지켜내셨지 않습니까? 저희도 그 소식을 듣고서 놀랐고 걱정 많이 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전낙소는 자신의 조를 이끌고, 광명이대의 부상자를 지키며 잘 싸웠다.
무기력하고 포기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서, 좌절하거나 무너지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대주가 쓰러지고 암습을 당한 위태로운 상황에서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사람은 절대 흔하지 않을 테니까.
그걸 해낸 게 전낙소였다.
진우선 일행은 오히려 그런 전낙소를 보며 그가 조장인 이유를 느끼고 있었다.
“고맙소. 진 소협이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소.”
전낙소의 슬퍼 보이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그러면서 또 다른 용건도 꺼냈다.
“부대주님도 서 대주님께 진 소협의 활약상을 들으셨는데,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하셨소. 진 소협을 직접 찾아뵈려 하셨지만, 허 대주님의 부상이 커서 대신 업무를 다 맡아보고 계신 중이라 오시기 어려운 걸 소협이 양해해 주시오.”
“네,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씀 전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광명이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주는 진우선의 대답에, 전낙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낙소는 그렇게 진우선 일행을 찾은 목적을 다 이루었다.
그러자 전낙소와 함께 온 이결제자 한 명이 진우선에게 말을 걸었다.
“진 공자. 나는 제갈영이에요. 이번에 혈련수라종을 격퇴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제갈 소저.”
진우선이 웃으며 제갈영의 인사를 받았다.
제갈영은 고전을 치러 초췌해 보이는 와중에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수라객과 혈련수라종을 쓰러뜨리는 데 진 소협의 공이 매우 크다고 서 대주님께 들었어요. 그 일들이 정말 대단해서, 너무 놀랍고 감사했어요.”
제갈영이 아까 말했음에도 한 번 더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면서 진 소협이 보여준 항마의 능력에 대해서도 칭송하셨어요. 그것을 통해 마공을 익힌 혈련수라종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고요. 근데 그게 사실인가요? 제 배움이 짧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듣도 보도 못했거든요.”
제갈영은 학식이 높기로 이름난 제갈세가에서 자란지라, 나름대로 자부심이 컸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이야기가 들려왔다.
진우선은 항마의 능력을 통해 마기를 파악하고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건 여태껏 쌓아온 그녀의 상식과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이리 질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잠시 정적이 흐르자, 제갈영이 급히 입을 열었다.
“아! 질문이 너무 뜬금없었죠?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마음이 급했네요. 실례했어요.”
지적인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던 그녀에게서 미안한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괜찮습니다.”
진우선이 별 상관없다는 말투로 운을 뗐다.
제갈영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진우선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실입니다.”
“아!”
제갈영이 탄성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