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52화 (52/225)

052.

#만만치 않은 임무 (4)

서영풍과 수라객이 대결하고 있었다.

싸움의 양상은 처음 맞닥뜨린 때와 달랐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수라객의 구련마장은 너무도 매서웠다.

서영풍의 대라칠검은 안정감 있는 수비가 강점인데, 지금은 구련마장의 공세를 받아내는 것에 급급했다.

더욱 거세게 몰아친다면 수라객이 승리를 거두리라.

수라객이 지금 가진 공력을 한 톨도 남김없이 쏟아붓고 있으니, 곧 그럴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서영풍은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다. 바다에서 거친 풍랑을 만나 마구 휩쓸리며 난파당 하기 직전의 배 같았다.

하지만 서영풍은 끝끝내 버텨내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이면서도 구련마장의 악독한 살기를 흘려 넘기고 있었다.

후우웅-!

그때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렸다.

진우선이 강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폭발적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영풍과 수라객의 표정이 변했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영풍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반면 수라객은 잔뜩 짜증난 얼굴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악에 받친 외침은 수라객의 심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렇다고 진우선이 움찔할 리 없다.

수라객만 보고 달려오던 진우선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서 그대로 검을 베어 올렸다.

수라객이 두 손을 마구 떨쳐내며 붉은 기운을 쏟으니, 허공에 연꽃의 잔상이 생겨났다.

혈련수라종이라는 이름답게 혈련의 기운이 섬뜩했다.

구련마장의 절초였다.

진우선이 혈련을 똑바로 보았다.

‘구련마장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군!’

광포해 보이나, 빈틈이 있었다.

혈련의 핏빛 꽃잎들이 조금씩 어긋나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면 힘을 한 점으로 집중시킬 수 없었다.

아마도 수라객의 몸이 온전치 않아서이리라.

실제로 수라객의 등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서영풍에게 베인 상처였다.

그래서 보이는 허점이었다.

그 틈은 서영풍이 파고들지 못한 간극이었다. 알아챘는데 못했는지, 아예 몰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진우선은 제대로 알아챘으며, 헤집을 능력이 있었다.

어느새 그의 검에 항마의 능을 가진 수기가 듬뿍 실렸다.

스아악-!

검이 한 줄기 빛이 되었고, 허공에 번쩍하며 빛줄기를 남겼다.

쏘아진 광영무의 한 초식이 결점을 파고들었다.

“헛!”

그 순간, 수라객이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뾰족한 칼끝이 동공을 바로 꿰뚫을 것처럼 날카롭게 쇄도해왔다.

심혼마저 후벼 팔 기세였다.

그에 혈련들이 단숨에 부서져 나갔다.

구련마장이 분쇄됐다.

어쩌면 몸을 그대로 관통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고민할 새가 없었다.

막지 못하면 죽을 테니까.

그러는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미쳤다! 미쳤어!’

구련마장은 이리 쉽게 파훼 될 무공이 아니다.

대라칠검 서영풍조차도 막아내는 데 급급할 뿐,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아직 약관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이놈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퍼엉! 퍼엉! 펑!

수라객이 두 손을 한데 모아 힘껏 장법을 뿌려댔다.

순식간에 대여섯 초식이 폭발하듯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제길! 무슨 무위가…….’

수라객이 몸을 비틀며, 구련마장을 지면으로 날려 땅거죽을 마구 두들겼다.

흙먼지가 일어나고, 그사이로 혈련이 쪼개지며 마구 흩날렸다.

구련마장의 구명절초가 펼쳐졌다. 위기의 순간을 항상 타파해준 초식이었다.

바로 그때!

진우선의 검이 수라객의 구명절초가 그려낸 혈련마저 바스러뜨렸다.

‘……!’

그 순간 수라객이 눈을 까뒤집었다.

‘항마?’

확 파고드는 이질적인 기운에 마기가 진탕되었다.

절망이 엄습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욕할 새도 없었다.

여태껏 구련마장이 속절없이 파괴되었던 이유가 한 방에 이해되었다.

이러면 상성마저 최악이었다.

검에 담긴 위력 자체가 구련마장을 웃도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수라객이 급히 초식을 물렸다.

구명절초의 위력이 진우선의 검이 가진 힘에 미치지 못했고, 항마의 능이 있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지 않은 선택이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구련마장을 계속 이어가는 것보단 나았다.

울컥.

속에서 검붉은 피가 치밀어 올랐다.

펼치던 초식을 급히 거두면서, 그 반탄력이 올라와 내부에 충격을 준 까닭이었다.

하지만 수라객은 지금 그것에 집중할 새가 없었다.

허겁지겁 뒷걸음질 치면서, 섬전과도 같은 손놀림으로 허리춤을 쓸었다.

쐐쇄쇅-!

열한 자루의 비도가 진우선에게로 쏘아졌다.

회풍십이비(廻風十二飛)는 열두 자루일 때 가장 위력이 강한데, 아까 서영풍에게 한 자루를 쓴지라 열한 자루였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완벽한 상황이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열하나의 비도가 바람을 갈랐다.

쐐애액-.

파공음이 섬찟했다.

수라객이 비도에 전심전력을 다한 결과였다.

진우선도 그걸 느끼고는 집중해서 보았다.

지척의 거리에서 번개처럼 쏘아진 비도가 사방팔방에 머리 위에서도 쇄도해 들어왔다.

곧 몸에 닿을 듯한 순간.

진우선의 몸이 핑그르르 회전했고, 그의 검이 허공에 여러 궤적으로 휘돌았다.

채채채챙-!

눈 깜짝할 사이 비도가 모조리 튕겨 나갔다.

비도에 실려 있던 회풍십이비 절초의 위력은 온데간데없이, 모두 힘을 잃고 흩뿌려졌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

‘이게 단 한 수……?’

수라객의 뇌리에 경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진우선이 검에 실린 힘을 배가시키며 찔러 들어왔다.

‘막을 수 없……!’

생각을 다 끝맺지 못한 채, 모든 사고가 멈추었다.

수라객이 숨을 거두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

“진 소협…….”

서영풍이 홀린 듯이 진우선을 불렀다.

진우선이 눈을 부릅뜬 채 굳어버린 수라객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뒤로 돌렸다.

“대주님, 괜찮으십니까? 고생하셨습니다.”

“허허-! 놀랍군…….”

서영풍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저 다가오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땅에 널브러진 수라객을 보면서, 생기가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정말이지…… 대단해…….”

“과찬이십니다.”

서영풍이 감탄성을 흘렸다.

수라객의 싸늘한 주검과 진우선이 검을 갈무리하는 모습이 대비되며 눈동자에 새겨졌다.

머릿속에선 수라객과 진우선이 맞붙은 순간이 생생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군. 실력이 뛰어날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서영풍이 놀란 표정을 쉽사리 지우지 못했다.

호심당에서 받은 내용을 토대로, 진우선의 실력이 뛰어남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본 광경은 단순히 ‘뛰어나다’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항마의 능력이 많이 도움 되었습니다.”

진우선이 멋쩍어했다.

서영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보기에 진 소협은 항마가 아니었어도 수라객을 충분히 제압했을 것이네.”

수라객이 어떤 초식을 펼쳐도 진우선은 단숨에 파훼했다.

애초에 비교될 수가 없는 수준이리라.

“자네가 펼친 검의 위력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런 빼어난 실력에 항마의 능력까지 더해졌네. 이건 마치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로군.”

“하핫……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실력만으로도 수라객을 제압한다는 말은, 서영풍이 그 자신보다 진우선이 더 뛰어나다고 하는 것과 같았다. 서영풍은 실력으로 수라객을 압도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서영풍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진우선은 계속 겸양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대주님, 저쪽도 모두 끝난 모양입니다.”

“그렇군.”

서영풍이 골짜기 쪽을 확인했다.

움직이는 사람들은 오직 아군뿐이었다. 광명칠대의 대원이거나 방가장의 무사였다.

마교도들은 피 흘리며 쓰러져 있거나, 상처 입은 채 사로잡혀 있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불가능해 보였다.

“진 소협, 정말 수고했네. 이제 정리할 일만 남았군.”

서영풍이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날렸다.

진우선이 그 뒤를 따랐다.

***

전투조가 영덕현에 있는 방가장의 장원으로 복귀했다.

서영풍이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도 피해가 거의 없는 승리였다. 그저 몇몇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애초에 ‘전투조’라 명명할 만큼 치열하게 맞붙을 거라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혈투가 아니라 제압이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거기에 구출조의 소식이 더해졌다.

그들은 구출 임무를 마친 뒤 새 소리를 내어 보고하고, 바로 장원에 복귀해 있었다.

계획대로였다.

“대주님, 저희도 임무를 마쳤습니다.”

척자경이 서영풍에게 보고했다.

“척 부대주, 수고가 많았네. 빠르게 완수했어. 허대주는 어떠한가?”

서영풍이 바로 광명이대의 대주인 허문회의 상태를 물었다.

“내상을 크게 입어 한동안은 정양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구련마장의 마기가 지독하여 정력(定力)을 흐트러뜨렸다고 하셨습니다.”

“……심각하군.”

서영풍이 몹시나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들은 바가 있어 내상이 클 것은 예상했었다. 강력한 일격을 당했으니, 내력이 진탕되고 경혈이 심히 손상되었을 거라 유추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내기를 가라앉히며 경혈을 다스려야 한다. 그건 시간을 두고서 여러 방법으로 회복을 꾀하면 되었다.

하지만 정력이 흔들렸다고 했다.

짐작했던 것보다 더 우려되는 상태였다.

마기가 공력에도 침투하여 그 근본을 깨트렸으니, 진기가 크게 손상된 상황이었다.

깨진 기운은 함부로 운용할 수 없고, 치료하기도 어려웠다. 영약이나 신단, 혹은 내가고수의 도움이 있어야만 회생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어쩌면 허문회는 내공을 다 잃게 될지도 모른다. 무인에게 그건 죽음보다 더한 비극이었다.

“허 대주의 상심이 크겠어…….”

서영풍이 나지막하게 말을 흘렸다.

“그래도 아까 방가장에서 온 의원께서 대주님이 최악의 상황만은 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오! 다행이군. 다행이야.”

방가장이 꼭 필요한 순간에 의원을 보내며 완벽하게 대처해준 것도 다행이고, 의원의 말도 다행이었다.

그에 서영풍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그럼 다른 대원들은 어떤가?”

“지금 객당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부상이 가볍지 않은 몇몇은 의원께서 직접 살피고 계십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있는 대원은 없다고 합니다.”

“다들 노고가 많았군.”

“한 번 만나볼 수 있겠나?”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송 부대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척자경이 곧바로 서영풍을 안내했다.

객당에서는 며칠간 생사의 고비를 넘고 적에게 쫓기며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한 광명이대의 대원들이 널브러져 쉬고 있었다.

그곳에 서영풍이 조심스레 들어가자, 한 사내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대주인 서영풍일세.”

“광명이대 부대주 송무광입니다.”

“아! 자네가 부대주였군. 정말 수고했네. 허 대주가 믿고 맡길 만했겠어.”

서영풍이 위로의 말을 건네며 송무광을 칭찬했다. 둘은 이전에 스치듯이 몇 번 본 적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빠르게 와주신 덕분에 모든 게 잘 해결되었습니다. 다들 많이 다치고 지쳐 있었는데,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그렇지. 그랬을 테지. 그런데도 다들 힘내서 잘 버텨줬어. 장하네.”

그렇게 서영풍과 송무광이 대화하자, 객당에서 쉬고 있던 광명이대의 대원들이 하나둘씩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걸 본 서영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들 그럴 필요 없네. 편히 쉬게. 고생 많았지 않았나?”

서영풍이 보기에 대원들은 어느 하나 예외랄 것 없이 몹시 지쳐 있었다.

눈빛의 생기가 옅고, 작은 움직임에도 피로감이 느껴졌다. 옷도 찢어지고 베인 흔적이 많았다.

여기까지 온 며칠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더 피곤하게 만들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자네도 다시 푹 쉬게. 내가 와서 불편하게 방해만 됐어.”

그러면서 핵심을 꺼냈다.

“사실 이럴까 봐 안 오려고 했네. 그래도 우리가 이겼다는 말은 전해줘야 하지 않겠나?”

“아-!”

송무광이 입을 쩍 벌리며 탄성을 흘렸다.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듯했다.

그러더니 물었다.

“혹시 수라객도 죽었습니까?”

“그렇네. 수라객만이 아니라 자네들을 뒤쫓던 혈련수라종의 마교도들을 모두 쓰러뜨렸다네.”

“감사합니다. 대주님께서 대원들의 한을 갚아주셨으니, 하늘에서도 다들 감사할 겁니다.”

“하아……. 애석하군.”

서영풍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광명이대의 슬픔에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 까닭이었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 누군가는 남겨져 슬픔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은 진 소협에게 하게나. 그가 수라객을 무찔렀네. 마교도들을 피해 없이 제압한 것도 그 덕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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