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강호인의 숙명 (1)
이틀 후.
해가 지고 날이 어둑해졌을 때, 일행의 시야에 방가장이 들어왔다.
“저곳이 방가장이겠군요.”
“네, 맞습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웅장하네요.”
멀리서 보는데도 감탄부터 터져 나왔다.
넓게 펼쳐진 담장을 따라 설치된 횃불이 밤을 낮처럼 환히 밝히니, 어둠 가운데서 방가장의 위세가 한눈에 보였다.
그 안에는 거대한 규모의 전각들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불빛이 반사되어 전각에 비치니, 빛과 그림자가 위엄찬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산길로 왔지만,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와서 다행이야.”
상관적이 흘낏 뒤돌아보더니, 안도하는 마음으로 일행에게 말했다.
지나온 길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길이어도 안전하게 지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우문혁이 상관적의 시선을 따라 뒤를 보았다.
“그렇네요! 혈련수라종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땐 섬뜩했는데, 산만 타다 보니 어느새 끝이 코앞입니다. 산길만 걸었는데.”
호위 임무는 호위대상의 안전이 최고이니, 련주를 통해 산을 넘어가는 길을 택한 건 올바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길이 험했을 뿐. 그러나 적이 들이닥치지 않고 안전했으니 이 길도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풍경도 좋았습니다. 노숙하지 않았으면 산에서 맞이하는 아침의 아름다움을 못 볼 뻔했습니다.”
진우선은 감회가 남달랐다.
실제로 진우선은 그날 황홀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산에서 노숙하고 일어난 순간 천지가 새롭게 보였다.
햇살만이 아니라 사방이 밝은 빛으로 가득했다.
아침의 약동하는 천하만물의 기운은 전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정말 아름다웠어!’
천지간의 기운이 형형색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건 눈으로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눈으로 보는 세상 너머로 오행진기를 통해 느끼는 세상이 있었다.
온몸의 감각을 열어 세상의 아침을 맞이하니, 세상이 이토록 맑고 촉촉하고 포근한가 싶었다.
흡사 장님이 눈을 떠 밝은 세상을 본다면, 이렇게 느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진 소협,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오. 이리로 오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하고 보지 못했을 것이오.”
“우선아. 그러고 보니 너는 노숙하고 났는데도 얼굴이 더 훤해 보이더라.”
상관적은 그때 감탄했었다.
자신이나 다른 이들과 진우선의 낯빛이 달랐기 때문이다.
마치 진우선에게로 후광이 쏠렸던 것 같았다.
진우선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자연의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아서 그랬나 봅니다.”
“진 소협은 타고난 강호인이시구려.”
우문혁이 새로운 화젯거리를 던졌다.
“강호인?”
“숙부께 배우길, 풍찬노숙이야말로 강호인의 첫걸음이라 하셨소. 근데 진 소협은 노숙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으니, 타고난 것 아니겠소?”
“그거 말 되네.”
“하핫!”
상관적과 진우선이 웃었다.
이 대화에 평소 말이 없고 웃음기도 없는 민연하조차 미소를 머금었다.
풍찬노숙을 타고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강호(江湖)는 강과 호수를 일컫는다. 강호인이라면 그곳에 사는 사람이니, 바람을 먹고 이슬에 잠잔다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은 정말 그의 말대로 기본일지도 몰랐다.
“저도 풍찬노숙을 타고났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양지명이 싱긋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말뜻만 보자면 아쉬워해야 하는데, 그의 얼굴에서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네요. 임무 간에 불편한 상황에서도 저희를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지명이 광명칠대를 대표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
“환영합니다.”
대문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반겼다. 정무맹 광명칠대가 귀빈을 모시고 방가장에 도착한 걸 마중하고 있었다.
진우선 일행도 행렬을 따라 들어왔다.
양지명은 진우선 일행이 머물 전각까지 안내한 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나눴다.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로써 호위 임무는 잘 완수되었습니다. 오늘 밤은 여기서 편히 푹 쉬시면 되겠습니다.”
“양 대원님이야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로 짧게 대화하며 임무를 마무리했다.
양지명은 광명칠대가 머무는 곳으로 갔다.
진우선 일행은 이제 얼굴에서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호심당에서 받았던 첫 번째 임무를 끝냈다는 안도감이 컸다.
임무를 맡은 동안 우려했던 게 있었고 힘들었던 게 있었는데, 이제 와 보니 그 순간들이 아련해졌고 큰일도 없었다.
너무 쉽게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잘 완수했으니 다행이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상관 형도, 민 소저도, 그리고 혁이도.”
진우선이 일행들에게 말을 걸었다.
“진 소협이야말로 제일 수고 많았소. 객잔에서 혼자 우리와 비무를 치르기까지 하지 않았소? 우리 중에 제일 애쓰셨소.”
“그래, 우선아. 진짜 고마워. 수고 많았어.”
“진 공자. 저도 고마워요. 수고 많으셨어요.”
그렇게 다들 첫 임무에 대한 소감을 나눴다.
상관적이 머물 곳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걱정 없이 편히 잘 수 있겠어.”
모든 게 잘 끝났으니, 오늘 밤은 잠을 깊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마음이 비슷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우선의 예민한 감각이 바깥의 분위기가 편치 않은 걸 알아챘다.
밖은 분주했다.
시간이 흘러도 부산스러움이 가라앉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뭐지?”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니 진우선이 가장 먼저 의문을 드러냈다.
“우선아. 왜 그래?”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바깥이?”
상관적이 진우선의 말을 듣고 문 밖을 살폈다.
확실히 장내가 혼잡했다.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방가장의 공기 자체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상관적이 한 무인에게로 다가갔다. 방가장으로 오는 길에 몇 번 스쳐보았던 광명칠대의 일원이었다.
“저는 호심당의 제자로서 임무에 함께했던 상관적입니다. 혹시 지금 왜 이렇게 바삐 움직이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양지명 형님과 함께하는 걸 몇 번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나 보군요.”
광명칠대의 무인이 걸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자못 심각했다.
“도착하자마자 맹의 광동지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소관에서 광명이대와 천마교의 전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혈련수라종이 계속 소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광명이대.
십 대까지 있는 광명각의 한 무리였다. 아마도 같은 소속이니 광명칠대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을 터였다.
그 사실을 기반으로 보면, 소식을 건네는 무인의 표정이 무거운 게 당연했다.
“아! 분위기가 하도 수상했는데, 그렇게 되었을 줄이야……. 이건 전혀 몰랐습니다.”
“저 역시도 직전에 급하게 듣고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이니, 소협들께서 모르실 만도 합니다.”
“그럼 지원하러 가야겠군요. 저희가 가게 됩니까?”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 회의 중이지만, 대개 그래왔습니다. 물론 정확한 건 아침이 되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새벽 중으로 상부의 명령도 도착할 거라고 들었으니까요.”
광명칠대의 무인이 경험에 비추어 말해주었다. 듣고 보니 그게 가장 신속하고 적절한 대처 같았다.
상관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아! 지금 당장 무엇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협들께서는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일단 오늘은 푹 쉬시면 됩니다. 어쨌든 저희는 방금 임무를 완수하며 도착했고, 다음 명령은 내일 아침에 도착합니다.”
광명칠대의 무인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정확한 사실들만으로 결론을 유추하며, 상관적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다음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푹 쉬어야겠군요.”
“맞습니다.”
“자세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상관적이 광명칠대의 무인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그리고 전각 안으로 들어와 곧바로 일행에게 들은 내용을 전했다.
“아아…….”
우문혁이 탄식을 흘렸다.
“…….”
“…….”
진우선과 민연하도 한숨만 내쉬었다.
네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진우선이 입을 열었다.
“혈련수라종이라면 우리가 의장현에서 머물 때 들었던 마교도들이군요. 그들은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소관에 갔고, 이렇게 되었나 봅니다.”
“그렇지.”
진우선의 말에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길을 틀어 호위 임무를 완수했으니 다행인데, 광명이대가 막심한 피해를 본 모양이야.”
“우리 역시 그들과 마주쳤다면, 꽤 힘든 싸움을 했을 겁니다.”
상관적과 우문혁의 목소리에 근심이 잔뜩 어려 있었다.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진우선이 입을 열었다.
“광명이대에도 호심당의 제자들이 있었겠지요?”
“아! 진 소협 말이 맞소. 호심당 전체가 임무에 나섰으니 아마도 그랬을 것이오.”
“아차!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네. 아까 물어볼걸.”
우문혁과 상관적, 민연하의 얼굴이 좀 전보다 더욱 굳어졌다.
광명이대에 호심당의 제자가 있었다면, 사상자가 아는 사람일 수 있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 사상자가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제길!”
상관적이 씁쓸한 기분을 그대로 토해냈다.
“강호인은 칼끝에서 산다고 하지만, 이럴 때면 마음이 참…… 갑갑합니다.”
우문혁도 진우선을 바라보며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푹 쉬라는 말을 들었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상관적이 비관적으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푹 쉬는 건 어려울 듯싶었다. 마음이 편치 않은 까닭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도 그렇게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도 해야겠지요. 내일을 위해선.”
진우선이 담담히 한 마디 내뱉었다.
다른 세 명이 그 말에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첫 임무를 잘 완수했는데도, 웃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반 시진 후.
양지명이 진우선 일행의 전각에 찾아왔다.
“대주님께서 호위 임무는 잘 끝났다고, 수고 많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공식적인 첫 임무는 이로써 끝났다고 합니다. 딱히 누락사항은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귀빈의 호위 임무는 완수되었다.
호심당에서 준 임무의 성공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신경 쓰이는 일은 그게 아니었다.
“소협들의 표정을 보니 아마도 소식을 들으신 것 같은데,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대주 님께서는 내일 새벽 일찍 출발하기로 하셨습니다.”
대주의 결정은 곧 광명칠대의 뜻인데, 그들은 이른 새벽에 도우러 가려는 모양이었다.
“소협들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게…… 임무가 완수되었으니 공식적으로는 이제 호심당의 소속이십니다.”
양지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소속이 옮겨졌다는 건, 이제 광명칠대의 명령에 무조건 따를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았다.
함께 해도 되고, 그냥 돌아가도 되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저희는 이미 다음 임무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장인 상관적이 대표로 말했다.
그러자 다른 세 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맞닥뜨린 상황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었을 뿐, 피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지명이 공식적으로 진우선 일행의 의사를 확인했다.
“이런 경우, 연속 임무가 내려오고 가산점이 주어질 것입니다. 물론 보상도 더해질 겁니다.”
양지명이 공적인 상황에 대해 명확히 설명했다.
그때, 상관적이 질문을 던졌다.
“광명이대에도 저희 같은 제자들이 있었습니까?”
“아! 네, 있습니다. 대주님께서도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시지만, 광명이대에 이결제자 다섯 분이 함께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모두가 탄식을 흘렸다.
슬픈 예상은 이렇게도 잘 들어맞았다.
양지명은 진우선 일행과 그렇게 대화를 마쳤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돌아서는 양지명의 표정이 비장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