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39화 (39/225)

039.

#천도관

정무맹에 밤이 드리워졌다.

달빛이 밝아서인지 밤하늘이 맑게 보였다.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가 있었다.

검노야였다.

검노야는 아무도 모르게 호심당의 뜰을 거닐며 정무맹의 땅을 밟았다.

검노야는 보이되 보이지 않았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무맹의 밤을 지키는 사람들은 검노야를 눈에 담지 못했다. 애초에 검노야가 있음을 알지 못하니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검노야는 달랐다.

검노야의 시선은 정무맹을 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호심당의 여러 전각과 연무장이 담겼다.

눈빛이 아련해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도 했다.

굳은 얼굴은 왠지 모르게 울적해 보였다.

연청색 경장도 힘없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의 탈속한 듯한 분위기가 오늘 따라 몹시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을 풍겼다.

그렇게 검노야에게서 서글픈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그리움이 아닐까 싶었다.

또는, 회한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갑자기 검노야가 멈춰 섰다.

[내가 왜 이러지?]

의문이 들었다.

그저 밤을 벗 삼아 정무맹을 거닐 뿐인데.

걸음걸음마다 온갖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이 올라와 자신을 마구 뒤흔들고 있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러다 문득, 정무맹으로 오던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처음인 줄 알았던 장강과 동정호가 매우 친숙했었다.

마기를 느낀 것만으로도 본능적으로 분노와 적개심이 타올랐었다.

그때도 불현듯이 밀려오는 느낌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머릿속의 기억은 희미한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데, 감정만 마구 솟구치는 까닭이었다.

한데 지금도 딱 그랬다.

심정이 어수선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무언가가 명쾌하게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이 가실 길이 없었다.

그때와 흡사했다.

하지만 그것을 느끼는 검노야는 그때와 같지 않았다.

검노야는 오늘 또다시 느닷없이 원인 모를 감정에 젖어 들었지만, 처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감정에 마구 휘둘리지 않았다.

곧 냉정해졌다.

지금 중요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검노야가 천천히 걸어가면서 침착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지금의 형언키 어려운 기분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무맹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었겠구나. 적의든, 호의든.]

정무맹을 거닐면서 이렇게 되었으니, 정무맹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는 건 명확했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처음 대하는 것일 리 없었다.

다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적의일 수도 있고, 호의일 수도 있으니까.

그것은 단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걸음이 익숙하다는 건…… 정무맹이 낯익다는 말인가?]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지만, 전각들을 보고 연무장을 밟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자주 그랬던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 점 역시 명확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보니, 새로운 의문으로 이어졌다.

[내가 정무맹에서 무언가를 했었나 보군. 과연 무엇을 했을까?]

무인들이 모인 정무맹에서 과연 자신이 무엇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답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검.]

그러다 문득, 지금 서 있는 대연 무장에서 검을 펼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걸었을 뿐인데, 발걸음이 도착한 곳이 대연무장이었다.

이곳은 일전에 진우선이 호심당의 첫 시험으로 비무를 치렀던 바로 그 장소였다.

[내가 이곳에서 검을 휘둘렀었나?]

알 수 없다.

기억나지 않으니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존재를 자각했을 때부터 검노야라고 불렸었구나.]

진우선이 인형을 보고서 처음 그를 불렀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지어진 이름이 검노야(劍老爺)였다.

검을 든 노야.

검을 든 노인의 모습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부른 것이다.

그것도 보통의 존경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을 정도로 존경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문득, 검이 그리워졌다.

이 마음은 얼마 전에도 있었다.

남가철방에 가기 전, 진우선의 검을 보면서 아련한 마음이 있었다.

이제 와보니 그건 그리움이었던 모양이다.

[검을 휘둘러 보고 싶군.]

검노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스응-!

검 한 자루가 손에 쥐어졌다.

유백색의 검이었다.

새하얀 검신이 달빛을 머금어 반짝였다.

진우선에게 검법을 가르칠 때마다 썼던 검이었다.

존재를 자각한 이후로 항상 사용해왔던 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분이 매우 어색했다. 그와 동시에 손에 맞지 않는 느낌도 들었다.

그게 꽤 심해서 절로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뭘까? 이게 아닌 걸까?]

여태껏 잘 써왔는데, 희한하게도 꺼려지고 있었다.

너무나 불편했다.

바로 그때!

[아! 그랬구나!]

검노야가 탄성을 흘렸다.

그의 얼굴이 몹시 편안해 보였다. 그러고는 손에서 검을 놓았다.

[아이야. 그동안 수고했다.]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작별인사 같았다.

그러자 유백색 검의 주위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바람이 검을 에워싸더니 작은 회오리가 되어 휘몰아쳤다.

검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웅-웅- 거리는 소리도 났다.

[아쉬워 말아라.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니. 그게 맞겠구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회오리가 검노야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저 멀리서 산천초목이 솟아올라 회오리를 가두었다. 검이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검이 자연으로 돌아갔다.

검노야가 그동안 수고한 검이 사라져가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어 나지막한 음성을 내뱉었다.

[나오너라.]

그 순간!

허공에서 검 한 자루가 불쑥 솟아났다.

전체적으로 흰빛을 띤 검은빛의 검이었다. 잿빛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했다.

[맞아! 너였구나.]

검노야가 화색을 띤 채 검을 잡았다. 손에 딱 들어오는 느낌이 있었다.

구우웅-!

검이 묵직하게 울었다. 검명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허허-! 내가 잊고 있었다니.]

검노야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안에 기쁨의 외침이 있고, 안도의 한숨도 있었다.

하마터면 떠올리지 못했을 뻔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문득, 진우선이 인형을 보며 검노야라 불렀을 때도 이 잿빛 검을 들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환영으로 지내온 모든 순간에 유백색 검을 사용했으나, 그의 검은 이것이었다.

[좋구나.]

검노야가 검을 들고서 가볍게 휘둘렀다.

신명이 났다.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마음도 편했다.

죽마고우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휘익-!

검노야가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품은 채, 가벼운 몸놀림으로 검을 휘둘렀다.

섬전처럼 빨랐다.

또한 태산처럼 묵직했다.

그러면서도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람의 몸으로 저게 가능할까 싶기까지 했다.

인간으로선 감히 펼치기 힘들 것이리라.

하지만 검노야는 가능했다. 그는 시종일관 미소 지으며 검을 펼치고 있었다. 백발은 단정히 묶었고, 연청색 경장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검의 기세 속에서, 검노야는 너무도 평온하고 행복해 보였다.

이질적임에도 분명 그랬다.

이건 신선의 검무였다. 이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그리 말할 터였다.

그렇게 한바탕 검무가 펼쳐진 후.

검노야가 애정 어린 눈길로 검을 보았다.

[좋았다. 고맙구나.]

그리고 정말 오랜만이지만,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말을 꺼냈다.

[현월.]

그 순간!

현월(玄月)이란 두 글자가 검에 새겨졌다.

검날의 아래쪽, 호수(護手, 칼날 아래 손을 보호하는 부분) 바로 위에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새롭게 나타난 ‘현월’ 두 글자가 달빛을 머금더니 검게 빛을 반사했다.

검노야가 웃음 지었다.

현월이란 검의 이름을 부르니, 비로소 검이 완전히 자신의 것임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내 이름은 무엇일까?]

검의 이름을 알고 나니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면, 스스로에 대해 다 깨닫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 보면, 검노야는 호칭일 뿐이다. 진우선에 의해 불리는 명칭에 불과했다. 자신의 정확한 이름이 아니었다.

아마도 실제 이름은 따로 있을 것이다.

‘진우선’이라는 이름처럼 자신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한참동안 적막이 흘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늘도 땅도 고요하기만 했다. 산천초목도 잠잠할 따름이었다.

[아! 아직은 허락되지 않았구나.]

검노야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맣기만 한 하늘을 보니 씁쓸한 마음이 올라왔다.

안타깝고 아쉬웠다.

오직 허락된 건 검의 이름뿐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하나를 찾았으니.]

검노야가 생각을 바꾸었다.

무언가 계속 떠오르고 있으니, 이름도 언젠가 생각날 것이다.

지금 탄식하며 굳이 어두운 생각에 잠길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가면 되겠지.]

검노야가 손에 든 현월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현월을 찾았듯이,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다 알게 될 터였다.

검노야가 다시 발 가는 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득, ‘하나’라는 단어에서 연관된 무언가가 떠올랐다.

[우선이가 하나를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었으니, 나도 내 것 하나를 알게 된 것인가?]

그 하나란 수기였다.

진우선은 수기의 형을 이루었다. 정무맹에 들어와서 수기를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자 검노야에게도 하나가 허락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추측한 바가 맞았다.

[허허-! 그랬구나.]

웃음이 나왔다.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우선이가 천지간의 기운이 가득함을 깨달아 온전한 광영무를 펼치게 되는 순간에는 얼마나 깨닫게 될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충분한 답을 구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허허! 내게 가르치는 업(業)이 있었구나.]

검노야는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해보니, 사제관계의 업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여태까지는 그저 당연하게 여기며 가르쳐 왔었는데, 어찌 보면 그건 운명에 묶인 업이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검노야가 진우선의 성취를 떠올려보았다.

수기는 형을 이루었다.

목기는 상당한 진척을 이루어 머지않아 형을 이룰 것이다.

화기와 금기는 내공 안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수련을 잘 시작했고.

토기는 아직 없었다.

많이 성장했고, 지금도 잘 성장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갈 길도 꽤 남아 있었다.

[앞으로도 잘 이끌어야겠구나.]

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을 계속 가르칠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업이 아니어도, 진우선을 가르치는 것은 애초에 즐거운 까닭이었다.

그러던 중 검노야는 자신이 어떤 전각 앞에 멈춰 서 있음을 알았다.

[여기는 어디지?]

계속 생각에 잠긴 채로 걷다 보니, 발걸음이 또 어딘가로 그를 데려온 상황이었다.

검노야가 전각을 바라보았다.

[마냥 낯설지는 않군.]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전각 또한 자신의 어떤 기억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검노야가 전각을 빙 돌며 이리저리 살폈다.

정면에 서자 현판이 보였다.

[천도관.]

전각의 이름은 천도관(天道館)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천도관은 정무맹의 주인, 정무맹주의 처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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