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성장과 기대 (3)
우문혁과 만총이 돌아갔다.
우문혁은 올 때만 해도 마음이 무척이나 속상했고, 진우선을 만나서는 열정적으로 화만 쏟아냈다.
그러나 돌아갈 때의 모습은 너무도 홀가분하여 평온해 보였다.
그에 더하여 진심으로 감동하기까지 했다.
“진 소협, 고맙소. 이렇게 진 소협과 이야기하니 어느새 마음이 편해졌다오. 그게 잘 이해되지 않으나, 실제로 그러하니 참 신기할 따름이오. 아무래도 진 소협이 온화함 때문인 것 같구려. 소인은 또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진 소협은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성품도 훌륭하시오. 정말 존경하오!”
우문혁이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그에 진우선이 우문혁의 손을 잡아주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배웅해 보냈다.
우문혁은 몹시 아쉬워하면서 어렵게 발을 돌려 돌아갔다. 자기 생각대로만 행동하여 진우선의 수련을 방해할 수 없는 까닭이다.
아무튼, 우문혁을 돌려보낸 진우선이 다시 나무 옆으로 와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고맙네.’
진우선이 소리 없이 작게 미소 지었다.
애써주는 우문혁의 마음이 고맙고, 수기도 고마운 까닭이었다.
[깊게 흐르는 물은 고요하나니…….]
그 구결을 따라 요동치지 않고 잠잠하게 마음을 먹으니 수기를 깨우쳤는데, 그로 인해 수기의 고요하고 잠잠한 성질이 진우선에게 스며들었다.
그건 평정심이었다.
평정심은 진우선이 이 정도 일로는 전혀 흔들리지 않게 했다.
또, 우문혁의 마음도 가라앉혔다. 혹시나 해서 수기를 나눠주니 그의 울분이 누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나무도 고맙다. 목기를 수련하게 해주는 까닭이었다.
[좋구나. 좋은 마음가짐이야.]
검노야가 진우선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주변에 고마운 것이 얼마나 가득한지 다 알 수 없을 정도지.]
‘네, 맞습니다. 스승님.’
진우선이 나뭇가지를 매만지는 검노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는 고마운 것만 가득한 게 아니라 고마운 존재도 있었다.
***
‘목제자’가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호심당 제자들 사이에서 부담 없이 대화할 만한 주제였다.
특히,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일결제자들에게는 서로 안면을 트기에 적당히 가벼우면서 적당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가볼까?”
“넌 가봤어?”
상당수가 궁금해 했다.
그중에는 직접 보러 올 정도로 호기심 많고 행동이 빠른 제자들도 있었다.
진우선이 그들을 보았다.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일결제자도 있고, 이결제자도 있었다.
진우선은 그렇게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볼 때면 웃어주었다.
싱긋-!
그러면 대개 서로 이름을 말하고 가볍게 몇 마디 하면 대화가 끝났다. 그들 사이에 더 나눌 이야기가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런 대다수가 아닌, 소수의 다른 몇몇이 있었다.
그들은 말본새가 거칠었다.
“진짜 수련 중이야?”
“해괴망측하군.”
“나무 키우는 걸 저리 좋아하다니. 비무는 포기했나 보네.”
“상승의 무공을 수련하는 중이라더니, 철딱서니 없고 해괴망측하기만 하군.”
그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며 다가올 때면, 진우선은 굳이 응대하지 않았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의 말에 요동할 필요는 없어.’
진우선은 검노야의 말을 되새기며 걸러야 할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내력 안에 완벽히 융화된 수기가 그것을 도왔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갔다.
도발하려 했으나, 진우선이 상대해주지 않으니 맥이 빠지고 흥미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찾아온 사람은 달랐다.
진우선은 이 사람에게도 여느 때처럼 웃었다.
싱긋-!
진우선의 미소에서 순박함이 느껴졌다.
그러자 상대가 말을 걸어왔다.
“진 공자. 우리 강론 때 본 적 있죠? 나는 화설옥이에요.”
“네, 본 적 있죠. 진우선입니다.”
진우선이 그렇게 대꾸한 뒤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화설옥과는 딱히 나눌 이야기도 없고, 아예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드러냈다.
진우선의 여태까지의 방법이며, 이러면 상대는 보통 몇 마디 더 하다가 가버리곤 했다.
하지만 화설옥은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계속 나무를 바라보며 다가왔다.
“이 나무만 유독 빠르게 봄을 맞이했군요.”
“……!”
진우선이 놀란 눈으로 화설옥을 보았다.
화설옥은 그런 진우선의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나무의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여기, 여기! 그쵸?”
움이 튼 곳들이었다.
“이거 보고 알아채셨군요.”
“진 공자가 나무를 키운다고 해서 주의 깊게 봤더니 보였어요.”
“화 소저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문득, 이건 눈썰미가 좋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고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했다. 자신이 나무를 키운다는 말에서 상황을 추론하여 남들과 다른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저는 원래 나무랑 꽃을 원래 좋아해요.”
화설옥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나무를 여기저기 살펴보며 말했다.
“진 공자는 나무를 잘 키우시는군요. 상태가 아주 좋네요. 색깔이 전체적으로 힘차요!”
“그런가요?”
진우선이 의문을 던졌다.
언뜻 보면 나무 때문에 물은 듯하지만, 그게 아니다.
여태까지의 사람들과 달라서 질문이 나왔다. 나무의 상태를 살펴보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인 까닭이었다.
“네. 어릴 때부터 많이 키워봐서 알아요.”
화설옥이 나무와 꽃을 원래부터 좋아한다고 했던 건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화설옥이 어느새 진우선의 작은 나무만이 아니라, 독행관의 다른 나무들도 다시 살펴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더니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진 공자. 근데 혹시 이 나무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요?”
“화 소저, 갑자기 그건 왜 묻죠?”
진우선은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진 공자가 이 나무만 좋아하는 거 같아서요. 원래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나무를 다 좋아하거든요. 이렇게 한 그루만 아끼는 경우는 별로 못 봤어요.”
“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처음에 이 나무를 봤을 때는 작고 앙상해서 참 안쓰러웠어요. 근데 움이 트기 시작하고 힘내서 자라나는 걸 보니 마음이 가더군요. 그러다 보니…….”
진우선이 며칠간 느꼈던 감정을 솔직히 말했다.
“그랬군요.”
화설옥이 진우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나무는 참 신비로워요. 가장 약해 보이는데, 가장 생명력이 강하니까요.”
맑은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얼굴로 화설옥이 나무에 대한 자기 생각을 계속 말했다.
“그렇게 강한 생명력은 나무만이 아니라, 자연이 다 가지고 있겠죠? 자연에 속한 사람도 그럴 테고요.”
그렇게 말한 순간, 화설옥의 눈이 빛났다.
그녀의 눈동자에선 맑은 기운만이 아니라 굳은 의지도 엿보이고 있었다. 무언가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진우선은 사람도 그럴 거라는 화설옥의 말에 자신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네. 강할 겁니다.”
끄덕.
화설옥이 진우선의 대답에 고갯짓으로 동의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감사를 표했다. 강할 거라는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화설옥이 짧게 인사하며 몸을 홱 돌렸다.
“진 공자, 그럼 이만 가볼게요.”
돌아선 그녀의 얼굴은 나무를 볼 때와 완전 달랐다.
밝고 환한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인형처럼 감정 하나 없는 무표정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화설옥은 독행관 안으로 들어갔다.
반 시진이 흘렀다.
독행관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문을 나서자마자 쏟아지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밝지 않은 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나오면 생기는 증상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해를 오랜만에 보는 모양이었다.
가느다란 실눈으로 천천히 세상을 보았다. 차츰차츰 시야가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어떤 청년 하나가 나무 옆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우선이었다.
“세월이 태평한가 보군.”
냉소적인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정무맹에 왔다면 무공에 뜻이 있을 텐데, 저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다니.
칠푼이다. 모자란 녀석인 게 틀림없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처음 봐서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알게 될 일이 없으리라.
사실 사내는 진우선만이 아니라 호심당의 제자들 대부분을 그리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뭔가 께름칙했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감각을 집중하며 자세히 살폈다.
그 순간.
“잘못 봤군!”
모자란 녀석이 아니다.
사내의 눈이 깊어졌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진우선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일결제자야, 너는 누구지?”
“저는 진우선입니다.”
진우선이 침착하게 자신을 밝혔다.
당황할 만도 하건만 진우선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하기보다 상대를 살폈다.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오직 겉모습으로 알 수 있는 거라곤 허리춤의 매듭 개수가 두 개라는 것뿐이었다.
“너, 좀 괜찮은데?”
사내는 고개를 비스듬히 하여 진우선을 쳐다보며 괴팍하게 말을 던졌다.
첫인상과 달리 무언가가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쭉정이들만 왔을 줄 알았더니, 진짜배기도 있었네.”
남들은 잘 모르겠으나, 이건 사내의 기준에서 상당한 호평이었다.
사내는 진우선의 모습을 보고 그의 무공실력을 어느 정도 유추한 모양이었다.
“나는 천무결이다.”
이결제자 천무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무결은 자신이 목제자라서 다가온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아니, 아예 목제자라는 것 자체를 못 들어본 사람이리라.
그는 오직 순수한 관심만으로 다가온 듯했다.
바로 그때.
“하하하-! 좋군.”
갑자기 천무결이 웃어젖혔다.
“너는 나에 대해서 못 들어본 모양이지?”
“네, 처음입니다.”
“그렇군. 뭐, 상관없지. 그나저나 기운이 좋아. 심상 수련 중인가? 혹시 양기공을 익혔나?”
천무결이 대뜸 물었다. 바로 본론이었다.
이게 그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는데, 궁금해서 못 참는 성격 때문에 바로 의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진우선을 시답지 않게 여겼으나, 급히 관심이 간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흔들었다. 난감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다.
“아니야? 그렇군. 내가 상승의 공부를 다 아는 건 아니라서. 하지만 느낌이 좋아!”
천무결도 더 묻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그걸 물어보는 것만이 가까이 다가온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뭐, 어쨌든 상관없지. 한 판 뜰까?”
“여기서요?”
진우선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왜? 이 정도 뜰이면 충분하지 않겠어?”
천무결이 독행관 내부 뜰을 살피더니,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구나.”
이건 혼잣말이었다. 천무결은 대화 중에도 자신의 생각만 내뱉고 있었다.
그러다가 물었다.
“아직 정월이 다 안 지났지?”
“네, 내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다행이군. 늦지 않았어.”
천무결은 정월에 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비무는 다음에 하자. 내가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되겠어. 독행관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날짜를 잊었더군.”
그러고 보니, 천무결은 피부가 다소 푸석푸석해 보이고 눈이 퀭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운 것 같았다.
독행관에서 며칠간 폐관수련을 하듯 나오지 않고 수련한 모양이었다.
“다음에 보지.”
천무결이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진우선이 물끄러미 사라지는 천무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이야.’
그게 천무결을 상대한 진우선의 마음이었다.
그는 여러모로 이상했다.
대뜸 ‘한 판 뜨자’고 하는 성격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딱히 마음에 드는 데가 없었다.
‘괴팍하고, 불편하군.’
천무결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한 여인이 독행관으로 향하던 중에 진우선과 나무를 바라보더니, 다가오면서 물었다.
“당신이 진 공자죠?”
“맞습니다만…….”
여느 때처럼 웃으며 대답하던 진우선이 멈칫했다.
‘헛!’
눈을 마주친 순간, 잠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인의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까닭이었다.
여인의 눈은 크고 선명하고 고왔다. 그 안에 자신의 모습이 있으니, 새롭고 신기하며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진우선의 놀람은 거기서 끝이었다.
수기가 쏴아- 소리 내며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찰나간의 동요가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상대를 다시 보게 되었다.
‘눈빛이 정말 아름다우시구나.’
눈이 맑고 투명해 보이면서도 환하게 빛나고 이목구비는 우아하니, 전체적으로 기품이 느껴졌다.
피어나는 작약처럼 화사했다.
누구라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진우선은 이런 여인의 외적인 모습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우선이 당황한 건, 여인의 이어지는 말 때문이었다.
“진 공자는 나무랑 참 많이 닮았네요.”
그 말에 진우선의 동공이 흔들리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