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호심당 (2)
진우선이 방에 들어왔다.
호심당 제자들에게 주어진 숙소였다.
방은 침상 하나에 탁자 하나, 수납장 하나 정도로 단출했다. 하지만 일인실이어서 혼자 쓰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렴 어떨까.
드디어 호심당에 왔는데.
진우선이 침상에 걸터앉아서 미소 지었다.
아까 들었던 호연강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까닭이었다.
“자네들은 이제부터 정무맹의 제자일세. 정무맹의 이름에 걸맞게, 무를 익히고 펼침에 있어서 정의 (正義)를 가슴에 품기 바라네. 그게 호심당(護心堂)의 뜻이기도 하니.”
진우선이 호연강의 말을 되뇌며, 정무맹과 호심당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 뜻을 생각하니, 이름의 무게가 더욱 더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종종 상상했던 정의로운 모습이어서 만족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감동하고 있을 때, 검노야가 말을 걸어왔다.
[드디어 호심당에 왔구나.]
‘네, 스승님.’
[마음에 드느냐?]
‘네. 참 마음에 들어요.’
[네 모습이 보기 좋구나.]
‘스승님 덕분입니다.’
[허허. 다 네가 잘해온 덕분이지.]
검노야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우선아. 네 안에는 어떤 뜻이 새겨져 있느냐?]
정무맹의 뜻.
호심당의 뜻.
그 말들이 담은 의미가 있듯이, 진우선이 마음속에 세웠던 뜻도 있으리라.
검노야는 그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수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 의롭지 않은 사람들이나 그런 일들이 많으니, 언제든 힘을 더할 수 있도록 부족함이 없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래, 좋구나.]
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진우선이 정무맹으로 오면서 목격하고 경험하며 다져진 마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가졌던 생각이었는데, 최근의 경험이 그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뜻을 밝히고 나니, 진우선은 얼른 수련하러 가고 싶어졌다.
그러자 부당주 유청인이 숙소를 안내해주면서 직접 해준 말이 떠올랐다.
‘호심당의 제자로서 배우는 건 새해부터라고 하셨지만, 사용하는 데는 제약이 없다고 하셨지.’
호심당의 제자가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은 지금도 사용할 수 있었다.
무공 수련을 위한 장소인 독행관(獨行館), 무공서를 비롯한 여러 서적을 탐독하며 살필 수 있는 춘추관(春秋館) 등이 그런 장소였다.
‘바로 가자!’
진우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곧장 검을 들었다.
방을 나서는 그의 마음은 이미 독행관에 도착해 있었다.
***
호심당에 온 이후 사흘째가 되었다.
진우선은 그동안 비슷한 일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새로운 숙소에서 지내며 낮에는 독행관에서 수련하는 일상이었다.
독행관은 연공실이 잔뜩 모여 있었는데, 방마다 한 명씩 들어가 자신의 무공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연무장처럼 넓은 뜰에 만들어져 함께 쓰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독행관이 편했다.
누구의 시선도 없고, 주변의 소리도 없다.
아무런 방해가 없었다.
폐관수련이라도 한다 치면, 독행관은 모든 걸 잊고 무공에 몰두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게 정무맹과 호심당에서 연공실을 잔뜩 만든 목적이기도 했다.
진우선은 그 목적에 충실했다.
오늘도 집중하여 하루를 보내고, 연공실에서 나왔다.
“호심당의 진우선입니다. 이제 돌아가려 합니다.”
“알았네. 돌아가 보게.”
독행관의 서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부(名簿)에 진우선의 이름을 기록했다.
그렇게 진우선이 독행관을 나섰을 때.
천지가 어둑해진 시간임에도 두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한 사람은 만총이었다. 그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역시 진 소협! 대단하오. 호심당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연공이라니! 그 무위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다른 한 사람은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그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선이 굵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진우선이 그를 기억해냈다.
악록객잔 근방에서 형산파 사태가 터졌을 때, 의기 있게 권법을 펼치던 청년이었다.
그때 상황이 좋지 않아 통성명하진 못했지만, 그 모습은 뇌리에 남아 있었다.
진우선이 만총에게 물었다.
“어쩐 일이야?”
“너 기다렸지. 혁이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우문혁이오. 반갑소. 진 소협을 꼭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는구려.”
우문혁이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포권했다.
그의 큼지막한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보다 두 배는 될 법한 크기였다.
우문혁은 호심당에 들어오기 전에 만총에게 건네 들었던 친구였다.
진우선도 마주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진우선입니다.”
“진 소협. 말 편하게 하시오. 총이와 동갑이라 들었는데, 그럼 본인과 나이가 같소.”
“그래. 혁이라고 불러.”
만총이 우문혁의 말을 거들었다.
우문혁은 성이 우문이고, 이름이 혁이었다.
“혁아. 만나서 반가워.”
“진 소협, 고맙소. 본인이야말로 만나 뵙게 되어 기쁘오.”
“응? 너는 왜 말을 그렇게 해?”
진우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우문혁은 진우선더러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하더니, 자신을 본인이라고 표현하며 진우선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진 소협은 존대 받아 마땅하오. 그러니 개의치 마시오.”
“혁이는 저번부터 이래. 꼬박꼬박 진 소협이라고 하면서. 그때 엄청 감동하고 감탄했다나 봐. 서로 인사를 하고서도 이럴 줄은 나도 몰랐지만.”
만총의 설명에 진우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만총이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혁이가 진 소협을 만나겠다고 여기서 한 시진이나 기다렸어.”
“응? 한 시진?”
진우선이 놀라기도 잠시.
우문혁이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 소협, 우리는 괜찮소. 진 소협을 볼 수 있다면 이 정도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오.”
“야, 너만 괜찮아, 너만. 한 시진이면 책을 읽어도 몇 번이나 읽었을 텐데.”
“총아. 네가 그랬지. 진 소협은 항상 수련에 힘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우리가 기다리는 게 당연해. 책은 밤에 혼자서 읽을 수 있지만, 진 소협은 기다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으니까.”
만총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들었지? 그렇대.”
진우선도 멋쩍게 웃었다. 난감하고 당황스러워 뭐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우문혁은 두 사람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진 소협. 본인은 소협에게 세 번이나 감탄했소. 형산파의 사태에 맞서 가장 먼저 검을 든 모습이 첫 번째요, 그들과 맞서 싸우면서 마기만 제압할 뿐, 한 사람의 목숨도 가벼이 여기지 않은 게 두 번째요, 그토록 현묘한 검술과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수련에 매진하는 모습이 세 번째라오.”
진우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입도 쩍 벌어졌다.
그러면서 왜 만총과 우문혁이 친구인지 깨달았다.
둘은 닮았다.
만총에게 의기가 넘친다면 우문혁이지 않을까.
그만큼 우문혁에게서 적극성과 과단성이 느껴지고 있었다.
반대로, 만총이 우문혁에 대해 말할 때 무덤덤했던 이유도 어렴풋이 알 듯했다.
우문혁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진 소협. 부탁이 있소.”
“부탁?”
“본인과 친구가 되어주시오. 본인에게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시오.”
“어? 알았어. 무슨 영광스러울 것까지야…….”
진우선이 다소 멍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되는 건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다만 우문혁의 태도가 당황스러울 뿐.
그런 진우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문혁이 호방하고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소.”
***
새해 첫날 아침.
호심당 앞에는 청년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도합 서른한 명이었는데, 제각기 다른 옷에 다른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공통점이 보였다.
허리춤에 새하얀 매듭 하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의미는 호심당 부당주 석자풍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번에 뽑힌 일결제자를 전담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자랑스러운 호심당의 일결제자이니,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할 것이며……”
새하얀 매듭 하나는 일결제자를 나타내는 표식이었다.
호심당은 두 해를 머물며 무공실력을 갈고닦는 곳.
첫 번째 해에는 매듭 하나로, 두 번째 해에는 매듭 두 개로 연차를 나타내는 게 규칙이었다.
석자풍은 그렇게 정무맹의 명예와 호심당의 웅지에 대해서 말하다가, 본격적으로 일결제자가 알아야 할 것들을 언급했다.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호심당 소속의 무사부에게 배움을 청할 수 있으며…….”
호심당의 제자는 치러지는 시험을 통해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종종 주어지는 실질적인 임무를 통해 실전 감각도 익힐 수 있었다.
“……여태까지와 달리 월봉을 받을 것이니 품위를 유지하고 호심당 제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기 바란다. 또한, 호심당의 모든 것이 수련을 위해 개방될 것이다. 이는 오직 배우고 익히며, 수양하고 수련하기에 힘쓰라는 뜻에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호심당 제자의 본분과 자세를 마지막으로 석자풍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러자 몇몇 무인들이 단상 위로 쭉 올라왔다.
“이번에 귀한 분들을 모셔왔으니, 검을 맡아 주실 무사부님은 정무맹의…….”
석자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개하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무사부들은 제자들이 뜻을 정하기 쉽도록 각자의 병장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선택하는 건 호심당 제자들의 몫이었다.
옆에 있던 만총이 물었다.
“우선아.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는 독행관에 가서 연공을 할까 해. 너는?”
“그래? 비슷하네. 나는 독행관과 춘추관을 둘 다 가보려고 했지.”
만총다운 대답이었다. 무공수련과 더불어 책을 읽을 수 있는 춘추관을 빼놓지 않는 것이다.
그때, 우문혁이 불쑥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오오! 진 소협! 본인도 독행관에 갈 생각이었는데, 진 소협과 함께 하게 되어 영광이오.”
그 순간, 만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혁아, 너는 저쪽으로 가야지.”
만총이 가리킨 곳에는 검을 든 무사부가 있었다.
진우선은 권법을 쓰는 우문혁에게 검을 권유하는 만총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만총이 가리킨 방향을 정확히 따라가면, 검을 배우겠다고 모여든 일결제자들이 있었다.
우문혁이 힐끔 그쪽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 소저? 아니야. 그건 보류하기로 했어.”
사실 우문혁은 악록객잔에서 만총을 만나며 미리 말해둔 바가 있었다.
‘나는 화 소저와 함께 배우고 싶어.’
이번에 호심당에 같이 들어온 화 소저, 화설옥은 우문혁이 마음에 둔 여인이었다.
“왜?”
“진 소협을 보면서 느꼈어. 저리 뛰어난 진 소협도 부단히 수련하는데, 부족한 내가 어찌 다른 생각을 먹을 수 있을까? 나는 가문의 무공도 아직 다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는데.”
우문혁이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진우선을 보며 눈을 빛냈다. 자신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만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혁이는 항상 열성적이구나!’
진우선이 보기에 우문혁은 열혈 청년이었다.
***
호심당의 제자들은 제각기 목표가 있었다.
정무맹의 뛰어난 무공을 배우겠다거나, 지닌 무공을 더욱 깊이 깨우치겠다는 목표였다.
두 가지 모두 욕심내는 이들도 있었다.
호심당은 그런 제자들의 생각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강해지기 위해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무사부에게 배움을 청하고, 폐관수련을 하겠다면 독행관으로 가면 되었다.
제자들이 수련과 수양에 전념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그게 호심당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환경을 조성하고 이끄는 데 충실했다.
결정은 제자들 각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다만 지켜야 할 규칙이 하나 있었다.
닷새에 한 번, 대정관에 모여 석자풍 부당주의 강론을 듣는 것이다.
“……임무나 폐관수련 등의 특별한 사유가 아니라면, 지금처럼 꼭 이 자리에 나와 주기 바라네. 여러분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그것 하나일세.”
석자풍은 강론 첫날을 당부로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본 정무맹은 백 년 전, 천마교로부터 강호를 지켜 내고자 무천 조문신 선배께서 명망 높은 협의지사들과 의기투합하여…….”
일결제자 총 서른한 명이 반원 모양의 세 줄로 앉아서 석자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우선과 만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옆에 앉은 우문혁은 계속 어딘가를 힐끔거렸다.
만총이 그 시선의 끝을 보았다.
한 여인이 있었다.
곧장 반사적으로 우문혁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진우선도 강론에 집중하지 못하는 우문혁을 느끼고,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마도 저 여인이 화 소저겠구나.’
우문혁이 저리 반응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여인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진우선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진우선은 다시 석자풍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분은 그런 정무맹의 식구가 된 것이니, 자부심을 느껴도 좋네.”
석자풍은 자부심을 언급하며 당당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일결제자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이제 여러분에게 하나 알려줄 것이 있네.”
석자풍이 한층 더 진지해진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일결제자들의 관심이 모두 석자풍에게로 쏠렸다. 잠시 흐트러져 있던 우문혁까지 모두.
집중을 시키려는 목적이었다면, 석자풍은 확실히 말에 재주가 있었다.
“달포 후에 첫 시험을 치를 예정이네. 시험 방식은 당연히 일대일 비무일세. 그냥 수련하는 것보다는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더욱 큰 실력향상이 오는 법이니까. 또한, 앞으로 주어질 임무에 앞서서 여러분의 실력을 확인해두려는 뜻도 있지.”
석자풍이 비무를 언급했다.
그 순간, 일결제자들 사이에 고요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달포 후면 한 달 남짓이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혹시 질문 있나?”
그 말에 제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뭐가 궁금한가?”
“호심당의 시험에는 항상 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 비무에도 상이 있습니까?”
“미리 들은 게 있는 모양이군. 좋은 질문이야. 이번에도 당연히 상이 있다네. 그게 무엇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나, 당주님과 잘 결정하여 알려주겠네.”
석자풍의 대답에 일결제자들이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수시로 비무를 할 수도 있네. 이건 시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될 걸세.”
석자풍이 눈을 빛냈다. 뭐든지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단호한 눈빛으로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 항상 수련에 정진하도록 하게.”
그 말을 끝으로 강론이 끝났다.
***
만총이 대전을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혁아. 아까 뚫어지게 쳐다보던데.”
“어? 어. 그랬지.”
우문혁은 만총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는 듯하다가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보니 좋더라고.”
우문혁의 시선이 허공에 맺혔다.
무언가 회상하는 듯했는데,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진우선에게 변명하듯이 말했다.
“진 소협. 그렇다고 내 결심이 흔들린 것은 아니오. 무공에 힘쓰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소. 진 소협과의 약속은 전혀 잊지 않았소.”
“약속까지야…….”
진우선이 멋쩍은 듯 웃었다. 딱히 우문혁을 탓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친구가 되자면서 꼬박꼬박 존대하는 우문혁의 태도에는 아직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만총까지 포함해서 셋 다 동갑인데, 우문혁은 오직 진우선에게만 그러고 있었다.
진우선이 가볍게 말을 던졌다.
“아까 그분이 화설옥 소저 맞지?”
“맞소. 진 소협도 그녀를 바로 알아봤구려.”
“아름다우시더라.”
진우선이 자신의 느낌을 말했다.
화설옥은 아름다웠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인이어서, 마치 진한 향기를 흘리는 것 같았다.
일결제자 중 미모가 돋보이는 여인이 서너 명 보였지만, 그중 첫눈에 들어오는 건 화설옥이었다.
그러나 들뜬 음성의 우문혁과 달리 진우선은 차분했다.
진우선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나, 얼마 전 눈이 휘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웠던 벽소군을 만난 탓이었다.
“역시! 진 소협도 화 소저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알아볼 줄 알았소.”
우문혁이 화색을 지었다.
진우선은 분명 화설옥을 말했는데, 마치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처럼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우문혁이 진우선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진 소협! 연심(戀心)은 아니 되오.”
진우선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문혁의 추측은 자신의 심정과 전혀 달랐으니까.
“난 괜찮아. 화 소저를 좋아하지 않아.”
“그렇다면 다행이오. 하마터면 진 소협과 경쟁해야 할 뻔했소. 만약 진 소협과 비무라도 펼치게 된다면…… 본인은 아직 자신 없소. 하하하.”
우문혁이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웃었다.
“아! 그런데…….”
우문혁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진 소협이 화 소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뭔가 아쉬운 마음이오.”
그 순간.
탁- 하고 만총이 우문혁의 등을 가볍게 쳤다.
“에휴. 그만해라.”
만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보기에 우문혁은 항상 열정적이지만, 때론 어수룩한 바보 같았다.
“그보다. 혁이 너 비무나 임무에 관해서는 들은 거 없어? 많이 알아뒀다며?”
만총이 우문혁에게 물었다.
우문혁은 일찌감치 장사에 와 있었고, 호심당의 소식을 많이 들어 둔 상태였다.
진우선도 눈을 빛내며 우문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우문혁은 만총이 아니라 진우선을 보며 답했다.
“진 소협. 본인이 일전에 들으니, 호심당은 시험과 임무가 번갈아 있다고 하오. 그중에 첫 시험은 관례처럼 비무라고 들었소. 원래 비무는 일대일이 기본이고, 두셋씩 짝지어서 하는 조별 비무도 있으며, 때론 논검 비무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일대일인 모양이오.”
우문혁이 쏟아내듯이 계속 말을 이었다.
“임무는 그때그때 다른데 요청이 오는 대로 나간다고 들었소. 그 기간이 짧게는 보름에서 길게는 두 달가량인데, 그 이상인 임무도 있었다고 하오.”
임무는 말 그대로 실전 임무였다. 그러니 기간을 지금 가늠할 수 없었다.
“근데 석 대협이 실리를 매우 중요시하시는 분이라 하더이다. 무공이 멋있고 위력적인 것보다는, 빠르게 상황을 해결하며 다치지 않는 것을 주로 보신다고 했소. 그래서 석 대협이 맡은 제자들에서는 임무로 인한 사상자가 적다고 하오.”
비무와 임무는 그 방식도 중요하지만, 평가가 제일 중요했다.
평가에선 심사관의 성향도 무시할 수 없는데, 우문혁은 그 점마저도 다 알아본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험이 종종 비무가 아닐 때도 있다고 하오. 가끔 강호의 흐름이나 형세에 관한 생각을 논하는 시험도 있는데, 이것도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소.”
우문혁은 호심당의 온갖 기록까지 다 꿰뚫고 있었다.
그의 설명이 깔끔해서, 호심당의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파악이 되었다.
“완벽하게 알아뒀구나.”
만총의 생각대로 우문혁은 원래 준비성이 철저했다.
다만 엉뚱한 면이 있어 종종 그 점이 가려질 따름이었다.
“고마워.”
진우선도 우문혁에게 감탄을 표했다.
“아니오, 진 소협. 본인이 진 소협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오.”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생각건대, 본인은 진 소협만이 상을 탈 자격이 있다고 믿소. 실력으로나 의기로나 누가 진 소협을 따를 수 있겠소?”
“그건 비무에서 다 이겨야 받는 거잖아?”
“맞소. 그래서 진 소협이 탈 거라 생각하오.”
진우선이 되묻자, 우문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만총이 물었다.
“잠깐. 나는 자격 없어? 보통 상으로 비급을 주셨잖아. 나도 비급 받을 생각인데.”
“총아. 비급이 네게 왜 필요해? 그리고 중요한 건 그로써 얻을 명예와 영광인데, 진 소협에게 더 어울려. 안타깝지만 네 의기와 열정이 진 소협에게는 모자란 거 같다. 지금 이렇게 상을 바라는 네 모습도 좀 아쉽고.”
“그게 무슨…….”
만총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우선도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혁이 너는? 너도 충분히 탈 수 있지 않아?”
“아! 나는…… 나도 받고 싶소. 하지만 진 소협이 받는 게 더 옳다고 생각하오. 진 소협을 두고서 어찌 본인에게 자격이 있겠소?”
“아…….”
진우선이 차마 말끝을 잇지 못했다.
인제 보니 우문혁은 열정적인 괴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