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호심당 (1)
“자네, 어제 요 앞에서 일어난 일 보았나?”
“형산파 말하는 건가?”
“그렇지.”
“아니. 보지는 못하고, 듣기만 했어. 제자들이 갑자기 광기에 휩쓸렸다고 하더구먼.”
“듣기는 제대로 들었군.”
악록객잔의 이 층은 평소보다 더 시끌벅적했다. 무인들이 식사하면서 죄다 어제의 이야기만 하는 까닭이었다.
“최근의 연이은 충돌로 정무맹에서 철혈보와 무당파, 형산파에 지원을 요청했었다던데…….”
“그걸 다 알아내고서 습격한 것이지.”
“힘 한 번 써보지 못했다더군. 허어-!”
무인들은 다들 허탈하여 한숨만 내쉬었다. 가슴이 먹먹한 표정이었다.
철혈보의 피습.
무당파의 괴멸.
이미 그 두 소식만으로도 뒤숭숭하고 침통한 분위기였는데, 설상가상으로 형산파의 비보가 들려온 탓이었다.
세 번 모두 호각지세도 아니었다. 천마교의 계략에 고스란히 당해 이쪽의 피해만 있었다.
또한, 형산파의 사태는 충격적이게도 정무맹의 터전인 장사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변명할 수 없는 정무맹의 완패였다.
“정무맹이 바쁘겠군.”
“당연하지. 피해가 크고, 자존심도 크게 상했을 테니까.”
무인들은 저마다 정세를 가늠했다.
몇몇은 희망을 품고 향후를 예측하기도 했다.
“그래도 만상각주가 만만한 사람은 아니니까…… 묘수가 있을 걸세.”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듣자 하니 어제 형산파를 도운 이들이 대부분 정무맹의 무인들이라더군.”
“맞네. 협의지사가 따로 없지. 그러고 보면 정무맹에도 아직 여력이 있음이야.”
그렇게 호사가들이 마구 떠들고 있을 때, 한 중년인이 이 층으로 계단을 올라왔다.
그 순간.
“…….”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들 말을 그쳤다. 그를 아는 까닭이었다.
그는 서검자(書劍者) 기천극이었다.
기천극은 형산파 장문인의 사제로, 오래전부터 문과 무 양쪽에서 실력을 날린 뛰어난 고수였다. 뭇사람에게 대협이라 불릴 정도로 인망도 높았다.
그런 기천극이 어두운 얼굴로 계단을 계속 올랐다.
그의 발걸음은 지극히 가벼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인들에게는 그의 걸음이 쿵- 쿵- 묵직하게 들려왔다.
“기 대협의 안색이 좋지 않군.”
그가 삼 층으로 올라가고 나서야 이 층에 내려앉은 침묵이 깨졌다.
“대사형인 맹두고 대협까지 그랬으니 비통하실 만도 하지.”
“허허…….”
다들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계속 한숨을 쉴 것 같았다.
***
기천극이 악록객잔 삼 층에 올라 왔다.
그러자 진우선과 만총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진 소협, 그리고 만 소협. 어제는 여러모로 고마웠네.”
“아닙니다. 저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내가 고맙지.”
기천극의 입에서 계속 고맙다는 말이 나왔다.
어제 많은 무인이 형산파를 도와준 덕에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했던 까닭이었다.
기천극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도움을 준 진우선에게 감탄을 섞어 감사를 표했다.
“진 소협. 자네가 딱 필요한 힘만 써준 덕분에 제자들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네. 항마의 능력이 과연 대단하더군. 진심으로 탄복했어. 정말 고맙네.”
“과찬이십니다. 운이 좋았지요.”
진우선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들은 형산파 내의 한 식구였으니, 원래는 서로 베려고 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마기로 인해 살육의 본능이 앞서며 이성을 잃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우선은 속전속결로 철저히 마기만 상대하며 제자들을 제압했었다.
“그 운도 실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감사합니다.”
기천극이 거듭하여 감탄과 감사를 전하니, 진우선은 그제야 겸양을 그쳤다.
“만 소협, 자네에게도 고맙네. 함께 했던 소협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저희도 도움이 되어서 기쁩니다.”
기천극이 만총과 그의 동료들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만총이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실례가 아니라면, 어제의 일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음……. 말하기 부끄러우나, 자네들에게는 말해줘야겠지.”
기천극은 잠시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어제의 그건 마기의 한 종류라고 들었네. 독처럼 작용하는 마기라더군.”
“헛-!”
“그런 마기가 있었습니까?”
진우선과 만총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기가 독처럼 작용해 중독을 일으킨다. 그러면 이지를 상실하고 적아의 구분 없이 살육의 본능에 미쳐버린다.
섬뜩한 일이었다.
마공을 익히기는커녕, 마기에 노출되는 것만으로 중독되는 것이지 않은가.
그 결과는 굳이 묻지 않아도 참혹할 게 당연했다. 대참사로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제 그 정도로 끝난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런 생각들로 진우선과 만총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나도 처음 들었네. 하지만 최근 몇몇 곳에서 이와 흡사한 상황들이 벌어졌다고 하더군. 천마교가 파죽지세를 보이는 데 이런 이유가 있었어.”
기천극이 씁쓸한 표정 가운데 애써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정무맹에서는 그것에 대해 대책을 거의 찾았다더군. 이미 예의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코앞에서 떡 하니 일이 벌어져 당황한 모양이지만 말이네.”
진우선과 만총이 귀 기울여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무맹이 대책을 거의 찾았다고 하니, 이제는 맡기면 될 터였다.
그에 진우선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질문을 건넸다.
“맹두고 대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산파의 대사형 맹두고는 가장 위협적이던 존재였다. 마기가 독처럼 작용했다면, 맹두고는 가장 심하게 중독된 사람이었다.
“두고도 일단 목숨은 건졌네. 물론 마기가 골수에까지 스며들었었으니, 한동안 충분히 제 몸을 다스려야 할 테지만 말이야.”
“아-! 정말 다행이네요.”
진우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기를 운용하여 광영무를 펼쳤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는 아마도 꽤 오랫동안 요양해야 할 테지만, 그 정도에 그친 게 다행이었다.
“두고가 오전에 정신을 차리더니 크게 오열하며 괴로워했네. 제 손으로 사제들을 벤 기억에 숨도 제대로 못 쉬더군.”
기천극도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심정도 맹두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진 소협이 아니었으면 더 큰 과오를 저지를 뻔했다고 하더군.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었을 거라면서 나에게 꼭 감사를 전해 달라고 했어. 진 소협, 정말 고맙네.”
“의식을 잘 차리셔서 다행입니다.”
“고맙네. 진 소협은 보면 볼수록 사람이 참되군.”
기천극이 진우선의 사람됨에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진 소협. 두고가 은인에 관해서 묻기에, 정무맹 호심당에 갈 협의지사라 말해주었다네. 나중에 꼭 만나고 싶다고도 했어. 후에 시간을 한 번 내주겠는가?”
기천극이 어제 짧게 들은 바를 맹고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어제는 상황이 매우 급하여 자세한 대화를 하지 못했었다. 오늘 약속을 잡은 게 그래서였다.
어쨌든, 진우선이 기천극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맹 대협이 회복하시면, 저도 한 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고맙네. 두고는 자네의 그 말을 참으로 기뻐할 걸세.”
기천극이 맹두고의 입장을 전했다.
“그리고 형산파에서도 이번 일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을 걸세. 나도 마찬가지네.”
진우선의 이름은 기천극의 마음 속에서 은인으로 새겨져 있었다.
***
-나중에 정무맹에 가서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울 겁니다.
진우선은 예전부터 가슴에 담아온 다짐이 떠올랐다.
‘잘 해냈어!’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열심히 익힌 무공으로 마기를 잠재웠고, 중독된 무인들을 최대한
구해내며 형산파의 비극을 최소화 했다.
사태를 빠르게 진정시킨 건 물론이거니와, 드디어 목표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오고 있었다.
[훌륭했다. 우선아.]
검노야도 진우선을 칭찬했다.
[광영무도 능숙히 잘 펼쳐내더구나. 수기를 담아내는 것도 부족하지 않았고.]
‘스승님께서 잘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무공은 초식만 단순히 잘 펼쳐낼 수 있다고 해서 항상 이기는 게 아니었다.
상황이 닥쳤을 때, 가진 실력을 다 끌어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행히 진우선은 그러지 않았다.
검노야와의 실전 같은 비무를 통해서도 많은 걸 배웠으니까.
항마의 효능을 지닌 수기 역시 광영무 속의 한 갈래이다 보니, 펼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검노야에게 마음을 전했다.
[앞으로도 그리하면 된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니, 정말 잘했구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진우선이 기뻐하며 대답했다.
검노야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런 진우선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
이틀이 지났다.
만총과 진우선은 같이 아침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네.”
“호심당에 가는 날? 그렇지.”
둘은 새해가 닷새 남은 내일, 호심당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한 해가 시작될 때마다 호심당도 새로운 제자를 맞이하니, 이제 때가 된 상황이었다.
또한, 장사의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이곳에 더 있는 것도 마냥 편하지 않았다.
“근데, 우선아. 내 친구 중 한 명이 너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라.”
“나를?”
“어. 진 소협을 꼭 만나보고 싶다고 엊그제도 말하고 어제도 말했어. 근데 네가 수련 중이니까, 호심당에 가면 만날 테니 거기서 보라고 했지.”
만총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다 보니 말의 내용과 다르게, 만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느낌을 풍겼다. 그저 알아두라는 의도로 보일 정도였다.
“누군데?”
“우문혁이야. 호심당에 가면 만나게 될 거야. 이번에 같이 들어가 게 됐거든.”
“그래, 알았어. 기억해둘게.”
진우선이 대답했다.
그 후 둘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진우선은 대화를 잘 기억한 채 검을 들고 나갔다. 수련하기 위해서였다.
***
정무맹 호심당주의 집무실에서 두 중년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금 진우선과 만총이 맹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아! 유 부당주가 말한 그 인재들이군.”
호심당주 호연강이 부당주 유청인의 말에 반응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저뿐만이 아니라, 철혈보의 천 대협도 말씀하시고 형산파의 기 대협도 말씀하셨죠.”
“그렇지. 그러고 보면 전에 탁 대협께서도 칭찬하셨다 했지 않았나?”
“맞습니다. 무한에 다녀왔을 때, 그렇게 전해드렸지요.”
호연강의 입가에 자연스레 기대에 찬 미소가 어렸다.
호심당에 모여드는 인재들 가운데 누가 크게 부족하겠냐마는, 그래도 기대하는 건 늘 즐거운 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을 보기 전에 소문을 먼저 들은 건 처음인 것 같군.”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듣자 하니 내당의 고수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상황이 마무리되었다는데, 특히 우선이의 활약이 컸다고 하더군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호연강과 유청인은 엊그제 벌어진 형산파 사태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
이미 맹 내에 널리 알려진 상황이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정무맹 무인들은 맹의 실책에 화를 내면서도, 크게 활약한 호심당 제자들의 기개와 실력에 매우 환호했다.
그건 곧 호심당에 대한 호평으로 이어졌으니, 호연강과 유청인은 진우선과 만총에게 절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 참 대단하지. 의협심이 있고, 품성도 올바른 느낌이야. 얼른 만나보고 싶군.”
호연강이 인자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강인한 정광이 번뜩였다. 살집이 다소 있어 너그러워 보였으나, 눈빛이 발하니 고수의 풍모가 한껏 뿌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호심당주의 집무실에 진우선과 만총 두 사람이 들어섰다.
호연강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당주인 호연강일세. 두 사람의 입맹을 축하하네. 엊그제 큰 활약을 보여 맹과 강호에 희소식을 전해줘서 고맙고.”
“청운무관에서 보고 오랜만이지? 반갑다.”
호연강과 유청인이 나란히 한마디씩 하며 눈을 빛냈다.
그들의 기대에 찬 시선을 진우선과 만총이 받았다.
“감사합니다. 저희는 다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진우선은 따스한 환대에 마음이 벅차오르는 와중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총은 옆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뜻에 동조했다.
“허허. 그런가?”
호연강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한편.
하남성에서 광서성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요충지 소양현(邵陽縣)에 우뚝 서 있는 십 층 전각.
그 맨 위층에서 백발의 사내가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흑의인이 말을 건넸다.
“주군, 섬호가 방금 떠났습니다.”
“거동은 괜찮아졌나 보군.”
“그렇습니다. 당분간 요양해야겠지만, 운신은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장사에서 왔을 때에 비하면, 그만하면 다행이지. 멸절검을 지우지 못했지만 말이야.”
백발 사내에게서 냉정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만으로는 이삼십 대인 듯하지만, 일말의 고저조차 없어서 나이를 가늠키 어려웠다.
“결국 흑죽과 섬호, 지옥귀 중에 나를 웃게 한 건 흑죽뿐이로군.”
백발 사내의 말에 즉각 흑의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주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모든 게 수하의 부족입니다.”
“아니야. 자책할 거 없다. 네 탓이 아니니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간 것일 뿐이지.”
백발 사내가 싸늘한 음성으로 속 말을 이었다.
“어차피 무당파를 괴멸하고, 철혈보와 형산파의 세를 크게 줄였으니, 정무맹은 당분간 크게 움직이지 못해.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다. 그러니 더는 신경 쓰지 마라.”
백발 사내가 단호하게 일을 맺고 끊었다.
하지만 사내의 말에 흑의인 지옥귀는 마음이 불편하고, 또한 미련도 남았다.
이번에 임무를 맡은 셋 가운데 흑죽만이 청송자를 죽이고 무당파를 괴멸시키며 가장 완벽한 성과를 만들어낸 까닭이었다.
그러니 주군의 기대를 채우지 못한 지옥귀는 절로 흑죽과 비교되며 위축되고 있었다.
물론 그건 지옥귀의 심정일 뿐이다.
백발 사내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형산파를 도운 자에 대해선 아는 바 있나?”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름은 진우선이며, 호심당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정도의 은거고수에게 항마 계열의 무공을 사사한 것으로 보이며…….”
“무공에 대해선 모른다는 말이군. 그럼 됐어.”
백발 사내가 지옥귀의 말을 잘랐다.
“아무튼, 재밌게 됐어. 쌍괴의 노력을 무위로 돌릴 만큼 강력한 항마공이 나타났으니까. 현재 강호에 대해선 이미 다 파악한 줄 알았는데 말이야.”
백발 사내의 음성에서 자부심이 잔뜩 묻어나왔다. 마치 천하를 관조하는 듯한 여유도 풍겼다.
“하긴, 내가 모르는 게 나올 수 있지. 흥미로워. 재밌고. 그래! 이래야 강호지.”
백발 사내의 말은 그 내용과 달리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즉, 말과 음성이 너무나 조화롭지 않았다.
그러나 백발 사내는 그런 것에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돌발변수에 집중했다.
“진우선이라…….”
“주군. 처리할까요?”
“네가?”
“…….”
“굳이 그럴 필요 없다. 게다가 너 혼자는 어렵고.”
백발 사내의 싸늘한 말이 수하인 흑의인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박혔다.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괜히 용쓰지 마라. 섬호도 돌아갔으니 우리도 계획대로 움직일 거야.”
흑의인이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백발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기 할 말만 이어갔다.
“이제 원단이다. 지존께서 모두 모이라 하신 날이지. 그 명은 모든 임무에 우선한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흑의인이 재빨리 대답하며 사적인 마음을 거두었다.
그는 그저 백발 사내의 명을 따를 뿐이다. 백발 사내가 지존의 명을 따르듯이.
“가자.”
백발 사내가 몸을 돌리며 흑의인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읊조리듯 말했다.
“진우선이라…….”
그 순간, 두 눈에서 백광(白光)이 쏟아졌다.
시리도록 새하얀 눈동자에서 귀기(鬼氣)가 서릿발처럼 뻗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백안백발(白眼白髮) 사내의 얼굴에 미동이 생겼다.
“참 재밌어. 강호는.”
그가 웃고 있었다. 섬뜩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