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장사 (5)
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사문의 존장인 중년인의 외침에도 그들의 눈동자는 여전히 시뻘건 핏빛이었다.
오히려 그 눈빛이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크르르!”
그들에게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몸이 피에 젖을 때마다 점점 더 짐승처럼 변해갔다.
중년인이 다급히 명령했다.
“형산파의 제자들은 이들을 제압하라!”
“사백!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주변의 멀쩡한 제자들이 재빨리 자신의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시뻘건 안광이 솟구치는 이들을 겨누었다.
그들은 모두 동문수학한 사형제들이었다.
이내 그들은 서로 살을 찢고 베었다.
퍼퍽!
촤아악!
“큭!”
“크악!”
형산파 제자들에게서 비명이 솟구쳤다.
중년인 또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제자들 사이를 누비며 제압했다.
“사제, 갑자기 왜 이러는가?”
“황아! 정신 차려!”
곳곳에서 안타까움에 가득 찬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맞대고 있을 뿐, 차마 제압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핏빛 안광을 뿜어내는 자들은 변함없었다. 그들은 지금 인간의 탈을 쓴 잔학무도한 야수일 뿐이었다.
“광기구나! 마기가 들어버렸어!”
중년인이 비통에 젖어 외쳤다.
그의 외침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눈가에는 눈물이 보였다.
핏빛이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다쳐서 그런 게 아니라, 제자들의 핏방울이 잔뜩 튀어서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중년인의 심정은 피눈물이 쏟아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는 너무나 괴로웠다.
퍽!
또 한 제자를 스쳐 지나가며 강한 일격으로 기절시켰다.
중년인은 장사로 온 형산파 무리 중 최고수였다. 당연히 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이었고, 그들을 쓰러뜨리는 건 힘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도 쉽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슬프고 아픈 까닭이었다.
“허어!”
중년인이 탄식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비참한 광경을 목도하고야 말았다.
“마기를…… 걷잡을 수가 없구나!”
형산파 제자들 사이로 시뻘건 안광이 더 번지고 있었다.
대다수가 전염된 것만 같았다.
이미 눕힌 제자가 열 명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회색 장포의 사내 하나가 사람들이 밀집된 곳으로 몸을 날리는 게 보였다. 사내는 핏빛 안광으로 흉흉한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맹 사질!”
“대사형!”
형산파 무인들 몇몇이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그는 검의 고수.
대사형이라 불릴 만큼 제자들 가운데 군계일학의 무공실력을 갖춘 자였다.
그의 검이 형산파와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 향한다면 피보라가 몰아칠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형산파 내부의 비극으로도 가슴 아픈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걷잡을 수 없는 대참사로 이어질 것 같았다.
“맹 사질! 안 돼! 돌아와-!”
중년인이 회색 장포의 사내를 애타게 외치며 당장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주변의 제자들이 엉겨 붙는 까닭이었다.
제자들 예닐곱 명이 사방팔방에서 달려들었다. 마치 누가 그의 발을 붙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형산에서 함께 지내온 식구이기에 모조리 쳐 죽일 수도 없다는 걸 이용하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그르르르-!”
회색 장포의 사내가 짐승의 울음을 흘리며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이미 이지를 잃어버린, 피를 갈구하는 한 마리의 야수에 불과했다.
중년인이 모르는 게 있었다.
핏빛 안광을 뿌리며 뭇사람에게 달려드는 게 회색 장포의 사내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광기에 휩싸인 제자들은 이미 수 차례나 주변의 보통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에게는 적이나 동료의 구분 자체가 없었다.
숨을 쉬고 있다면 모조리 죽여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사형을 베고 사제를 찔렀다.
피가 튀었다.
그들은 사형제들의 뜨거운 피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그리고 웃었다.
그 모습이 섬뜩했다.
“크흐흐-!”
다들 목에서 짐승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답게 웃지 않았다.
그리고 두리번거렸다.
피에 잔뜩 젖었음에도, 눈을 희번득 빛내며 새로운 희생양을 찾았다.
사람 냄새를 맡으면, 욕심 그득한 미소를 흘리며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이 피에 굶주린 짐승 같았다.
짐승은 당연하게도 손속에 자비가 없었다.
“피하십시오!”
“다들 물러서십시오!”
몇몇이 그들을 막아섰다.
주변 객잔에서 뛰쳐나온 올곧은 눈빛의 무인들이었다.
그 가운데 진우선도 있었다.
‘또 온다!’
진우선이 눈앞의 적을 보았다.
형산파 제자 하나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접근하고 있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그는 이미 여럿 베고 온 모양새였다.
그가 이제 재빠르게 검을 찔러 들어오면서 진우선을 노렸다.
그에 진우선이 검을 그어 내렸다.
차앙!
묵직한 타격음이 났다.
검으로 내리쳤는데, 몽둥이로 내려친 듯한 소리였다.
찔러 들어오던 형산파 제자의 피 묻은 검이 땅에 푹 처박혔다. 잠시간 검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진우선이 그 틈에 얼른 짓쳐 들었다.
그리고 수기를 가득 담아서 검을 휘둘렀다.
형산파 제자는 재빨리 팔을 들었다.
빠각!
뼈가 부서졌다.
하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으억-!”
형산파 제자가 고꾸라지며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를 마구 토해냈다.
이건 내력이 진탕되어 내기와 피가 역류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진우선이 의도한 바였다.
형산파 제자의 내력은 마기에 물들어 있었기에, 수기로 힘껏 내려치니 마기가 매우 요동치다 못해 기운이 죽어버렸다.
그게 죽은피와 섞여 입 밖으로 토해지고 있었다.
수기가 마기와 상극이어서 생긴 효과였다.
“으으-!”
그 결과로 형산파 제자가 고통에 신음하며 배를 부여잡았다. 마기가 죽어 나가는 과정에서 단전에 충격을 받은 까닭이었다.
이제 고통에서 허우적대느라 눈앞의 전장은 생각조차 못 할 것이다. 눈에 깃든 시뻘건 기운도 조금씩 옅어져 가기 시작했다.
‘됐어!’
진우선이 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속전속결!
지금 중요한 것은 속도였다.
초식이 얽힐수록, 싸움이 길어질수록 득보다 실이 많았다.
뭇사람에게 피해가 덜 가도록, 마기에 물든 이들을 빨리 제압하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수기를 담은 일격으로, 검을 둔기처럼 휘두르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
형산파 제자들의 마기는 아직 옅었고 각자의 내공에 깊게 스며든 상태가 아닌 까닭에, 그렇게 하는 게 효과가 컸다.
남들은 한두 명 상대하는데도 조심스럽고 오래 걸리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진우선은 혼자서 벌써 열 명 넘게 제압할 수 있었다.
‘다음은?’
진우선이 주변을 훑었다.
이제 마기에 물든 또 다른 상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섬뜩한 마기를 뿜어내는 야차 같은 사내를 찾았다.
“대사형!”
“맹 사질! 안 돼! 돌아와-!”
혼란스러워진 형산파 무인들의 틈 속에서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맹 사질이고, 대사형인 듯했다.
하지만 그는 낮게 깔린 울음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그르르르-!”
야차 같은 사내에게서 난, 공포를 자아내는 소리였다.
남들보다 더 시뻘건 눈빛으로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소리 내고 있었다.
“아니! 맹두고 대협마저…….”
“어째서 맹 대협이…….”
“대사형…….”
여기저기서 소리가 모여들었다.
다들 그를 알아보고 있었다.
맹두고.
야수같이 변해버린 회색 장포의 사내.
그는 형산파의 자랑이자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이었다.
제자들에게는 듬직한 대사형이고, 이곳 사람들에게는 대협이었다.
하지만 진우선에게는 마기에 휩싸인 형산파 무인 중 가장 강한 적이었다.
‘이자의 마기가 여기서 가장 강하다!’
그러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이자가 원흉이었어!’
이 사태가 그에게서 시작한 게 분명했다.
진우선이 마기를 느꼈을 땐, 좁쌀만 한 크기의 마기 덩어리 몇 개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컸던 게 맹두고에게서 전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혼란했던 와중에 맹두고의 마기는 매순간 몸집을 불렸으며, 힘이 세지고 수가 많아졌다.
이제는 십 수 명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마기에 홀린 형산파 무인이 수십 명에 달했다. 급박한 상황이라 정확히 헤아릴 수 없음에도 족히 수십 명이었다.
마치 씨앗을 날리듯, 주변의 사형과 사제들에게 마기를 퍼뜨린 것이다.
‘얼른 막아야 해!’
더 퍼지기 전에 끝내야 한다.
진우선이 그렇게 결심하고, 그에게로 나아갔다.
맹두고도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주 달려왔다.
마기는 달려드는 뜨거운 핏덩이를 피할 이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거리가 급격히 좁혀졌다.
진우선과 맹두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과 도를 휘둘렀다.
타앙-!
큰 울림이 퍼졌다.
마치 쇳덩이들끼리 부딪쳤을 때나 날 법한 소리였다.
진우선은 충돌의 반동으로 튕겨오른 검을 따라 몸을 회전시켰다.
‘안 되겠군!’
바로 결정이 났다.
지금의 일 합에서 알 수 있었다.
과연 일파의 대사형은 다른 제자들과 실력이 아예 다르다는 걸.
그에게는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검을 둔기처럼 휘두르며 마기를 진탕시키는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크큭! 크크크!”
맹두고가 목 긁는 소리로 웃더니 도를 휘둘러왔다.
도가 바람을 훅-훅- 가르며 매섭게 덮쳐 왔다. 스쳐도 잘려나갈 느낌이었다.
그러나 진우선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검을 마주 들어 올렸다.
검에서 빛이 일었고, 그 궤적을 따라 빛무리가 올라왔다.
빛이 있고 나서 그림자가 뒤따랐다.
광영무였다.
솨악-!
검이 허공을 날카롭게 베며, 맹두고에게로 쏘아졌다.
진우선의 검은 빈틈을 주지 않았다.
연신 맹두고와 도와 부딪치며 묵직한 울림을 만들어냈고, 그게 계속되면서 주변에 충격파가 가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맹두고는 막아내기 급급해졌다.
그러면서 진우선과 맹두고 사이에 차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빛이 중첩될수록 맹두고의 낯빛이 썩어들고 있었다.
얼굴과 목 등 겉으로 드러난 피부에는 핏줄이 잔뜩 불룩불룩 솟아났고, 눈동자에 깃든 시뻘건 안광마저 마구 요동치고 출렁거렸다.
안 그래도 상승의 무공인 광영무에 수기가 더해졌으니, 마기에 물든 맹두고로서는 점점 궁지에 몰리는 것이다.
그래서 마기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그만하면 좋으련만, 끝을 알지 못한 채 달려들었다. 진우선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반월을 그리며 베어 들어간 검이 도를 튕겨냈다.
그 순간!
“억! 꺼어억! 크아아악-!”
맹두고가 마구 뒷걸음질 치더니, 가슴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고 고통에 차서 울부짖었다.
***
“우선아!”
만총이 진우선을 불렀다.
“총아. 아는 사람이야?”
“어. 저기 검을 쓰는…….”
만총이 진우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만총이 가리킨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과 비슷한 또래였다.
하지만 그의 검은 비슷해 보이지 않았다.
빠르고, 정확했으며, 압도적이었다.
순간 놀라서 감탄할 정도였다.
그런 진우선을 마기에 휩싸인 형산파 제자들이 감당하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때, 한 사내가 부각되었다.
“어? 맹두고?”
“정말? 맹 대협이?”
맹두고는 형산파의 대사형이며, 형산에서만 이십 년 넘게 무공을 익힌 뛰어난 무인이었다.
그러나 진우선은 맹두고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마저도 몰아붙이며 모두가 감탄할 만한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신공절학이 따로 없군.”
“현묘하다, 현묘해.”
“총아. 도대체 쟤 누구야?”
“……나랑 같이 온 친구.”
만총은 진우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의 존재만 알렸다.
“친구? 그럼 청운무관에서?”
“어.”
“야! 설마…… 청운무관에서 저런 것도 가르쳐?”
“아니. 그럴 리 없지.”
“하긴. 저걸 가르칠 만한 사부가 있다면 이미 이름이 나 있었겠지.”
그들이 떠드는 사이.
만총이 주먹을 불끈 쥐더니, 벽에 세워둔 자신의 창을 재빨리 집어 들었다.
“내려가야겠어!”
그리고.
휙!
뛰어내렸다.
***
“아가씨! 똑같습니다.”
“으음! 파파도 그렇게 생각했군요.”
노파의 말에 젊은 여인 벽소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표정은 꽤 심각해 보였다.
“저러면 진짜…… 손쓸 수가 없는데.”
노파는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면서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형산파의 비극.
이 모습이 빙화곡에서 벌어진 상황과 너무도 흡사했다.
마기가 물결치듯 번져나가고, 그로 인해 제자들끼리 상잔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게 똑같았다.
슬픈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벽소군과 노파는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보였다.
그의 검이 형산파 제자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며, 번져나가는 마기를 잘라먹고 있었다.
“그놈이군요, 아가씨!”
“그렇네요. 진 공자군요.”
둘은 진우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형산파 무인들의 상황에 빙화곡의 모습이 투영되는 가운데, 그때 보고 싶었던 한 조각이 지금 보였으니까.
“파파. 저게 그가 말했던 무공인가 봐요. 정말 대단하군요.”
“허허, 참!”
노파가 한숨을 터뜨렸다.
벽소군의 말에 동의한다고 표현은 못 하겠으나, 마음으로는 탄복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