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23화 (23/225)

023.

#장사 (3)

‘얼음 같다!’

여인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차갑고 시렸다.

외모는 분명 아름다운데, 왠지 모르게 냉담하고 쌀쌀맞을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에서 전해지는 분위기 자체가 그 기운의 성격을 그대로 쏙 빼닮아 있었다.

‘일단 마교도는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진우선은 자신이 받은 느낌부터 확실히 했다. 이건 마기가 아니었다.

[맞다. 잘 보았구나.]

검노야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이 층 입구에서 가장 먼 쪽에 앉아 있는 여인은 마교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기운은 마기와 아예 다른 성질이었다.

[우선이 네가 얼음이라고 느꼈던 것처럼, 이것은 마공이 아니라 빙공이구나.]

‘빙공이었군요!’

빙공(氷功)은 음한(陰寒)의 기운을 다루는 무공이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느껴졌던 이유가 그래서였다.

‘그러고 보니…….’

수기로 그 주변을 감싸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진우선이 두 눈에 정신을 집중했다.

시야에 희뿌연 무언가가 잡혔다.

여인의 주위로 얇은 얼음 막이 있는 듯했다.

‘이게 뭐지?’

진우선이 의식을 집중했다.

수기가 흘러가더니 얼음 막에 닿았다. 그러자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전해졌다.

빙공이리라.

여인은 빙공의 기운으로 아주 얇은 얼음장을 만들어서 얼굴과 상체를 감싼 것이었다.

수기가 아니었다면, 얼음 막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터였다. 수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아예 발견조차 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신기해!’

얼음장에서 빛이 꺾였다.

한순간 그게 보였다.

동시에 얼음장을 통해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어딘가 흐릿하단 걸 알아챘다.

이목구비도 또렷하지 않았다.

얼굴이 굳어 있고 표정도 거의 없어 보였다. 어쩌면 그건 한 꺼풀 막이 씌워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얼음 막이 시선을 흩트리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게 확신한 순간, 수기의 움직임이 변했다.

순식간에 얼음 막을 감싸더니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러자 얇은 얼음장이 녹기 시작했다.

스슥-! 쩌쩌쩍-!

막 주위로 흘러가는 수기에 얼음이 스르르 녹아들었다.

흐르는 물이 얼음을 녹이는 이치였다.

물론 너무 차가우면 얼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얼음 막은 그러지 않았다. 두께가 얇았고, 그 안에 담긴 빙공의 기운도 소량이었다.

그렇게 얼음장이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나 사라졌다.

‘헛! 없어졌다!’

그 순간!

“……!”

찌릿!

온몸이 움찔했다.

자신에게로 여인의 싸늘한 시선이 쏘아지고 있었으니까.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맑고 선한 눈동자에서 칼날 같은 냉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헉!”

진우선이 입을 쩍 벌린 채 놀람을 토해냈다.

살갗을 에는 듯한 한기가 몰아쳤으나, 그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다.

꽃처럼 고운 얼굴에 눈이 부셔서!

여인이 너무나도 눈부셔서 놀라고 있었다.

***

“아가씨, 어쩌죠? 오늘도 만나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맹이 너무 바쁘군요.”

“어휴, 진짜! 만상각주 그놈을 확 붙잡아 데려다 놓을 수도 없고!”

“파파, 화내지 말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난 괜찮으니까.”

“하지만, 아가씨…….”

파파(婆婆)라 불린 흑발의 노파가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장사에 온 것은 오늘로 사흘째.

정무맹의 수뇌부를 만나기 위해서 왔는데, 아직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철혈보의 비보.

무당파의 괴멸.

이 두 사건이 연이어 맹을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맹주와 만상각주 두 분 다 바쁠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은.”

“흥! 그럴 거면 약속을 하지 말던가요. 내 이럴 줄 알았지! 공야청 그놈은 당최 신뢰가 가질 않는데, 이번에도 속았어요!”

흑발의 노파가 콧김을 뿜으며 몹시 못마땅해 했다. 눈에서 불길이라도 뿜어질 기세였다.

그에 반해 여인은 여전히 침착했다.

“우리 하루 이틀만 더 기다려봐요.”

“그놈들이 뭐가 이뻐서요!”

“파파.”

여인이 차분한 음성으로 흑발의 노파를 부르며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노파는 알았다.

여인이 이런 눈빛을 보일 때면, 그대로 따라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대로 따라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흑발의 노파는 이게 다 아가씨의 투명하게 맑은 눈동자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노기를 가라앉혔다.

“어휴. 알았어요. 제가 참아야죠. 우리 일도 정말 중대한데…….”

노파는 댓 발이나 나온 입으로 투덜거렸다.

여인이 그런 노파의 모습을 보며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잘하고 있다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자 청아한 빛이 번지는 듯했다.

표정이 어딘가 어색하고 다소 경직되어 보였음에도, 맑은 느낌이 전해졌다. 여인이 웃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네. 네. 제가 졌어요. 그렇게 웃으시다니…….”

마주 보고 있던 노파가 허탈하게 웃었다.

예전부터 저 미소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여인이 살포시 웃기만 해도 굳은 마음이 풀어져버리는 까닭이었다.

“왜요? 나 아주 살짝 웃었는데? 그리고 잘 안 보였을 테고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빙공의 내력이 지금도 운용되고 있었다. 그 내력으로 빙기를 얇게 퍼뜨려서 주변에 무형의 막을 만들었다. 사람들의 시야를 교란하기 위해서였다.

“맞아요. 별로 티는 안 났어요.”

얼음 막은 얇았지만, 효과가 컸다. 번지는 빛을 차단, 왜곡, 굴절시켜 인상을 자연히 달라 보이게 했다.

인상이 미묘하게 흐릿하고, 표정은 어딘가 경직되어 있으며, 이목구비가 조금씩 비틀어져 보였다.

“그래도 웬만큼 보여요, 아가씨는.”

얼음 막이 있어도 새하얗고 단아한 미모로 보였다.

애초에 여인의 외모는 같은 여자인 노파조차도 반할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운 까닭이었다.

그런 외모는 살짝 흐려진다고 해서 다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역시 아가씨는 너무 예뻐요. 면사로 가렸어야 했는데.”

“그럼 너무 답답해요. 뭐 할 때마다 불편하고.”

차 마실 때나 음식 먹을 때나, 이런저런 상황들에서 면사를 쓰고 있다면 거치적거렸다.

“파파. 난 이게 좋아요. 여기는 곡과 달리 사람도 많고요. 봐요. 나에게 집중되는 시선이 없잖아요.”

여인이 싱그럽게 웃었다.

주변에 맑은 빛이 퍼졌다.

소리 없이 빙그레 웃을 뿐인데 그랬다.

“네. 그러셔요. 사실 뭐, 아가씨가 편하니 이런 것도 괜찮죠.”

노파가 적당히 동의를 표했다.

여인이 익힌 빙공이라면, 그것을 뚫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빙화곡(氷花谷)에서 외롭게 자란 그녀로서는 사람이 많은 곳을 다니는 게 소원이었다.

어려서부터 눈에 띄는 외모로 귀찮은 일을 많이 겪어 늘 조심스럽게 지내온 까닭이었다.

자라오면서 항상 답답해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 것들을 고려해보면, 여인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았다.

그때였다.

노파의 눈에 경계의 빛이 어렸다.

“아가씨. 웬 떨거지 하나가 우리를 보고 있네요.”

노파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악록객잔 이 층의 입구 쪽에서,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와 여인은 이 층 맨 안쪽 구석에 앉아 있어서, 노파는 소년이 정면으로 보였다.

여인은 벽을 바라보며 앉은 위치상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 볼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아요. 의식하지 않다 보면, 곧 지나가겠죠.”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이 사람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무수한 사람들이 그랬었다. 얼음 막으로 얼굴을 가리면 늘상 그랬다.

“그러겠죠.”

노파도 시선을 돌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저 슬쩍슬쩍 소년의 존재와 움직임을 파악하기만 했다.

그런데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계속 이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파파. 맹에서 온 사람은 아니죠?”

“네. 맹은 아니죠. 맹에서 왔으면 나를 몰라보겠어요?”

“그럼 의식하지 말아요.”

여인이 그렇게 말하는 찰나!

“……!”

갑자기 내력이 흔들리고, 얼음 막이 흐트러졌다.

여인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노파가 즉시 물었다.

“아가씨?”

“소멸했어요!”

노파도 즉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범인은 소년이었다.

이 층 입구에 서 있던 소년.

노파의 눈에서 절로 사나운 눈빛이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왠지 아까부터 거슬렸던 참이었는데, 진작 쫓아낼 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그때.

입구에 서 있던 소년, 진우선은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헉!”

절로 헉 소리가 나왔다.

여인의 매서운 눈초리가 따가웠으나, 지금의 감정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름답다!’

눈이 부셨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까.

청초했다.

고결하게 아름다웠다. 황홀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여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이런 미인은 난생처음이었다.

얇은 얼음 막으로 얼굴을 가렸던 게 단박에 이해되고 있었다.

“와-.”

주변 사람들 몇몇도 탄성을 흘렸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부지불식간에 눈이 저절로 향한 것이었다.

“네놈!”

노파의 신형이 자리에서 솟구치더니, 진우선에게로 단숨에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여인에게도 다시 얼음 막이 스윽 생성되었다.

여인의 인상이 흐릿해졌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 봤나?”

조금 전과 다르다.

감흥이 확 식었다. 동시에 자신들의 눈을 믿지 않기 시작했다. 흐릿한 모습이 계속 보이니, 이게 진짜라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각자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들처럼 반응할 틈이 없었다. 당장 눈앞이 어지러운 까닭이었다.

노파는 단 몇 걸음 만에 객잔의 가장 안쪽에서 입구까지 매섭게 짓쳐들어왔다.

노파가 살벌한 기세를 드러내며 외쳤다.

“어디서 왔느냐? 뭐 하는 놈이지?”

그와 동시에 한 손에 들린 지팡이를 휘둘렀다.

공기가 휙- 반으로 갈렸다.

창으로 일격을 펼친 효과와 비슷했다.

강력한 한 수였다.

“앗! 저, 저요?”

“그래, 너!”

노파가 지팡이를 휙- 휙- 휘두르며 위협을 가했다.

몇 차례 날카롭게 찌르고 휘둘렀으나, 진우선은 모조리 피해냈다.

“저는 무한에서 왔습니다. 정무맹 호심당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잠시 틈을 만들며 대답을 쏟아냈다.

그 순간.

“어?”

노파가 지팡이를 휘두르다 말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진우선을 보았다.

“무한이라고?”

노파가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어디서 왔냐고 물은 건 소속이 어디인지 듣고 싶어서였다.

정무맹이든, 천마교든, 뭐 그런 식의 소속.

아무런 대꾸가 없을 상황도 고려했었다. 밝히기 어려우면 그러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그게 아니었다.

무한이라고 했다. 대충 보아하니, 여기로 오기 전에 살던 곳을 말한 듯했다.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이건 순전히 착각한 모양이지 않은가.

그런데 뜻밖의 말도 있었다.

“호심당에 가려고 왔다고?”

노파가 공격을 멈추며 물었다.

그렇다고 경계를 누그러뜨린 건 아니었다.

“네. 그렇습니다.”

진우선이 재빨리 대답했다.

다짜고짜 쳐들어오던 공격이 멈춘 이때, 얼른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근데 방금 그건……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신기한 게 느껴져서…….”

진우선이 조금 말을 더듬었다.

마음은 급한데 수기를 언급하지 않고 말하려니 그렇게 되었다.

그때, 노파의 뒤에 있던 여인이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신기한 게 느껴졌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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