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장사 (2)
만총은 의문이 들었다.
어젯밤에 진우선이 선실을 나가서 철혈보 천무광 대협을 구한 건 참 대단한 일이었다.
자신은 무언가 듣지도 못하고 느낀 것도 없는데, 진우선은 어찌 알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런데 진우선은 눈앞에 보이는 건물에 흉수가 숨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틀 연속이었다.
진우선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무언가를 알아차린 게.
“마기를…… 느꼈어.”
“마기?”
그의 답변에 만총이 깜짝 놀랐다.
마기를 느끼다니.
사실 마기를 경험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천마교의 흉흉한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으며, 출몰한 마교도는 마공을 쓸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진우선의 경우는 그런 일반적인 상황과 달랐다.
배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랬다.
그의 말대로라면 마공을 펼치는 마교도를 만나지 않고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니, 놀랍기가 그지없었다.
“너 정말로…… 마기를 느껴?”
“그래.”
만총이 확답을 받으려는 듯 다시 묻자 진우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서였구나!”
만총이 감탄했다.
그와 동시에 진우선이 보여준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다 이해가 되었다.
“근데 어떻게 마기를 느낄 수 있는 거지?”
“내가 수련하는 무공에 항마의 능력이 있는 거 같아.”
“항마!”
만총은 깜짝 놀랐다.
마를 항복하게 하는 능력, 항마(降魔).
무공 중에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들이 더러 있었다.
그중 항마의 힘을 가진 무공은 애초부터 마공을 제압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만총은 진우선이 익힌 것도 그런 계열의 무공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숨어 있었다고? 그럼 지금은 없다는 말이잖아.”
만총은 진우선의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서 이층 전각 안으로 바로 뛰어들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맞아. 지금은 마기의 흔적만 남아 있어.”
“아!”
진우선이 재차 확인해주고서 이층 전각을 바라보았다.
만총도 동시에 전각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각은 정말이지 평범하기 그지 없었다.
장사의 길거리에 수십 개는 있을 법한, 주변의 건물들과 그다지 다를 게 없는 전각이었다.
“마교도가…… 정무맹 코앞에 숨어 있었구나!”
만총이 탄식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교도가 떠나가버린 이층 전각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
“천 대협! 배에서 일어난 일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각주가 직접 나와계셨구려. 안 그래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소. 사제도 숨을 거두었으니…… 보주님께도 어떻게 연락드려야 할지 모르겠고.”
천무광이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정무맹의 만상각주(萬象閣主) 공야청을 만나고 있었다.
만상각은 강호의 모든 소식이 모이는 곳인지라, 공야청은 비보를 미리 전해 듣고 나루터에 나와 있었다.
“천 대협도 일격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좀 괜찮으십니까?”
“일단 움직일 만은 하오. 그러나 당분간은 회복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소.”
“아! 그 점은 맹에서도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대협께서 더 큰 화를 입지 않으셨기에 다행입니다. 맹주님께서도 천 대협을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공야청은 이번 일에 큰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정무맹주도 마찬가지였다.
맹에서 철혈보에게 지원을 요청했기에, 그들이 장사로 왔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천 대협. 이 상황에서 여쭤보는 게 결례인 줄은 알지만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적이 복면을 쓰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추측 가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적이 아무리 암수를 썼다 치더라도, 멸절검 천 대협께서 한 수를 허락하셨다는 게 쉬이 믿기지 않습니다.”
“모르겠소. 다만 그 기운이 은밀하면서도 흉포하니, 천마교의 소행이 아닐까 싶소. 잠시나마 맞상대했던 느낌도 그렇고.”
“으음!”
공야청이 근심에 잠겨 신음했다.
또 천마교란 말인가.
그 이름을 듣자마자 골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정무맹은 최근 천마교와 부딪치는 일이 많았는데, 공야청은 사실 이번 일도 그들의 소행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한 것과 실제로 듣는 건 항상 달랐다.
“그는 실로 손속이 날카롭고 경신법에 능했소. 게다가 서로 일격을 허용한 순간, 그림자도 남기지 않으며 곧바로 신속하게 배를 벗어났으니…… 아무래도 천마교의 흑암무영종에서 일으킨 만행이 아닐까 싶소.”
“후우-. 실은 저도 흑암무영종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만상각주 공야청이 천무광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암무영종(黑暗無影宗).
천마교에서 은밀하고 손속이 매섭기로 손꼽히는 곳이기에, 공야청이 철혈보의 비보를 접한 뒤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무광의 말을 듣고 나니, 흑암무영종으로 더더욱 심증이 굳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추측은 이 정도면 되었다.
“천 대협, 일단 바로 맹으로 가시지요. 안내하겠습니다.”
공야청이 천무광을 마차로 이끌며 말했다.
몸이 완벽하지 않을 천무광인 그곳까지 편히 갈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정무맹은 장사의 나루터에서 마차를 타고도 이 각 정도는 더 가야 하는 까닭이었다.
“알겠소. 고맙소.”
“이를 말씀을요.”
천무광이 마차에 올라타고, 공야청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했다.
***
장사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장사는 광대한 곡창지대가 있으며, 물길을 따라 상업이 발달하기도 좋았다.
그리고 정무맹도 있었다.
그렇게 모여드는 사람들은 객잔에서 머물곤 하니, 장사에는 큰 객잔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첫손에 꼽는 게 악록객잔이었다.
장사 가까이에 악록산이 있는데, 그 이름을 딴 악록객잔은 근방에서 유명했다.
규모부터가 상당히 크며, 숙박하기에 시설이 매우 좋고, 요리에서도 딱히 손색이 없는 까닭이었다. 손님들이 많이 찾을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었다.
악록객잔에는 별채도 딸려 있는데, 별채는 일반적인 객실보다 훨씬 더 비쌌다. 대신 훨씬 더 조용하고, 훨씬 더 편했다.
그 별채에 엊그제부터 머무는 손님이 있었다. 듣기로 한 달 전부터 예약한 부잣집 자제라고 했다.
바로 만금전장에서 온 만총이었다.
그는 널따란 별채를 친구 진우선과 단둘이서 쓰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지내면 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네.”
“무당파 소식 들었구나.”
“어. 이미 장사 시내가 그 소식으로 침울해졌더라고.”
아무리 조용히 지내고 있으려 해도 들리는 소리를 안 들을 수 없었다.
정무맹의 요청을 받고 장사로 향하던 무당파 도사 일행이 전멸했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철혈보는 그 힘이 반으로 축소됐고, 무당파에서 오던 전력은 괴멸되었어.”
“후우. 그렇지. 그것도 천마교의 소행이고.”
진우선도 정무맹의 발표를 들었다.
철혈보의 사태 이후, 무당파는 배를 타지 않고 육로를 통해 장사로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변을 당했다.
정무맹이 그곳에 갔을 때, 땅 위에는 천마교의 행적만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무당파 도사들은 뜻을 채 피우지 못한 채 시신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정무맹은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며 격전의 흔적을 수습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천마교의 짓이라고 선포한 것이었다.
“지독할 정도로군.”
진우선이 애통한 표정을 지으며 넌더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만총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게다가 천마교는 정무맹의 코앞에서 활개 치는 것도 모자라, 장사 안에서도 머물고 있었으니.”
장사는 정무맹의 거점이나 다름없는 곳인데도, 천마교가 다녀갔지 않은가.
지난 몇 년 간, 정무맹과 천마교는 백중지세였는데, 최근 들려오는 소식 중에 정무맹의 승전보는 딱히 없는 듯했다.
“정무맹이 난리겠어.”
“그러게.”
만총과 진우선이 정무맹을 걱정 했다.
그때였다.
악록객잔의 점소이가 별채로 다가오더니, 대문 밖에서 물었다.
“공자님. 우문혁이라고 이름을 전하신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쪽으로 모실까요?”
점소이가 부르는 공자님은 만총이었다.
“우문혁?”
만총이 그 이름을 읊조리더니 점원에게 물었다.
“몇 명이었지?”
“총 네 분이 함께 오셨는데, 모두 일행으로 보였습니다.”
만총이 슬쩍 진우선을 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나가서 만나지.”
만총은 진우선을 배려하여, 자신이 객잔에 가서 만나는 걸 택했다.
그리고 곧바로 점소이와 함께 악록객잔 본채로 갔다.
만총이 별채를 나간 뒤, 진우선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기를 느끼고 깨우친 후, 진우선의 광영무는 좀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맑고 선한 느낌도 많이 배어 나왔다. 수기가 광영무에서도 절로 담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잘하고 있구나.]
검노야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진우선의 모습을 보며, 검노야는 이따금 하늘을 보았다.
그러다가 진우선의 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진우선은 검에 몰입하여 또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기운이라는 것은 평소에도 느낄 수 있고 쓸 수 있으나, 역시 광영무를 펼치고 있을 때 선명할 것이니라. 천지간에 호흡은 극히 자연스럽지만, 의식하고 집중할 때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네, 스승님!’
진우선이 검노야의 말을 즉각 체감했다.
별채의 너른 마당에서 광영무를 수련하니, 수기를 더욱 명료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검에 담아내는 것도 수월했다.
[그러나 강제하지 말고, 묶지 말아라. 안에 들어온 것은 흘러가게 두고, 밖에 나간 것은 붙잡으려 애 쓰지 말지니. 수기의 본모습을 인정하면, 네 안에 항상 채워져 있을 것이야. 그저 흔들리지 말고 중심을 잡으면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눈을 빛내며 명심했다.
듣자마자 이것이 수기를 다루는 비결인 것을 알았다.
‘수기를 자유롭게!’
진우선이 수기를 느끼며 물을 생각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고, 흐르면 깨끗하되 고이면 썩기 쉬웠다.
수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검노야의 선문답 같은 가르침이 쉽게 이해되었다.
그저 느끼면 되었다.
붙잡지 말고, 흘러가야 한다.
그게 핵심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서 있으려 했다.
아니, 아예 수기를 물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이 나를 통과한다.’
그렇게 마음먹기 시작하니 조금씩 물길이 이어졌다.
군데군데 느껴지던 수기가 하나둘씩 연결되더니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아!”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기는 마구마구 더 퍼져나갔는데, 그 와중에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놀람이 터져 나왔다.
감각에 걸린 그것은 맑고 깨끗하지만, 눈부시게 시렸다.
마기는 아니었으나, 그때처럼 기존과 다른 이질감이 있었다.
‘스승님, 뭘까요?’
[궁금하면 가보면 되지 않겠느냐?]
검노야의 표정을 보니, 궁금해하는 것도 같고 재미있어 하는 것도 같았다.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진우선은 검노야가 그리 말한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우선이 즉시 검을 갈무리하며 별채를 나섰다.
그리고 여전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 악록객잔의 이 층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한 사람이 있었다.
시린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운은 수기 아래에서 그 존재감이 딱히 두드러지지 않았는데, 그 사람만은 달랐다. 그 사람은 표정마저 냉랭하고 차가운 새하얀 피부의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