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장사 (1)
지난밤의 일이었다.
검노야는 배의 갑판을 서성이고 있었다.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까닭이었다.
[기억이 나질 않아…….]
머릿속이 마치 짙은 안개로 꽉 들어찬 것 같았다.
장강.
동정호.
그 두 곳을 바라보면서,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상반된 감정에 휩싸여있다는 게 역설적이고 말이 되지 않았으나, 실제로 그러했다.
그리고 불쾌한 기분도 느껴졌다.
[……!]
적이다.
적의 기운이다.
지금 느껴지는 악랄하고 지저분한 기운에 적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마음이 먼저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익숙했다.
이 거슬리는 기운도 처음인데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기!]
마공을 익힌 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마기(魔氣)였다.
그때였다.
퍼석!
난데없이 선체의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마치 이전에 부숴두기라도 한 모양인지, 그 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웬만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힘들 정도였다.
동시에 한 인형이 튀어나와 물속으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적이라고 느껴지는 자였다.
[저놈에게서!]
한밤중의 장강.
어둡고 조용하여 모든 것을 감추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검노야는 그의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기운이 짙군!]
검노야가 허공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그의 흔적을 뒤쫓았다.
그렇게 배와 멀어지던 중, 저 멀리서 다가오는 쾌속선 한 척이 보였다.
쾌속선 위에는 십 수 명의 무인들이 있었다.
[다 한통속이구나!]
검노야는 그들을 느낀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의 기운이 배에서 빠져나온 자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역겹고 불편했다.
마기의 냄새이며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왠지 모르게 적개심이 마구 피어올랐다.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쾌속선 위의 무인들은 검노야를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저 물속에서 흑의인을 건져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헉 ……헉.”
물에 흠뻑 젖은 흑의인이 배에 올랐다.
그는 배에 오르자마자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섬호 님!”
무인들이 흑의인을 섬호(閔虎)라 불렀다. 그는 쾌속선 위의 무인들이 모셔야 할 대상이었다.
“끄으-!”
섬호가 고통에 신음했다.
그럴 만했다. 배를 감싸 쥔 손 아래로 핏물이 흑의를 적시며 스며들고 있었으니까.
“섬호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흑노…….”
섬호에게 그와 똑같이 흑의를 입은 한 노인이 다가왔다.
“장사로 가자!”
흑노는 재빨리 명령을 내린 뒤 섬호의 팔을 들었다.
복부에 자상이 있었다. 길게 베인 상처도 있었다.
핏물은 그곳들에서 배어 나오는 중이었다.
타탁!
흑노가 곧바로 혈도를 눌렀다.
피가 더 흘러나오지 않게 할 목적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품에서 목함을 꺼내어, 환단 하나를 섬호에게 먹였다.
“기혈을 안정시키십시오. 얼른 내상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오시기 전에 급히 혈도를 누르셨지만, 물속에서 피를 계속 흘리셨습니다.”
흑노는 빠른 손놀림으로 섬호가 입은 옷의 복부를 찢어냈다.
환단을 먹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외상에도 약을 발라야 하는 까닭이었다.
“천무광은 과연 매섭군요.”
흑노가 섬호의 상처를 보며 말했다.
배에 탄 철혈보의 무인 중에서 섬호와 겨룰 만한 고수는 천무광밖에 없을 터였다.
“크윽! 흑노가 보는 대로야. 죽다 살아났지.”
통증이 일부 가라앉자 섬호가 밉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철혈보의 다른 자들은 전혀 상대되지 않았으나, 천무광만은 인정해줄 만했다.
바로 그때.
[너희들은 뭐지?]
검노야가 흑노와 섬호에게 물으며 쾌속선 위에 내려섰다. 표정이 심히 날카로웠다.
“…….”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흑노와 섬호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지 치료와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뿐이었다.
“크윽-!”
“조금만 참으십시오.”
섬호가 계속 앓는 소리를 냈다. 상처를 살피는 흑노의 손길마저 아픈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를 꽉 깨물며 버텼다. 이 정도 상처는 종종 겪었던 적이 있었다. 못 참아낼 게 아니었다.
“철혈보의 멸절검은 손속에 자비가 없다고 하던데, 진짜 그렇군요. 한 치만 더 깊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크크. 그런가? 하지만 내가 이겼군. 천무광에게는 그 한 치가 더 들어갔어.”
섬호가 고통에 신음하는 와중에도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로 주고받은 일격에서 천무광이 더 크게 피해를 봤을 테니, 섬호는 실제로 자신이 이겼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천무광은 죽었겠군요.”
“그렇지. 그게 실력 차이고.”
“그렇지요.”
흑노와 섬호가 그렇게 대화했다.
검노야는 인식하지 못한 채.
[내 말이 안 들리는가?]
검노야가 물었다.
“…….”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노야가 팔을 뻗었다.
흑노의 어깨를 붙잡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만지지도 못했다.
검노야의 팔은 흑노의 몸을 통과해버렸다. 형체가 없기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왜?]
검노야가 자신의 흐릿한 손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진우선에게는 형체를 드러낼 수도 있고 감출 수도 있었는데, 흑노에게는 그게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자신은 그들과 대화할 수 없고, 진우선을 제외하고는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
그게 갑자기 깨달아졌다. 당연한 거라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허허…….]
검노야가 웃음을 흘렸다.
궁금한 게 잔뜩인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웃을 수밖에.
허무한 표정이 검노야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쾌속선은 빨라서 동이 터오기 전에 장사에 들어서고 있었다.
장사에 도착하자마자 마인들은 재빠르게 어느 한 건물로 이동했다.
덩치 큰 마인 하나는 얼굴이 창백한 섬호를 업고 있었다.
검노야가 천천히 그들을 뒤따라갔다.
마음이 복잡하고 미묘했다.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여태껏 의문이 생기면 곧바로 그것에 대해 알 수 있었는데, 처음으로 그러지 못한 까닭이었다.
진우선에게 도움이 될 게 있다면, 그 즉시 생각이 났다. 무엇이든 즉시 알았고,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장강과 동정호에서 친숙함을 느꼈으나,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기를 느끼자 본능적으로 강한 분노와 적개심이 타올랐는데,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허어-.]
검노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무척이나 차갑게만 보였다.
[아직은…… 허락되지 않은 것인가?]
검노야가 하늘에 탄식했다.
허락된 것은 진우선과의 사제관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면서, 낮이 흘러갔다.
문득, 친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검노야가 고개를 내렸다.
진우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
‘스승님!’
[우선아. 왔구나.]
진우선이 이층짜리 전각 앞에 서 있는 검노야를 만났다.
둘은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네가 여기로 온 것은 마기가 느껴진 까닭이겠지?]
‘마기였습니까? 제가 느꼈던 게?’
[맞다.]
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우선은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수기에 익숙해지던 와중에 전해졌던 불쾌하고 역겨운 기운.
그것이 마기인 모양이었다.
마기는 마공을 익히며 드러나는 기운이다. 마공은 천마교의 교도들이 익힌다고 알려진 무공을 통 틀어 칭하는 말이다.
천마교와 마공이란 건, 진우선도 아는 강호의 상식이었다.
‘배에서 암습으로 인해 사상자가 많이 생겼는데, 마교도 때문이었겠군요!’
[그렇지. 섬호라는 자……가 배에서 살수를 펼치고는 이곳으로 숨어들었어.]
‘섬호!’
진우선이 그 이름에 주목했다.
섬호가 이번 사건의 흉수라고 검노야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그자가 있습니까?’
진우선이 눈을 빛냈다.
장사에 도착하고서 마기가 느껴졌고, 검노야가 바라보고 있던 이 층 전각에서도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거기에 섬호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검노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없구나. 한낮에 떠났으니까.]
‘그랬군요.’
진우선이 검노야와 비슷하게 허탈한 표정으로 이층 전각을 바라보았다.
그런 진우선에게 검노야가 물었다.
[우선아. 처음 느낀 마기가 어떠했느냐?]
‘참으로 불편했습니다.’
진우선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지금도 마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기운이란 건 본래 무형무취라서, 형태가 없고 냄새도 없다. 그런데 마기는 느끼는 것만으로 비위가 상하고 어디선가 악취도 나는 듯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네가 수기를 깨우치기 시작했으니 마기도 느낀 것이야. 지극히 맑고 선한 것을 알게 되고 품게 되면서, 그와 반대된 마기도 구별하는 게지. 그게 상극이니.]
상선약수, 지극히 착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는 뜻이었다.
광영무를 익히며 깨닫게 되는 수기가 바로 상선약수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아!”
진우선이 감탄을 흘렸다.
광영무가 대단한 무공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작용할 줄을 예상치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또 알게 되었다.
배에서 천무광에게 바로 갈 수 있었던 건, 그가 마공에 당했기에 마기의 흔적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탄복하던 중, 새로운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스승님은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찌하여 장사에 와 계셨습니까?’
[음…….]
검노야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우선아. 나는 배를 타고 나서부터 머릿속이 뿌옇게 가려져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지만 잡히지는 않았지. 그래서 의문이 많았는데, 어젯밤에 마기를 느끼니 갑자기 적대감이 올라왔다. 그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지. 왜 그런지 궁금하여 뒤쫓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구나.]
‘기억이 하나도 안 나시는 겁니까?’
[하아-. 그렇구나. 무언가 익숙한 게 많이 느껴졌는데,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
진우선은 이렇게 한숨을 쉬는 검노야를 처음 보았다.
검노야는 언제나 뭐든지 다 알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자신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답답하시겠군요.’
진우선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괜찮다.]
검노야가 몸을 진우선에게로 틀었다. 그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우선아. 고맙구나. 걱정해줘서.]
검노야는 진우선의 진심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뭐야? 여기에 뭐 있어?”
급히 뒤따라온 만총이 물었다.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달려간 진우선이 어떤 이층 전각을 바라보며 서 있었기에.
“여기야. 배에서 암수를 펼친 흉수가 숨어 있었던 곳이.”
“뭐라고!”
만총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뜬 채 이층 전각을 바라보았다.
특별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의문이 생겼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