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9화 (19/225)

019.

#정무맹 가는 길 (1)

“가냐?”

“네. 가볼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 잘 가라.”

무한의 나루터.

황호가 정무맹으로 떠나는 진우선을 배웅하러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커다란 배 앞에서, 진우선이 꾸벅 허리를 숙여 황호에게 인사했다.

그간 고마운 게 많았다.

황호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고서점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럴 수 없었을 테니까.

한 달 전, 평가를 통과하여 정무맹에 가게 되었을 때 가장 기뻐해 준 것도 황호였다.

황호와 함께했던 시간이 마구 떠올랐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눈시울도 붉어졌다.

고개를 들어 황호를 보았다.

황호의 눈가도 촉촉해 보였다.

“어라? 아저씨……. 그거 눈물이에요?”

“눈물은 무슨! 추워서 그래. 추워서. 그러는 너도 빨개 보여!”

황호가 소리를 냅다 지르며 강하게 부정했다.

진우선은 그런 황호의 눈가를 좀 더 바라보았다.

눈물방울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야! 그만 쳐다봐! 넌 그토록 나랑 같이 지내고도 나를 모르냐? 무한의 차가운 남자인 나는 너에게 줄 미련 따윈 없다고.”

“하핫. 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가볍게 웃었다.

황호도 같이 웃더니 품에서 전낭 하나를 꺼냈다.

“대신, 이거 줄 생각이다.”

“아저씨, 이건…….”

건네받은 전낭이 꽤 묵직했다.

여태까지 받았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진우선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황호를 보았다.

오늘은 품삯을 받는 날도 아니지 않은가?

“배에 올라가서 확인해. 노잣돈 하라고 조금 넣었으니까.”

“아!”

진우선이 전낭을 든 채 황호를 보았다. 황호의 따뜻한 배려와 마음이 느껴져 코끝이 찡했다.

“감사합니다.”

진우선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웃으니 보기 좋네. 그렇게 좀 웃고 살아라.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직 스물도 안 된 게 맨날 어른 같은 표정 짓고 있으니까 완전 어색하고 이상했어.”

“아! 제가 그랬나요?”

“응! 아주아주 그랬지!”

황호가 넉살 좋게 대꾸하더니 진우선에게 얼른 배에 올라타라고 손짓했다.

“아무튼, 이제 얼른 올라가봐. 늦을라.”

“네. 그럴게요. 아저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중에도 꼭 들르겠습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난 오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진우선이 뒤돌아서서 배에 올라탔다.

곧 배가 멀어져갔다.

그제야 황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

배는 무한에서 장사로 향했다.

장강을 거슬러 가다가 동정호를 가로질러 장사에 도착하는 경로였다.

관도로 갈 수 있고, 뱃길로도 갈 수 있었는데, 진우선과 만총의 선택은 배였다.

만총은 이미 배에 타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배에 탄 지 얼마 안 됐어.”

두 사람이 쓰는 선실에서 만총은 두터운 겉옷만 벗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는 모습이 썩 잘 어울렸다.

“너도 차 마실 거지?”

“응, 마실게.”

진우선이 탁자 앞에 와서 앉았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만총의 겉옷에서 물기 자국을 발견했다.

꽤 선명했다.

만총이 진우선의 시선을 눈치챘다.

“령매한테 다녀왔거든. 오늘 출발한다고. 그랬더니 너한테도 잘 다녀오라고 전해 달래. 멀리 배웅 나올 상황이 아니라면서.”

물기 자국은 매영령의 것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간다는 인사를 못 했네.”

“괜찮아. 네 인사도 내가 대신 전했어. 령매는 만화장에서 나오기 어렵고…… 그동안 청운무관 분위기는 좀 뒤숭숭했으니. 서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잖아.”

만총이 조리 있게 잘 말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지난 한 달 동안 청운무관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유청인이 다녀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정무맹에서 감찰이 나온 까닭이었다.

그들은 청운무관에서 이것저것 조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감찰을 맞이한 관주와 무사부들은 제자들을 지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바쁘고 정신없었다.

그러다 보니 청운무관은 수련에 전념하기에 좋지 않았다.

그때부터 만총과 매영령은 아예 청운무관에 오지 않았었다.

“고마워. 잘 말해줘서.”

“뭘, 그런 걸 가지고.”

만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겉옷을 치우고 자신의 짐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만총이 이것저것 적으며 직접 만든 책이었다.

“그보다 말이야. 지난 며칠간 생각을 해보면서 너와 이야기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뭔데?”

책을 펼치는 만총을 보며 진우선이 물었다.

“수양제와 당태종 말이야. 비슷한 점이 참 많은데, 한쪽은 폭군이고 한쪽은 성군이란 말이지. 그게 참 재미있으면서도 신기했어. 우선아. 네가 보기에는…….”

둘이 그렇게 대화를 시작했을 때, 배가 무한을 떠나기 시작했다.

***

배에 탄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만총은 자신의 선실에서 책을 읽었고, 진우선은 비어 있는 다른 선실에 들어가 수련하고 있었다.

[참 열심히 하는구나.]

검노야가 속으로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나뿐인 제자, 진우선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까닭이었다.

수련하기 마땅치 않은 배에서도 수련할 생각을 했고, 기어이 비어 있는 곳을 찾아냈다.

그런데 수련을 열심히 하다 말고, 진우선이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혼자 궁리해 보던 진우선은 결국 검노야에게 도움을 청했다.

“스승님, 이상합니다.”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자연히 오게 될 일이었으니.]

검노야는 보자마자 진우선에게 일어난 변화를 눈치챘다.

또한, 이즈음이라고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서 차분한 목소리로 전했다.

[당황하지 말거라. 침착하게 살펴보자꾸나. 지금 네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겠느냐?]

“네. 제 내력에 미약하게나마 이질적인 기운이 섞였습니다.”

[느낌이 어떻더냐?]

검노야의 물음에 진우선이 눈을 감고 느낌에 집중했다.

“매우 차갑고…… 축축한 것도 같고…… 그런 게 한 줄기 스며들었습니다.”

진우선이 자신의 내면을 살피며 여태껏 익혀온 내공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표현했다.

검노야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잘 느꼈구나. 네가 지금 느낀 것은 수기(水氣)로, 천지간에 흐르는 기운이지.]

“아!”

진우선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예전에 검노야에게 서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광영무를 익혀 네 것으로 만들면, 그때 천지간에 흐르는 기운을 느끼고, 그 충만함이 온몸을 적실 것이니……]

“광영무에 나온 그 기운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지. 그것이란다.]

검노야의 말에 진우선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수련에 집중했다.

잠시 후.

검노야는 다시 몰입한 진우선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선실 벽으로 스르르 스며들었다.

그가 나타난 곳은 갑판 위였다.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겨울의 강바람은 몹시 차갑고 사나워 아프기까지 하지만, 환영인 검노야는 그것을 느껴서 얼굴이 일그러진 게 아니었다.

검노야는 배가 나아가는 것을 보며, 강물이 갈라지는 것을 보며, 계속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이건 진우선이 이상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진우선은 광영무도 순조롭게, 예상보다 빠르게 잘 익혀내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이상한 건 검노야 자신이었다.

[장강…… 동정호…… 분명 처음인 거 같은데, 뭔가 익숙해.]

조금 전부터였다. 진우선이 수기를 느꼈을 때부터 검노야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진우선이 자신의 내기가 아닌 천지간의 기운을 느꼈으니, 광영무의 진면목에 본격적으로 나아갔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로 그 순간 검노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느낌일까? 내가 여기에 왔었던 적이 있었던 걸까?]

그러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

광영무는 신비로웠다.

익힐수록 새로웠다.

처음에는 초식을 표현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본모습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었다.

‘원래 쌓아왔던 내공이 모두 광영무의 내력이 된 것만으로도 신기했는데.’

그게 첫 번째 변화였다.

광영무는 몸을 움직여 수련해야 내공이 쌓이는 동공이기에, 수련할 때마다 내기가 그에 맞춰 움직였다.

그러면서 기존에 있던, 삼재심법으로 만들어진 내공도 그 뒤를 따랐다.

광영무의 내력이 가는 길로 흘러들어 함께 어우러졌고, 이내 광영무의 성질을 닮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단전에 쌓인 내공은 온통 광영무의 색깔이 되어 있었다. 삼재심법으로 쌓은 내공이 있었으나, 더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내기의 성질이 변한 것이다.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좋은 일이었다.

검노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지간에 빛과 그림자가 있듯, 광영무는 천지간의 모습을 본따 만들어진 무공이다. 지극히 선한 것은 만물을 너그럽게 포용하며 나아가나니……]

‘이 말씀이었구나.’

충돌하거나 제압한 게 아니라 알아서 따라오게 했고, 변화시켰다.

그게 포용이었다.

더 좋게.

더 뛰어나게.

그렇게 바뀌고 달라져 있었다.

포용했기에 서로 한데 어울리게 되었고, 그 기운이 매우 정순하고 청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말 광영무는 신비로운 무공이었다.

한데 광영무가 가진 특징이 이게 전부가 아닌 모양이었다.

두 번째 변화가 있었다.

비어 있는 선실에서 광영무를 펼치는 와중에 평소와 다르게 몸 안으로 파고드는 한 줄기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검노야는 그걸 수기라고 했다.

‘수기’

물의 기운이었다.

아무래도 장강 위에 있어서 그런 듯했다.

거대한 물결이 유유히 흘러가니, 수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그것을 느낀 순간, 한 줄기가 몸 안에 스며들었다. 점점 익숙해지니 더 많이 느껴졌고.

‘그래. 내공은 자연에 충만한 기를 호흡하여 몸 안에 축적하며 단련한 기운이니까…….’

광영무는 먼저 진우선의 몸 안에 있던 기운을 받아들였고, 이제 몸 밖의 기운과 소통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영무는 천지간에 스스로 뻗어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

배는 악양을 지나며 동정호에 접어들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올라탔다.

상행을 위해 배를 탄 사람도 있고, 유람을 위해 배를 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진우선과 만총처럼 정무맹으로 가기 위해 악양에서 배를 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배에 손님이 거의 꽉 들어찼다. 이제는 빈 선실이 없어서 홀로 수련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이번에 사람들이 많이 탔네. 북적북적해.”

만총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많은 사람이 갑판 위에 올라와 바람을 쐬고 있었다.

진우선과 만총도 마찬가지였다.

풍광 좋기로 소문 난 동정호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그 경치를 안 볼 수 없었다.

“응. 그래서 수련할 곳이 없어.”

진우선의 대답에 만총이 피식 웃었다.

“너도 참 대단해. 배에서까지 수련할 생각을 다 하고.”

“그리 이상해? 그냥 수련하면서 무공을 알아가는 게 재밌어서 그래.”

“재밌어?”

“응. 언젠가부터 그러더라.”

진우선의 본심이었다.

목표를 위해서 익히고 반복해온 무공 수련이 이제는 정말 즐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도 대단하네. 그럼 며칠만 참아. 악양 지났으니까, 곧 장사에 도착하겠지. 맹에 가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동정호 감상하고?”

“그렇지.”

만총의 말처럼 지금은 동정호를 즐길 때였다. 두 사람은 우두커니 동정호를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의 대화가 들려왔다.

검을 찬 무인 둘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천 사형. 아까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황산과 포양호 근처에서 맹과 천마교와 크게 부딪쳤는데, 맹이 대패했다고 합니다.”

“허! 요즘 들어 천마교의 세가 만만치 않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두 군데에서 다 밀렸을 줄이야.”

황산은 안휘성 남쪽에 있고, 포양호는 강서성의 북쪽에 있다.

두 곳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중요한 건 황산과 포양호가 호남성의 장사와도 가깝다는 점이었다.

정무맹의 코앞이었다.

천마교는 정무맹 가까이서 무력을 뽐내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본 보에 제자들을 급히 요청할 때부터 심상치 않다 여겼었는데, 정말 쉽지 않겠어.”

“네. 본 보만이 아니라 무당파와 형산파에도 요청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맹에서도 상당히 골치 아파 하는 모양입니다.”

“허-!”

천 사형이라 불린 사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온 얼굴에 근심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침잠한 분위기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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