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3화 (13/225)

013.

#중요한 것 (2)

따스한 찻잔들을 사이에 두고, 진우선이 자리에 앉아 만총과 대화를 시작했다.

“만 공자. 저도 종종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렇게 불편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 우리 동갑이야.”

진우선이 어색하게 말문을 열자 만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자리는 불편한 자리여서는 안 되었다.

“우선아. 너도 책을 많이 읽었다고 들었어. 그러니 우리 편히 이야기해보자. 네 의견이 듣고 싶다.”

“그래, 그러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만총이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손에 들고 있던 서책 예닐곱 권을 탁자에 올려놨다.

서책들은 무공서가 아니었다.

맨 위에 놓인 역경(易經)을 비롯해 다른 책들도 모두 성현의 말씀을 엮은 경전들이었다.

“혹시 이 책들도 읽었어?”

“어. 봤어.”

“역시! 그럴 거 같았어.”

만총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는 최근에 이 책들을 보면서 의문이 생겼어. 인간은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 어떤 더러운 것도 하는데, 또 고결하고 숭고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잖아. 그럼도 대체 인간의 모습에서 무엇이 진짜일까? 맹자의…….”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

고자(告子)의 성무선악설.

만총은 그것들을 예로 들며 자기 생각을 열성적으로 말했다.

무거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말수가 적을 줄 알았는데,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최근에 여러 서책을 들여다보며 인간의 모습에 대해 깊게 고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승 없이 탐독하고 있기에 여태껏 토론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으으-.”

매영령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항상 밝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오자마자 바로?”

하지만 만총은 그런 매영령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많이 고민했어.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리사욕을 위해 살거든. 그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아.”

만총의 고민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면 고결하고 숭고한 가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어디 있단 말인가?

거기에서 의문이 든 것이다.

“여기에 있는 수많은 책을 읽었지만, 다들 자기 얘기만 주장하더라고. 상대의 말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고 할 뿐이고. 아무도 내가 원하는 바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어.”

만총이 팔을 휙 저으며 주변에 가득한 책장을 가리켰다.

수천 권의 서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청풍재의 이 층은 거대한 서재였다.

“우선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네가 령매에게 항우와 유방을 이야기하고, 한무제와 사마천을 비교했다고 들었어. 그런 너라면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봤을 거 같았어.”

즉, 한마디로 줄여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사람의 본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우선은 만총이 길게 늘어놓은 이야기를 곧바로 이해했다.

동시에 왜 매영령이 만총더러 책 이야기를 재미없게 한다고 했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자유롭고 재밌기를 바라는 그녀에게 지식을 늘어놓는 만총은 따분한 상대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진우선이 만총에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이야기를 재밌게 하려고 한 거라서. 그들은 시대를 대표하기도 하고.”

만총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우선의 말에 집중했다.

“네가 원하는 답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들을 이야기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다들 각자 열심히 살았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노력했구나. 그런 생각.”

그것은 진우선이 가진 삶에 관한 주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선이 너의 관점은 ‘살아낸다’는 기준이라고 볼 수 있겠어. 흥미롭군.”

만총이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지더니, 곧 이것저것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인간군상을 하나하나 정확히 규정하는 게 어렵긴 하지. 하지만 열심히 살았으니, ‘생(生)에 대한 관점’으로 볼 필요가 충분히 있고…….”

그러다가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구 오고 가는 모양이었다.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자 매영령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야기가 끝났나 보죠?”

그녀의 앞에는 산새 한 쌍이 정답게 지저귀는 그림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금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새 종이 하나를 펼쳐놓고 그림을 다 그린 것이다.

매영령은 이런 상황이 꽤나 익숙한 모양이었다.

“글쎄.”

진우선이 만총을 보았다.

고민에 빠져 있는 만총.

그가 더 질문할지 안 할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었다.

“으으.”

매영령이 슬쩍 만총을 보고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야기가 엄청 심각하고 복잡해서 하나도 재미가 없어요. 그쵸? 근데 우선 오라버니는 다 알아들었나 봐요. 대답도 잘해주고.”

“그냥…… 내 생각을 묻기에, 내 생각을 말했지. 뭐.”

진우선은 덤덤했다.

바로 그때, 만총이 눈을 번쩍 떴다.

“그래. 맞아. 역사란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록인데, 늘 똑같은 모습일 수 없지. 항상 초지일관일 수도 없고.”

생각이 좀 정리된 모양인지, 만총의 눈이 부리부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귀티 나는 얼굴에 강한 눈빛이 더해지니 마주하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생(生)은 충분히 고민해볼 만한 관점이야. 고마워. 좋은 답이 되었어.”

만총이 씨익 웃었다.

그러자 실내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임에도 옥같이 고운 용모에 눈빛과 미소가 더해지니,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렇다면…….”

만총이 또 무언가를 물으려는 찰나.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저 없을 때!”

매영령이 긴급히 만총의 말을 막았다.

“그래, 그러자. 오늘은 령매가 왔으니, 너무 아쉽지만 이 정도로만 해야지.”

“맞아요! 당연히 그래야죠.”

매영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총은 새로운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으나 침을 꿀꺽 삼키며 참아냈다. 그의 얼굴에 아쉬워 하는 기색이 매우 역력했다.

“근데 총 오라버니. 이렇게 책만 읽어서 되겠어요? 오라버니는 이번에 정무맹에 갈 생각이라고 했었잖아요.”

“아! 호심당에?”

“네.”

“무공이야 곽 사부가 충분하다고 했으니까, 잘 가겠지 뭐.”

매영령의 물음에 만총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를 지도한 무사부인 곽철은 만총이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만총은 따로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안 가도 될 거 같기도 하고. 아직 딱히 정한 바 없어.”

“정말요? 여기 있을 거예요?”

“맞아. 일단 여기가 편하고 좋아. 요즘은 불편한 일도 안 생기는 데다가, 청풍재는 내가 아끼는 곳이기도 하니.”

“그래요. 여기 있어요. 편하고 좋으니까.”

만총이 안 갈 수도 있다는 말에 매영령이 몹시 기뻐했다.

만총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무맹에 가는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고.

그건 그저 선택사항일 뿐, 정무맹은 만총에게 중대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은 진우선에게 더 관심이 갔다.

그는 다시금 반가운 눈빛으로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진우선은 문득, 만총이 자신 때문에 안 가도 괜찮을 거 같다고 말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우선아.”

“왜?”

“너는 청제자라고 들었어. 그건 무공에 대한 재능이 매우 뛰어나야만 할 수 있는 거라던데……. 너는 그럼 이번에 정무맹으로 바로 갈 생각이야?”

“정무맹? 이번에?”

진우선이 되물었다.

처음 듣는다는 눈치였다.

만총은 진우선이 왜 그러는지 알아채고 설명을 덧붙였다.

“우선이 너는 금시초문인가 보구나. 원래 정무맹 호심당은 매해 원단(元旦, 설날)마다 새로운 제자들을 뽑아. 추천을 받기도 하고, 청운무관을 비롯한 호심당의 무관들에서 제자들을 선발하기도 해.”

“아.”

“근데 아무래도 선발하게 되면 보통 갑급에서 많이 가지. 이제 새 해가 몇 달 앞이니, 그날도 얼마 안 남았을 거야.”

“그런 게 있었군.”

“그래. 그래서 지금 관주님이 맹에 간 거지.”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총이 묻는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만총이 그걸 바로 알아챘다.

“뭐, 일단은 우선이 너도 안 갈 거 같네. 그게 나도 좋지.”

“총이 너는 안 갈 모양이구나.”

“맞아. 사실 귀찮아. 원래 나는 맹에 가려는 게 책을 더 읽을 수 있고, 또 돈 빌려달라는 사람들 없는 곳에서 토론하고 이야기하고 싶었어. 아! 우리 집이 전장을 하거든. 내가 왜 그런지 알겠지? 만나는 사람마다 돈 빌려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만총은 만금전장(萬金錢莊) 주인의 아들인데,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꽤 골치 썩은 모양이었다.

인제 보니, 사람들에 대해 파악하려고 하는 건 아무래도 그런 집안 환경 때문일지도 몰랐다.

청풍재 역시 만금전장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서 만든 곳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네가 있다면, 나는 여기서 너랑 이야기해도 재밌을 거 같다.”

“알았어. 나도 일단 시간 날 때면 종종 찾아올게.”

“그래. 종종 보자. 언제든 찾아와. 난 항상 청풍재에 있으니까.”

만총이 미소 지었다.

진우선은 만총과의 대화를 마친 후 팔운루에 돌아왔다.

평소라면 바로 수련에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먼저 진지한 눈빛으로 검노야에게 말을 꺼냈다.

“스승님. 호심당에서 제자를 뽑는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검노야가 단박에 진우선의 마음을 알아챘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님. 저는 예전부터 정무맹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호심당이면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곳에 선별된 무인들이 서로 배우고 익혀 신진고수로 거듭난다고 하니까요.”

진우선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허허. 그렇구나.]

검노야가 잠시 진우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우선아. 하나만 묻고 싶구나. 이토록 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느냐?]

검노야가 확인하듯이 물었다.

무언가 다 아는 듯한 어감이었으나, 진우선은 자신의 각오를 말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저는 예전부터 다짐한 게 있습니다. 정무맹에 가서 잔악무도한 적들과 힘껏 맞서 싸우고 싶었습니다.”

진우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각오를 말하는 것과 동시에, 잊고만 싶었던 기억이 슬그머니 떠오른 까닭이었다.

마을이 불타고 모두가 죽었다.

부모님마저도 숨을 거두었다.

진우선은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들킬까봐 절규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숨죽인 채 눈물 흘렸을 뿐이었다.

그때 몰아친 슬픔, 분노, 무력감, 상실감 등의 감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져 버린 두려움과 외로움도 어마어마했다.

그런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오니, 진우선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구나. 네 의지가 참으로 장해.]

검노야가 진우선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순간적으로 진우선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자꾸나. 네 말대로라면 호심당은 실력을 쌓기에 좋은 곳일 테니, 이런 기회는 흔치 않겠지.]

“알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진우선이 의지를 다졌다.

[우선아. 너는 이미 잘하고 있단다, 나도 도와줄 테니 마음을 옥죄지 말고 편히 생각하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스승님.”

진우선이 온 마음을 다해 감사를 표했다.

검노야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허허. 그리고 문득 든 느낌인데, 나도 정무맹이라는 이름이 나쁘지 않더구나. 좋은 곳이겠지.]

정무맹.

검노야는 그 이름에서 묘한 친근감이 든다고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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