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그들이 있는 곳 (2)
진우선이 저도 모르게 검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검이 속삭였다.
‘저 길. 우리도 가볼까?’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광영무에 순식간에 반해버렸다.
검노야의 광영무가 사람도 홀리고 검도 홀린 것이다.
그래서 따라가 보고 싶었다.
진우선이 곧바로 검을 뽑았다.
그러자 검이 그 길을 비추었다.
무언가 보이는 듯했다.
진우선이 검을 뻗었다.
그곳으로 검이 나아갔다.
둘은 이제 함께 길을 가는 친구였다.
함께 검노야를 따라갔다.
그러나!
“허억!”
검을 휘두르자마자, 숨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광영무의 한 초식을 흉내 내려 했을 뿐인데, 채 끝맺지 못했다.
온몸이 멎어버렸다.
쿵-!
그리고 진우선의 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혼절했으니까.
***
“으으…….”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온몸이 뻐근했다. 등이 매우 차다는 느낌도 들었다.
흙은 아니다.
딱딱했다.
아마도 차가운 바위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근데 여긴 어디지?
그 순간, 눈이 조금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아-.”
힘없는 한숨이 흘러나갔다.
그리고 정면으로 검노야의 모습이 보였다.
[정신이 드느냐?]
“……네.”
진우선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멍했던 머릿속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와 동시에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위에는 누각이 보인다.
천장이 높았다.
아래에는 단단한 돌바닥이었다.
여기에 누워 있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팔운루였다.
멀리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아직 낮이군요.”
[그래. 한 시진(時辰, 2시간) 정도 지났지.]
대략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접어든 때였다.
진우선이 상체를 일으켰다.
팔을 휘둘러보고 다리를 주물러 보았다.
몸에 남아 있던 뻐근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제대로 깨어났구나.]
검노야가 진우선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제가…… 기절했군요.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진우선이 상황을 인식했다.
광영무를 보았고, 따라가고 싶어 검을 휘둘렀고, 조금도 소화해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리고 지금 눈을 뜬 것이다.
[나는 괜찮다. 그보다 너는 어떠한지 궁금하구나. 살펴보니 몸에 큰 이상이 생기진 않았다만, 혹시 불편한 곳은 없느냐?]
검노야는 진우선이 쓰러졌을 때, 혹시나 해서 몸 내부를 살펴봤었다.
기혈이 잘못되진 않았는지, 내공이 역류하여 몸을 상하게 한 건 아닌지 걱정된 까닭이었다.
무공을 익히다가 무리하면 심각한 내상을 입는다. 그러면 평생 무공을 쓸 수 없을 수도 있고, 신체의 기능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진우선의 몸은 별탈 없었다.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이구나.]
검노야가 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아. 광영무를 따라와 보니 어떻더냐?]
“정말 어려웠습니다. 검을 쥐니 저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었는데…… 하나도 펼쳐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 그럴 테지. 광영무는 원래 한 번 보고는 절대 따라 할 수 없느니라.]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진우선은 큰 벽을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삼재검법을 완숙하게 펼쳐내게 되고, 그를 기반으로 유운검법도 어렵지 않게 소화해냈다.
각각의 요체를 깨닫고 몸에 담아 내니 펼쳐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광영무는 달랐다.
광영무는 삼재공이나 유운공처럼 펼쳐낼 수 없었다.
아예 무공의 궤가 다른 듯했다.
[상승의 무공이란 게 원래 그러느니라. 검의 움직임을 보아서 알고, 그 안에 담긴 뜻을 깨달아도, 익히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결코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지.]
그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느끼는 바가 많았다.
유운공은 삼재공에 비해 수준이 높은 무공이긴 하나, 상승의 무공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예 차원이 다른 무공의 고수 앞에선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니까.
그렇지 않다면 청운무관의 을급만 나와도 강호에 명성을 떨치는 무인이 되었으리라.
그럴진대, 진우선이 단박에 따라 하려고 한 것이다.
단숨에 상승의 무공인 광영무를 손에 담아내려는 욕심이었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무공을 빠르게 깨달았다고 해서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는 것임에도, 너무 탐이 나서 저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다 혼절한 꼴이었다.
진우선은 자신의 과욕이 화를 부른다는 걸 몸소 느꼈다.
[광영무는 훌륭한 상승무공이다. 검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반할 수밖에 없지. 그렇다면 우선아, 네가 왜 욕심을 내었는지 기억나느냐?]
검노야가 질문을 던졌다.
진우선이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황홀한 검무를 보고 넋을 잃었다. 따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욕심이었다.
평소라면 그렇게 욕심을 내지 않았을 텐데, 검노야의 검무를 보고 있던 그 순간에는 평소와 정말 달랐다.
검!
검이 이야기했었다.
함께 길을 가보자고.
결정을 내린 것은 진우선 자신이었지만, 어쨌든 그 속삭임에 이끌려 검을 뽑았다.
[맞다. 검이 충동시켰지. 검은 우리에게 더 강한 힘을 쥐고 싶게끔 충동시킨다. 물론 결정은 우리가 하지만, 그 충동은 한순간 사고를 멈춰버리지.]
“검을 이해하게 되어…… 오히려 검에 휩쓸릴 수도 있는 거군요.”
[그렇지. 그랬던 것이지.]
검노야가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게 책임이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느냐?]
“네. 검을 올바른 길로, 승리의 길로 이끌어갈 책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명심하거라.]
올바른 길.
진우선은 그 말에 함축적인 뜻이 담겨 있는 걸 깨달았다.
제대로 검을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이 표면적인 뜻이라면, 검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그 속에 있었다.
진우선이 검노야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광영무는 내일부터 수련하기로 하자. 오늘은 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네. 스승님.”
진우선이 공손히 대답했다.
검노야가 진우선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선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문밖에 손님이 와 있으니 살펴 보거라. 반 시진 전에 왔다 갔었는데, 다시 왔구나. 너를 찾는 손님인 모양이야.]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소녀였다.
***
청운무관의 갑급 수련장은 일운루부터 십운루까지 총 열 개가 있었다.
한 명당 한 곳씩 쓰니, 갑급은 열 명의 인원이 한계였다.
고작 열 명만 수용할 수 있다면 혹시나 연무장이 부족하진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여태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
가격이 너무 비싼 까닭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청운무관의 갑급에 등록하여 수련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네 명이 전부였다.
“……지금쯤이면 방문해도 되겠지?”
한 여인이 팔운루로 걸어가며 미소 지었다.
경장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얼굴에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이가 열네다섯쯤 된 듯했다.
그녀는 한 해 넘게 갑급에서 수련하고 있는 매영령이었다.
매영령은 오늘 청운무관에 도착하면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청운무관의 서 총관이 칠운루와 팔운루가 채워졌다고 알려준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팔운루를 찾았다.
하지만 만나지 못했다.
이미 들어왔고, 연무장으로 안내했다고 그랬으니 안에 있을 거라고 했는데.
팔운루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근데 진우선이 누구지?”
매영령은 진우선이 궁금해졌다.
여태껏 갑급 연무장에 온 사람은 대부분 알고 지내던 이들이었다.
이번에 칠운루에 들어온 전광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친하지는 않았지만, 알기는 했다.
그런데 진우선이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청제자로 추천받아서 왔다고 그랬으니, 무공은 엄청나게 잘하는 거 같은데…….”
서 총관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들은 대답이었다.
이로 인해 매영령은 청운무관에 청제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진우선의 무공이 뛰어날 거라는 기대가 들었다.
하지만 매영령의 소망은 다른 데 있었다.
“어쨌든 재밌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광 오라버니는 별로야, 별로.”
매영령의 기준에서 전광은 별로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계속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팔운루 앞에 도착했다.
매영령이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안에서 소리가 나왔다. 진우선의 목소리였다.
“아! 계시네요. 매영령이에요. 옆에 살아요. 오늘 새로 오셨다고 들었는데 인사 나누고 싶어요.”
매영령이 낭랑한 목소리로 용건을 밝혔다.
그에 진우선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매영령이 문 안으로 폴짝 뛰어 들어왔다.
“처음 뵈어요. 반가워요.”
“아, 네. 반갑습니다.”
매영령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는 백화원(百花院)에서 왔어요.”
“백화원요?”
“아! 백화원이라고 하면 모르시겠구나. 오운루예요. 제가 이름 바꿨어요. 여기 현판에 이름 쓰여 있지만, 막 바꿔도 되거든요. 다들 그래요. 이런 말은 서 총관에게 들으셨죠?”
매영령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몇 살이에요?”
“열다섯입니다만…….”
“아! 그럼 오라버니네. 앞으로 우선 오라버니라고 부를게요. 저는 열넷이에요.”
매영령이 나이를 밝히며 호칭을 정했다.
그 과정에서 머뭇거림이나 막힘이 없었다.
엄청난 친화력이었다.
“그럼 우선 오라버니는 총 오라버니랑 동갑이네요.”
“총 오라버니요?”
“아! 만총 오라버니라고 있어요. 맨날 책만 읽는 사람. 그래서 이름도 청풍재로 지었어요. 아무튼 그는 일운루에 있는 사람이에요.”
매영령은 만총과도 상당히 친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말재주라면 그 누구라도 친해질 수 있으리라.
“그런데 청제자라면서요? 그러면 무공 엄청나게 잘하는 거죠? 서 총관이 그러던데.”
“그냥, 열심히 할 뿐이죠, 뭐.”
“열심……. 으으! 학관에서 공부 잘하는 애들이 알려주는 비결이랑 똑같이 말하네요. 공부가 재밌다고 말하면서 엄청 열심히 하던데…….”
매영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학관도 다니는 모양이었다.
“오라버니는 그래요? 무공 익히는 거 재밌어요? 그렇겠죠?”
“네. 재밌어요. 모르던 걸 배우고 익는 게 즐겁고, 특히 삶에서 정말 중요한 걸 배워가는 거니까요.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실제로 지난 한 달간 무공에만 집중하며 익히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렇게 말하네요. 이것도 어쩌면 공부 잘하는 애들이랑 말이 똑같을까요? 난 재미없어요. 맨날 똑같은 거 반복하고. 그런 거 딱 별로야.”
매영령은 무공이나 공부를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나는 모양인지 샐쭉 눈살을 찌푸렸다.
“우선 오라버니. 살면서 재밌다는 이야기는 별로 못 들어봤죠?”
“아…….”
진우선이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대로 재미있다는 표현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매영령은 이런 진우선의 반응에 이미 익숙해진 듯,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도 고마워요. 내 이야기를 이만큼 들어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말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해서 진짜 재미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보면 우선 오라버니가 훨씬 낫네요.”
“뭘요.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우선 오라버니, 오늘은 제가 많이 어색하죠? 내일 또 올 테니까, 내일은 더 친해져요. 내일 보면 말도 편히 하고요.”
매영령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들어온 문으로 사라졌다.
“…….”
조용하다.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것은 마치 고서점에서 가장 힘든 손님을 치르고 난 후의 한숨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