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9화 (9/225)

009.

#그들이 있는 곳 (1)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낮.

진우선이 고서점을 나서고 있었다.

“아, 아저씨도 참!”

진우선은 거리로 나오며 뒤돌아보았다.

고서점 안에서 손을 좌우로 흔들고 있는 황호가 보였다.

진우선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황호의 손짓이 바뀌었다.

얼른 가보라고 손을 휘- 휘- 내저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오오! 갑급! 대단해! 대단해!”

황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청운무관에서 청제자가 되었고, 오늘부터 갑급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더니 들은 말이었다.

황호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어차피 오늘 너 품삯 받는 날이잖아. 이런 날은 빨리 가버려. 하루쯤은 너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즐겁게 살라고.”

그러면서 진우선을 밖으로 얼른 쫓아냈다.

진우선은 황호에게 등 떠밀려 대낮에 청운무관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배려가 고마웠다.

진우선은 청운무관으로 걸어가는 내내 황호가 생각났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많이 와 있었다.

이제 고서점의 윤곽만 눈에 들어올 뿐, 그 안에 있을 황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우선은 황호가 보이는 것처럼 고서점을 향해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청운무관으로 향했다.

진우선이 청운무관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난 건 총관이었다.

무관에 들어서는 진우선에게 총관이 다가오며 말했다.

“청제자가 된 걸 축하하네. 오늘부터 정식으로 갑급을 수련할 수 있겠어.”

“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나저나 어떤가? 설레려나?”

“네. 기대도 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 그래. 그럴 거야.”

총관이 진우선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러면서 책을 덮으며 업무를 얼른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급은 알려줄 게 몇 가지 있는데, 따라와 봐. 가면서 알려줄 테니.”

총관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갑급의 수련장소였는데, 병급, 을급의 연무장과는 방향이 반대였다.

“너는 청제자가 되어서 상관없겠지만, 사실 갑급은 을급보다 비용이 다섯 배 넘게 비싼 거 알고 있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총관이 중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진우선이 그 뒤를 바짝 뒤따랐다.

중문은 넓고 높았다.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아예 분리된 느낌이었다.

갑급의 구역이었다.

“그래. 그래서 갑급은 좀 많이 달라. 네가 여태까지 경험했던 것에 비하면 완전히 새롭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일단, 커다란 연무장이 아니라 개인 연무장에서 수련하는데…… 저쪽에 보여?”

총관이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별채처럼 생긴 건물들이 높다란 담장에 싸여 있었다.

각기 하나의 독립된 공간이었다.

“네. 보입니다.”

“누각처럼 생겼지? 저기가 연무장이야.”

담장 너머로 큼지막하게 지어진 누각이 보였다.

“갑급은 저곳을 한 사람이 하나씩 쓰지.”

“아!”

절로 탄성이 나왔다.

커다란 연무장을 여러 명이 함께 쓰는 게 아니라, 개인별 공간이 있었다.

총관이 걸어가면서 설명을 이었다.

“우측에 보이는 곳이 장서고다. 수련 중에 참고하고 싶은 게 있거나,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언제든 들어가도 돼. 갑급만.”

하나의 집처럼 준비된 개인 연무 공간.

언제든 빌려볼 수 있는 장서고.

이게 갑급에만 주어진 혜택이었다.

비용이 상당했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다. 수련하기에 최고의 환경이었다.

진우선이 마구 감탄했다.

청운무관의 갑급이 비싸서 그렇지, 좋긴 좋다고 종종 들었었다.

근데 실제로 보니, 과연 그러했다.

‘이런 곳에서 수련에만 매진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구나.’

갑급은 참 좋은 곳이었다.

그때, 길게 늘어선 누각 중 한 곳으로 총관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와라. 오늘부터 네가 쓸 곳이야.”

“네.”

진우선이 그 뒤를 따랐다.

문 위로 ‘팔운루(八雲樓)’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팔운루.’

진우선이 그 이름을 되새겼다.

총관이 그런 진우선을 보았다.

“이름이 좀 촌스러우면 네가 바꿔도 된다. 많이들 그러더군.”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총관도 별로 간섭하지 않는 듯했다.

“근데 내가 봐도 별로야. 너무 단순해서 특별해 보이지도 않아. 일이삼사오륙칠팔구십이라니…….”

쭉 늘어서 있던 누각들의 이름을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일운루, 이운루, 삼운루…….

그러나 진우선은 딱히 별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이름이 그렇구나 싶을 뿐이다.

팔운루면 어떻고, 십운루면 어떤가.

어차피 다 똑같은 갑급인데.

그러면서 앞쪽을 보았다.

누각은 이 층으로 지어져 있었다.

“이 층은 닫혀 있군요.”

“그래. 이 층은 방이야. 비바람에 신경 쓰지 않고 책을 보거나 할 수 있지. 수련하다 지치면 쉴 수 있게 침상도 있고.”

이 층은 개인 공간이었다. 집과 다름없는 듯했다.

그에 반해 일 층은 단단한 암석으로 바닥이 다져져 있었다.

천장도 매우 높고, 기둥 간의 간격이 상당히 멀었다.

그 어떤 수련을 해도 괜찮을 공간이었다.

“마음에 들지?”

“예. 정말 좋네요.”

“그래. 마음에 들어야지. 내가 여기 총관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갑급은 다른 무관들과 비교해 봐도 괜찮아. 그래서 여기를 쓰는 갑급 제자들도 다들 만족하고 있고, 외부에서도 우리 쪽으로 등록하기도 하지.”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총관이 자부심을 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이라면 온종일이라도 수련할 수 있겠네요. 저는 그럼 어느 시간에 쓰면 될까요?”

“그런 거 없다. 온종일 네 마음대로 써라. 완전히 너만의 공간이니까.”

“아!”

온종일, 나만의 공간이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러나 총관은 진우선의 개인적인 감상을 오래 놔두지 않았다.

“감동은 천천히 하고.”

총관이 사무적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들어가서 둘러보고 네가 알아서 사용하면 된다. 그보다 관주님은 한 사흘 후에 들러서 지도하실 거야. 그 후로는 닷새 정도마다 오실 거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무사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갑급은 무사부 한 명이 맡아서 날마다 지도하는데, 너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그러니 일단 오늘 내일은 이곳에 적응하면서 혼자 수련하고 있어라.”

“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수련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해왔으니까.

“전달할 건, 다 알려줬고. 그럼 이만 나는 가보마.”

총관이 그리 인사하고는 팔운루를 나갔다.

진우선이 총관의 뒷모습을 잠시 보았다. 이 모든 걸 설명한 총관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허허허.]

검노야가 기둥 하나를 짚고 선 채, 멀리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검노야는 비록 다른 사람에겐 안 보이지만, 그가 있어 진우선은 혼자가 아니었다.

***

[우선아.]

“네, 스승님.”

[삼재검법으로 검을 알게 되니 어떻더냐?]

검노야가 물었다.

팔운루의 일 층에서, 서로 마주 본 채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검이 나아갈 곳을 알게 되었을 때, 삼재검법의 수많은 길이 있는 걸 느꼈습니다.”

[그렇지. 네 말이 맞다. 우리가 부단히 수련해야 하는 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길을 가기 위함이지.]

검노야의 설명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초식을 펼치며 검을 휘두르는데, 검은 그렇게 휘둘러지는 순간마다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찰나의 때.

수많은 길이 놓여 있는 그 순간에, 하나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검을 이해하고 있다면, 어떤 길이 좋을지 택할 수 있었다.

[우선아. 너처럼 삼재검법을 통해 검을 이해하면 모든 게 충분할 텐데, 많은 사람이 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른 무공을 찾는다. 더 좋다고 알려진, 더 강한 위력이 있다고 알려진 무공 말이야. 그들이 어리석어서 그렇게 할 리는 없을 텐데……. 왜 그러겠느냐?]

진우선이 잠시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에 빠졌다.

자신은 삼재검법을 올바른 자세로, 정확한 모습으로 수련했기에, 삼재검법의 틀 안에서 검이 나아갈 길을 잘 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단조롭고 쉬웠다. 삼재검법 자체가 단조롭고 쉬운 까닭이었다.

많은 수련을 거친 사람이라면, 그것을 능히 감당해낼 터였다.

진우선이 그것을 이야기했다.

[옳지. 네가 수련을 해오면서 잘 느꼈구나.]

검노야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을 상대함에 있어 모든 순간이 중요하고, 순간순간의 선택이 결과를 좌우하느니라. 한데 삼재검법만 알고 있다면, 최고의 결과를 얻기에 부족하다 느낀 것이지.]

삼재검법만 알고 있다면, 능수능란하게 적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러다 보면 패배로 이어지고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이제 네게 책임이 있다. 검을 올바른 길로, 승리의 길로 이끌어갈 책임이.]

“네.”

진우선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이해했구나. 상승의 검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상승의 검법.

검노야는 그 필요를 정확히 알고 가기 위해서 진우선이 깨달은 바를 짚어주었다.

이게 삼재검법만 연공해 온 이유였다.

검을 이해함과 더불어, 더 좋은 길을 찾아야 할 이유를 몸소 깨닫기 위한 수련이었다.

[이제 너에게 전할 것이니.]

검노야가 손을 들었다.

움켜쥔 손에 빛이 어리더니, 그 손을 따라 빛이 늘어났다.

허공에서 빛을 뽑아내는 듯했다.

순백색으로 빛나는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노야가 검을 쥐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더니.

쏴아악!

사방에 강렬한 빛이 뿌려졌다.

검이 빛처럼 보였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검노야의 환영마저 빛처럼 보였다. 빛에 휩싸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제는 검노야가 빛인지 환영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웠다.

검을 쓰는 것인데, 마치 꽃봉오리가 열리듯 가녀리면서도 화려했다.

그런데 빛이 지나간 자리가 거무스름해졌다.

아니, 검은 무언가가 빛을 따라다녔다.

검이 지나간 모양대로, 거뭇한 흔적이 잠시 뒤따르고 있었다.

그림자 같았다.

자세히 보니 확신이 붙었다.

검 그림자다.

딱 그랬다.

빛이 펼쳐내는 검초 하나하나가 아름다운데, 그 뒤를 따라온 그림 자가 같은 모습을 그려냈다.

빛의 꽃이 터졌다.

검이 꽃을 만들어내니, 그림자가 뒤따라오며 꽃을 터뜨렸다.

파앗-!

섬광이 터지고 빛이 일었다.

검이 휙휙 그어지고 찔러질 때마다, 펑- 펑- 빛이 터졌다.

움찔!

그 빛이 살갗을 마구 찔렀다.

살가죽이 푹푹 파이는 것 같았다.

마주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님에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되었다.

이걸 무어라 불러야 할까.

검법이라 하기엔 너무 곱다.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새하얀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검무(劍舞).’

검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검노야의 음성이 들렸다.

[광영무라 한다.]

광영무(光影舞).

참으로 걸맞은 이름이다.

한 번 담아내 보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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