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청제자 (2)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해는 반복해서 떴고, 매일 서산 너머로 졌다.
그동안 진우선은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날마다 해야 하기에 지루하고 힘들 터였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럴 틈이 아예 없었다.
검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소중한 까닭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청운무관의 연무장은 오늘도 주변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검은 고요했다.
아니, 검을 든 진우선이 고요했다.
그리고 한순간!
“타합!”
기합소리를 터트렸다.
온 신경을 검에 집중한 채, 신중하면서도 신속하게 검을 휘둘렀다.
연무장 곳곳에서 수련하고 대화하는 사람들로 인해 온갖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에 간섭받지 않았다.
‘검!’
그리고 나.
오직 이 두 가지만이 존재했다.
세상은 그저 배경일 뿐, 의식의 세계에서는 검과 나밖에 없었다.
그 세계에서 검이 흐르는 길이 있었다.
초식이 만들어내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보며 진우선도 길을 찾고 있었다.
검이 가야 하는 길은 어디일까?
내가 가고 싶은 길은 무엇일까?
진우선은 깊이 생각하고 살폈다.
검노야는 가만히 지켜보며 끄덕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진우선에게 들리지 않게 응원했다.
[우선아. 잘하고 있구나! 그렇게 하는 거란다.]
***
새벽은 쌀쌀하다.
해가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으나 햇볕의 따스함은 아직 멀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이기에 바람이 차가운 수밖에 없었다.
“후우-! 하아-!”
진우선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적셨다.
그리고 웃었다.
이 시간이 좋았다.
만물이 조용하고 잠잠한 이 시간에, 세상천지에서 오직 나만 깨어 있는 느낌이 좋았다.
나 혼자였다.
가만히 있어도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스릉.
진우선이 검을 들었다.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좋았다.
진우선은 이제 그 집중의 범위를 넓혔다.
자신의 영역에 검이 들어왔다.
이제 둘이다.
그것을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무공으로 육체를 단련하며, 그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니, 부단히 노력하여 단련하고 수양하기를 평생토록……]
검노야의 음성이 떠올랐다.
검노야는 어느 순간부터 진우선이 수련하는 중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전할 말은 다 전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검노야의 말은 가슴속에서 항상 되새겨졌다.
잊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면 즉시즉시 떠올랐다.
그렇게 검노야의 목소리가 든든히 언제나 도와주니, 진우선은 나 자신과 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제 셋이다.
셋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새벽이 준 선물과도 같은 이 시간.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에도 찾아온 침묵 같은 이 순간.
진우선이 그 찰나를 만끽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음속에 검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아! 검이 이랬구나!’
검이 이해되었다.
검의 형상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각인되면서 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석 자(약 90cm)의 길이.
손잡이와 칼날.
모양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손잡이는 칼머리[劍頭] 쪽을 잡는 것과 칼날이 시작되는 바로 아래, 방패막이[古銅]를 잡는 게 다르다.
검신(劍身)은 검 끝에서부터 안쪽까지 칼날의 위치와 두께가 다르고, 그로 인해 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소리가 다르고 위력이 다르다.
이런 미세한 것들마저 알게 되었다.
또한, 몸놀림에 따른 검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지 느껴졌다.
휘두르고 찌르고 막는 등의 동작에서 힘이나 속도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느껴졌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이해되었다.
한순간에 작은 깨달음이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검이 내 손에 있다!’
이제 진우선은 제대로 검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검의 이야기가 조금씩 들려왔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다고.
네 검법의 길은 여기라고.
검법이 그렇게 가는 건, 나 때문이라고.
검법의 성질에, 내가 잘 갈 수 있는 길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라고.
검이 마구 속삭여왔다.
실제로는 그럴 리 없지만, 검이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걸 받아들였다.
마음속에 소통의 통로를 열고, 들어오게 했다.
‘날 인정했구나!’
검은 신이 나서 계속 말했다.
삼재검법의 길은 단순하다.
그래도 간결하여 가고 싶은 길은 어디든 다 갈 수 있다.
그러면서 물었다.
‘넌 어디로 가고 싶어?’
검이 묻는 것과 동시에 보여주었다.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 가기 쉬운 곳과 가기 힘든 곳 등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느꼈다. 본능적으로 알아 버렸다.
‘난 여기!’
진우선이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냥 알려진 길이 아니었다. 초식으로 정해진 검로가 아니었다.
휘어져 나오고, 그어 내리고, 힘차게 찔러 들어가고.
그런 각각의 위치에서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이 수십 개, 수백 개였다.
그중 하나를 택했다.
그리고 검이 나아갔다.
펼쳐지고 있던 초식의 중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갔다.
그런데도 검의 흐름에 끊김이 없이 부드러웠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달라진 게 아니었다.
여전히 검이 나아가는 길은 삼재검법 속에 있었다. 큰 모양은 삼재검법이었다.
‘잘 왔어!’
검이 화답했다.
잘 왔다고, 잘 했다고, 잘 이끌어 주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아-!”
진우선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몸은 휘이- 가볍게 움직이면서, 검은 자유롭게 길을 끌어주고 있었다.
머릿속이 작은 티끌 하나조차 없이 맑아졌다.
가슴속은 숨소리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차분해졌다.
그렇게 고요해진 몸에 벅찬 희열이 피어올랐다. 깨달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기억 속에 잠잠히 가라앉아 있던 검노야의 음성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삼재검법은 익히기가 쉽고 쓰기도 쉬우나, 그 안에 담긴 검의 성질과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저 흉내 내기에 불과하니……]
[……이 초식은 오른쪽의 적을 상대하는 것에 중점이 있지만, 언제고 자세를 돌려 주변을 방어함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오른발에 체중이 너무 쏠리면 안 되고……]
[……초식은 하나의 흐름으로써 위력을 배가시키고, 몸에 익숙하게 하여 실제 상황에서 손발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이 크다. 그렇게 초식을 터득하여 초식을 손 아래 둔다면 언제라도 능히 펼쳐낼 수 있으니……]
[……가장 큰 목적은 검으로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에 있고, 그렇게 하여 나를 지키는 것……]
검노야의 가르침.
그 모든 게 한꺼번에 이해되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애초부터 알았던 것처럼.
[……검을 이해하여 뜻이 일 때 검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그러면 검에 대한 입문을 마쳤다고 할 수 있지.]
그리고……
‘입문을 마친 것 같다.’
두우우웅-.
두우우웅-.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큰 종을 치면 소리가 크고 진동도 큰데, 몸이 종처럼 울린 것 같았다.
아주 크게 울리고 있었다.
진우선은 그 울림, 그 떨림을 만끽했다.
검은 멈췄다.
진우선은 내면에 집중했다.
지금 찾아온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세상이 멈추고, 내 안의 소용돌이가 세상을 삼켰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모든 것을 인식하고 그 모습 그대로 내 안에 새겨졌다.
눈 깜짝할 새도 없었다.
“……!”
아주 잠깐 숨이 멎었다.
그때, 거친 파도가 온몸을 때리고 지나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온 신경이 더욱 예리하게 느껴졌다.
몸이 잘게 계속 떨렸다.
“아-!”
멈췄던 숨이 한 방에 토해졌다.
이제야 온몸에 숨이 공급되었다.
피가 돌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난…….”
진우선이 눈을 깜빡였다.
느릿하게 고개를 내렸다.
자신에 손에 들린 검을 보았다.
검이 이어진 느낌이었다.
바로 그때.
짝짝짝!
박수 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우선아.]
진우선이 고개를 들었다.
검노야가 활짝 웃으며 손뼉 치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을 전했다.
[검으로의 입문을 축하한다. 정말 수고 많았구나.]
“제가…… 입문했군요.”
진우선은 얼떨떨했지만, 곧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허허허. 네가 잘해낼 거라 믿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어.]
검노야가 진우선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고생했다고, 장하다고, 검노야는 행동으로도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너는 참 성실한 데다가 재능이 있구나. 이게 좋은 인재를 가르치는 기쁨인가 싶다.]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고마운 마음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때.
또르륵.
툭.
물방울 소리가 났다.
땅바닥으로 한 방울 떨어지면서.
어느새 뺨을 타고 내려온 눈물방울이었다.
‘내가 재능이 있었구나.’
이 말 한마디도 너무 감사했다.
난생처음 들은 말이었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 자신감이 벅차올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더해졌다.
***
그날 저녁.
청운무관에선 양문곽이 진우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해줄 소식이 있어서였다.
“후훗!”
양문곽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좋은 소식을 전하려다 보니 설레는 모양이었다.
그걸 위해 관주와 여러 무사부들과 회의하면서 지난밤을 꼴딱 새지 않았던가.
“양 사부. 정말 청제자로 추천하는 거요?”
“아무리 뛰어나다지만, 너무 빠르오. 병급에 이 년 있었고 을급에선 고작 한 달 있었는데.”
“지난 이 년 간의 기록에는 재능이 없다고 쓰여 있는데, 불과 한 달 새에 평가가 바뀐다는 게 참…… 믿기 힘든 일이구려.”
“나도 동감이외다. 너무 이해하기 힘들구려. 검증도 전혀 되질 않았소.”
“허! 유운공을 익힌 지 채 한 달이 안 되었는데, 더 가르칠 게 없다니…… 이해하기 어렵소.”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들 직접 보시면 놀랄 것입니다. 우선이 그 아이는 검을 쓸 줄 압니다. 흡사 검을 가지고 논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검에 재능이 있습니다.”
“양 사부는 제자에게 관대한 것도 같습니다. 관주님께서 직접 지도하셨다고 들었는데, 보시기엔 어떠셨습니까?”
밤새 설전이 오갔다.
청제자는 무공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제자가 금전적 부담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신분이었다.
즉, 진우선이 청제자가 된다면 등록비 없이 갑급에서 수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르치는 무사부는 추가 수당이 없었다.
진우선을 맡는다면 다른 제자와 다르게 수익을 바랄 수 없었다.
그래서 무사부들이 반대한 것이다. 다들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돈밖에 모르는 늙은 여우들 같으니라고!’
양문곽이 속으로 욕했다.
그래서 이십 년 넘게 청제자가 없었다. 청운무관 출신이었던 양문곽도 직접 알아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제도였다.
‘이러니 인물이 없지, 인물이.’
청운무관의 명성이 늘 제자리걸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문곽의 주장은 결국 승낙되었다.
관주가 한마디 했기 때문이다.
“일단 청제자로 올려봅시다. 유운공을 몇 번 지도하지 않았으나, 나는 딱히 더 가르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소. 진우선이 청제자가 되어 갑급에 잘 적응하고, 그 소문이 잘 퍼진다면, 청운무관의 이름이 더 높아지지 않겠소?”
이름이 더 높아지면, 사람이 더 많이 등록한다.
이게 관주의 생각이었다. 관주도 무사부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으나, 그래도 생각이 좀 더 넓었다.
그렇게 진우선의 처우가 결정된 것이다.
“어쨌든, 다행이야.”
완벽하게 바라는 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원하는 바는 얻어냈으니까.
그렇게 어젯밤을 회상하고 있을 때, 양문곽의 눈에 진우선이 보였다.
“왔구나. 좋아 보인다.”
진우선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나았다.
옷차림이나 표정은 별반 달라진 게 없는데, 느낌이 그랬다.
홀가분해 보이고, 눈빛이 깊어진 것 같았다.
“우선아. 이걸 보아라.”
양문곽이 진우선에게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진우선이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아! 이건…….”
놀라는 기색과 함께 진우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청제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내용이었고,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도 적혀 있었다.
큰 선물이었다.
깊은 배려가 잔뜩 깃든 선물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축하한다. 내일부터 갑급으로 가 보거라. 가서 잘 배우고.”
양문곽도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