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청운무관 (1)
해질녘.
진우선은 고서점 일을 마치고 청운무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걸음이 경쾌하고 몸놀림이 가벼웠다.
표정도 좋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요즘 들어 수련이 즐거우니까.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문득 떠오른 논어 글귀를 읊조렸다.
‘즐겁지, 즐거워.’
검노야와 함께 수련을 시작한 지 닷새.
뛰어난 스승을 만났고, 격려를 받으며, 배움에 함께 힘쓰는 시간을 보냈다.
소망하던 그대로였다.
무관에 다닌 지 이 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토록 좋았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진우선은 날마다 즐거웠다.
반면에 청운무관의 업무를 맡아 보고 있는 총관은 여전히 시큰둥해 보였다.
“왔네. 들어와.”
총관이 진우선에게 말했다.
그리고 청운무관의 관주는 오늘도 바빠서 자리를 비운 상태인 걸 알려주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관주를 못 볼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을급은 원래 그랬다. 대략 열흘에 한 번 정도만 관주가 지도하는 일정이었다.
관주는 너무 바쁜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럼 무사부의 지도라도 많이 배정하면 될 테지만, 을급의 무사부도 한가하지 않았다.
을급의 무사부는 제자 열 명가량을 동시에 담당하는데, 무관에 을급 비용을 고정적으로 내는 사람들을 주로 살폈다.
개별적인 수익과 연관되다 보니 그런 현상이 발생했다.
진우선처럼 가끔 을급의 비용을 치르는 사람은 크게 집중하지 않았다.
대략 닷새에 한 번쯤. 그 정도로만 신경을 써주었다.
그게 을급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병급 제자에 비하면 매우 괜찮은 조건이었다.
병급 제자는 보통 대여섯 달에 간신히 한 번 관주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반 시진 정도의 시간에 불과해, 한두 초식을 배우고 질의응답을 하면 끝이었다.
또한 병급은 무사부도 셋밖에 되지 않았다.
무관에 등록한 제자는 병급이 제일 많은데, 무사부의 숫자는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무사부는 한 사람당 수십 명, 더러는 백 명까지 가르쳐야 했는데, 며칠에 한 번씩 연무장에서 한꺼번에 지도하곤 했다.
그런 환경이니 병급에서 관심 어린 지도를 바란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청운무관의 냉정한 현실이었다. 나쁜 소문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청운무관은 평판이나 명성에 신경 쓰지 않았다.
강호에서 정도를 걷기로 유명한 정무맹이 공식적으로 세운 곳이니,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그중에 병급을 등록하는 제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즉, 청운무관의 입장에서 진우선은 수많은 병급 제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무관 비용이 가장 낮은 수백 명 중 하나.
청운무관은 진우선을 딱 그 정도로 대해 왔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런 상황에 속상해하지 않았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게는 나만의 스승님이 계시다!’
청운무관의 널따란 연무장.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진우선의 앞에 검노야가 서 있었다.
[오늘도 잘 해보자꾸나.]
“네.”
진우선이 크지 않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검을 들며 준비를 끝냈다.
스윽.
검노야도 검을 쥐었다.
손을 말아 쥐는 순간, 그는 어느새 검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움직였다.
진우선의 앞에서 검노야가 동작 하나하나를 직접 펼치며 보여주었다.
보고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도록.
“타핫!”
기합성과 함께 진우선이 검을 휘둘렀다.
삼재공에 몸을 실었다.
검법의 초식을 따라 보법과 심법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삼재검법은 익히기 쉽고 쓰기도 쉬우나, 그 안에 담긴 검의 성질과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저 흉내 내기에 불과하니.]
베고, 찌르고.
흘리고, 튕겨내고, 막고.
그 하나하나마다 동작이 여러 가지가 있고, 만들어진 목적이 있었다.
초식이 비효율적으로 보여도 꼭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삼재검법이 만들어졌을 때, 왜 서른두 초식으로 정해졌겠는가?
‘그저 잘 펼쳐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여태껏 해온 방식에는 알맹이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이 년 동안 쉴 새 없이 수련했음에도 성취가 크지 않았던 듯했다.
이런 배움이 너무 값졌다. 검노야가 친히 지도하지 않았다면 계속 몰랐을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우선만을 위한 검노야의 가르침이었다.
중요한 건 그 가르침이 이제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이 초식은 오른쪽의 적을 상대하는 것에 중점이 있지만, 언제고 자세를 돌려 주변을 방어함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오른발에 체중이 너무 쏠리면 안 되고……]
검노야는 진우선의 자세도 지적해주었다. 이치만 이해시키는 게 아니라 정확한 동작을 취하도록 이끌었다.
환영이다 보니 자세를 바로잡는 건 더 쉬웠다.
바닥을 쑤욱 통과해서 발 모양을 조정하거나, 진우선의 동작과 상관없이 자세를 잡아줄 수 있었다.
사람이 자세를 잡아주고 있다면, 베는 동작 등에선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동작에 간섭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검노야는 달랐다. 환영이라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면 되니까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마지막 네 초식은 몸의 흐름을 검에 맡겨야 한다. 큰 움직임은 나에게 있으나, 작은 움직임은 검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삼재검법의 마지막 네 초식은 서른두 초식 중 제일 어려웠다.
그래서 진우선은 아직 열 번을 펼치면 서너 번밖에 제대로 펼쳐 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각 움직임의 차이에 의미를 두었을 리도 없었다.
초식이 완전하지 않으며, 이해도 못한 상태.
익숙한 삼재검법에서 가르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검노야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팔에 힘을 주면 동작을 경직시킬 뿐이니, 더욱 빠르게 하려면 어깨와 팔의 힘을 빼야 한다. 눈은 검에서 떼지 말고……]
진우선은 그 순간, 오직 검밖에 보이지 않았다. 검노야의 설명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때, 팔이 스윽- 움직였다.
내가 움직였으나, 내가 움직인 게 아니었다.
검노야였다.
검노야의 환영이 진우선과 겹쳐지며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붙잡아주시는 것 같다!’
진우선은 그렇게 정확한 삼재검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건 이전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렇기에 차이를 몸소 깨닫고 올바른 방법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검노야는 그렇게 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조목조목 지도했다. 어느 한순간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설명하여 이해시키며 틀리지 않게 했다.
[……이렇게 휘둘러내야 한다. 그것이 상승검법으로 들어가는 무리(武理) 중 하나이니, 삼재검법은 이 초식들로 인해 입문 무공으로 손색이 없구나.]
검노야가 설명을 마친 순간.
진우선이 삼재검법을 또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펼쳐내었다.
[우선아, 잘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좋구나. 삼재공이 어느새 네 것이 되어가고 있어.]
검노야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그동안 네가 삼재공의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이야.]
검노야와 진우선이 서로에게 공을 돌렸다.
특별할 게 없는 삼재공이지만, 여태껏 배운 게 그것뿐이었던 진우선은 그저 묵묵히 수련할 수밖에 없었다.
집을 지을 때도 기초가 튼튼해야 사상누각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계속 되뇌면서, 홀로 마음을 잡으며 수련해온 것이다.
‘스승님 말처럼 나는 날마다 좋아지고 있어!’
진우선은 이제 확신했다.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단순히 믿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삼재검법 서른두 개의 초식을 알고 펼친다고 할 수 있으니, 괄목상대한 발전이었다.
‘스승님은 정말 대단하시다!’
검노야에 대한 감탄이 마구 올라왔다.
수련도 즐겁고, 더 해보고 싶은 욕심도 났다.
“한 번 더 해보겠습니다.”
[그러자꾸나.]
진우선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방금 전보다 좋아진 진우선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웅- 우웅-
진우선이 펼쳐내는 검에 힘이 실리고 기세가 담겼다.
진우선의 삼재공은 이제 흔한 제자의 삼재공이 아니다.
더 완전하고, 더 위력 있었다.
또한 검노야의 검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수련을 지속하던 중.
검노야가 맥을 끊으며 말을 걸어왔다.
[우선아.]
“네.”
[무사부가 이쪽으로 오고 있구나. 아까부터 저쪽에서 널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진우선이 몸을 돌렸다.
회색 무복을 입은 무사부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검노야는 무사부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스승님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지.’
검노야는 진우선에게는 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한 허상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느낄 수도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환영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고서점에서 황호를 마주쳤을 때도 그러했다. 황호의 눈에는 진우선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무사부의 눈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만 해야 할 것 같구나.]
검노야가 단정 짓듯이 말했다. 무사부가 어떤 목적으로 다가오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오늘도 수고했다.]
검노야가 말을 건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검노야의 격려 방식이었다. 지난 닷새간 그랬다.
‘저도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마음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살짝 숙여 검노야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 방향에서 무사부가 오고 있었기에, 진우선의 인사는 실제로 무사부에게 하는 모양새로 보였다.
“자네.”
“네.”
“이름이 뭐지?”
“진우선입니다.”
무사부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동시에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사라졌다. 검노야의 환영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사부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진우선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여기 온 지 닷새 정도 됐지?”
“네. 그렇습니다.”
진우선이 을급 제자들을 위한 수련장에 온 지 닷새째다. 무사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무사부가 이름을 물으며 첫 대화를 열었으나, 아마도 이미 진우선이 누구인지 알아본 게 틀림없었다.
“역시 그렇군. 근데 방금 보인 검법, 다시 한 번 펼쳐 보일 수 있겠나?”
***
청운무관에는 여러 무사부가 있다.
관주가 있지만, 홀로 많은 제자를 전부 가르칠 수 없기에 무사부를 여럿 둔 것이다.
양문곽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을급의 지도를 맡은 무사부였다.
십대 때부터 청운무관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 정무맹의 정식 제자가 되었다가, 서른 즈음에 돌아와 무사부로서 제자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른바 청운무관 출신.
그래서인지 양문곽은 을급의 무사부로 임하면서 열심히 제자들을 살폈다. 청운무관에서 뛰어난 무인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호오!”
그리고 오늘, 한 소년이 눈에 들 어왔다.
‘실력이 상당한데? 이름이 뭐였더라… 닷새 전에 들어온 아이인 거 같은데…….’
소년은 검을 제대로 쓸 줄 알았다. 양문곽은 소년을 보자마자 그렇게 느꼈다.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고 했었는데…….’
관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유운공을 지도해보니 특출 난 무언가는 없다고. 노력하면 익힐 수는 있겠으나 무공에 대한 재능은 딱히 없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름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건지도 몰랐다.
‘저게 특출 나지 않다니…….’
관주가 놓친 게 분명했다.
저 정도로 검을 다룬다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게 아니면 닷새 만에 실력이 급성장한 것이라는 말이지 않은가?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닷새 만에 이럴 수 있으려면 대단한 고수에게 배우거나, 특별한 기연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기가 너무도 희박했다.
“아!”
양문곽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상념이 끊어졌다.
어찌 저럴 수 있는가.
‘군더더기가 없어.’
초식을 펼치고, 또 이어나가는데 하나도 나무랄 게 없었다. 삼재검법을 더 지도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삼재검법 자체가 기본적이어서 간결하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년의 실력은 청운무관의 제자 수준이 아니었다. 그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삼재검법을 꿰고 있어야만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데…….’
양문곽은 이제 관주의 말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리고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계속 지켜보았다.
그때, 어떤 제자 하나가 양문곽을 불렀다.
“사부님.”
그는 지금 양문곽이 지도하고 있던 청운무관의 제자였다. 양문곽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수련하다가 질문이 생긴 모양이다.
“어?”
“여기서 이렇게 하는 게 맞나요?”
양문곽이 제자를 살폈다.
‘어설퍼.’
이 제자는 사실 을급의 제자 중에서 실력이 있는 축에 속했다. 유운공의 성취도 꽤 괜찮은 편이어서 해가 바뀌면 갑급으로 보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보니 빠르기와 정확도 면에서 부족한 게 마구 보였다.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제자의 유운공이 앞서 본 삼재공보다 못해 보였다.
“음. 좋긴 했는데, 몇몇 부분에서 허점이 보이는구나. 일단 여기서는…….”
양문곽이 많은 부분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 시범을 보여주고 더 수련할 것을 명했다.
“……이해되지? 일단 이렇게 한 채로 열 번 더 펼쳐보고 있어라. 나는 다른 제자들 좀 보고 오마.”
“네.”
제자가 대답했으나 그 말은 허공을 맴돌았다. 양문곽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자리를 떠버렸으니까.
소년에게로 간 것이다.
그리고 들었다.
소년의 이름은 진우선.
양문곽이 진우선에게 물었다.
“방금 보인 검법, 다시 한 번 펼쳐 보일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