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검노야 (2)
마당 한가운데에 검노야가 진우선과 마주섰다.
진우선이 열의에 찬 눈으로 검노야를 바라보았다.
검노야는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아. 내가 시범을 보일 터이니, 잘 보아라.]
“네, 스승님.”
검노야가 손으로 허공을 긋자, 공중에 갑자기 틈이 생기며 순백 색의 검이 위용을 드러냈다.
허공이 주머니 열리듯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진우선은 크게 놀랍지 않았다.
조금 전 산천초목이 솟아오르고, 검이 나타났던 순간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아직도 환상 같기만 했다.
진우선이 검을 응시했다.
순백색 검은 은은하게 존재감을 흘리고 있었다.
검노야가 검을 쥐었다.
우웅-!
아주 잠깐, 검이 떨렸다.
연이어 허공이 출렁거렸다. 수면에 물결이 일 듯, 대기가 진동하며 파문을 그렸다.
하지만 검노야의 얼굴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진우선과 함께하는 첫 수련일 뿐이니까.
검노야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스륵!
곧바로 검을 그어 내렸다.
허공에 새하얀 선 하나가 그어졌다.
검노야가 끊임없이 검을 펼쳤다.
순백색 검이 지나간 곳마다 잔상처럼 궤적이 남았다.
진우선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강하다!’
맞상대하지 않음에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검노야가 펼쳐내는 검법은 검로가 어렵지 않고 명료했으나, 대신 우직하고 강맹했다. 단단하고 굳셌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떨어져서 바라보지만, 검의 기세가 살갗을 찌르듯 전해져왔다.
‘고수다!’
진우선은 확신했다.
청운무관의 관주도, 스치듯 보았던 이름난 무인들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진우선은 하나도 놓치지 않을 심산으로,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채 주시했다.
모든 흔적을 눈에 담았다.
잘 보라고 했으니까.
진우선이 보라고 검노야가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당연히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그게 검노야가 전하는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진우선은 평소보다 더 집중했다.
모든 걸 기억해버릴 각오였다.
그토록 원하던 스승님으로부터의 첫 번째 배움이라서 더 열의를 불태웠다.
물론 그게 아니었더라도, 이런 귀한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그림 같다!’
허공에 그린 그림.
허공에 그렸기에, 오래된 것은 옅어지고 흩어졌다.
하지만 진우선의 뇌리에는 선명하게 남았다.
‘……!’
그러던 중 문득 깨달았다.
‘설마…… 삼재검법?’
검노야의 검은 철저히 삼재검법의 검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여태까지 삼재공을 수련해온 진우선이기에 금세 파악했다.
그런데 이게 삼재검법이라고?
‘말도 안 돼!’
이렇게 강할 리가 없는데.
삼재검법이 이럴 리 없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진우선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삼재검법은 이러지 않았다.
청운무관에서는 기본적인 무관비만 내면 병(丙)급 무공인 삼재공을 알려준다. 삼재검법은 삼재심법, 삼재보법과 함께 삼재공의 하나였다.
한데 자신이 펼쳐낼 때나 무사부들을 봤을 땐, 그리 대단하지 않았었다.
그들 역시 삼재공이 기초라서 중요하지만, 기초 중의 기초라 강력한 위력은 보일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검노야의 삼재검법은 위력적이었다. 단순하고 간결해 보이는데도 초식마다 강맹한 힘이 쏟아져 나왔다.
감탄밖에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훌륭했다.
어느 경지에 다다르면 이렇게 될 수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달라도 너무 달라!’
무인의 실력에 따라 한낱 삼재검법도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문득, 머릿속에서 검노야의 삼재 검법과 자신이 펼쳐왔던 삼재검법이 비교되었다.
진우선 자신의 것은 너무나도 볼품없었다.
비교라니. 아니, 비교를 잠시 떠올린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애초에 비교할 수준조차 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얼른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열심히 배우자!’
진우선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검노야의 모습을 모조리 눈에 담고 뇌리에 새겼다.
[잘 보고 있구나.]
검노야의 말이 전해졌다. 무공을 펼치는 와중에 전혀 흐트러짐 없이 자기 뜻을 전달한 것이다.
검노야가 가볍게 검을 뿌렸다.
잘 보라는 듯이 삼재검법을 한 번 더 펼쳐냈다.
쐐애애액-!
허공이 찢겨나갔다. 대기가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종전보다 더 위력적이었다.
움직임이 가볍기 이를 데 없는데, 강맹함은 더욱 배가되어 있었다.
‘정말 엄청나시구나!’
계속 감탄만 나왔다.
이제는 삼재검법이 쉬이 범접할 수 없는 상승의 공부로 보였다.
이게 과연 가능하기는 했던 걸까?
검노야가 보여주지 않았으면, 결코 믿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새삼 이런 검노야에게 배울 기회가 온 것이 감사했다.
진우선이 눈을 더욱 빛냈다.
검노야는 연거푸 두 번 더 시범을 보이고 나서야 검을 멈추고는 진우선에게로 다가왔다.
걸어오면서 검을 휙! 던지니, 검이 등에 착! 붙었다.
[우선아. 잘 보느라 수고했다.]
검노야가 따뜻한 말투로 칭찬하고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가 삼재검법으로 시작했으면 싶구나. 그래서 한번 펼쳐 보았다. 삼재검법은 검을 쓰는 데 필요한 이치가 잘 담겨 있어 기본으로 삼기에 적당하고, 네가 오랜 시간 익혀왔으니 낯설지도 않을 것이니라.]
검노야가 진우선의 관점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실제로 진우선은 이 년 동안 삼재검법을 꾸준히 익혀왔기에, 검노야의 모습이 눈에도 더 잘 들어오고, 더 잘 이해되었다.
“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대답했다.
검노야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의욕이 보기 좋구나. 그런 마음 가짐이라면, 내가 보여준 것들은 어렵지 않으니, 올해 안에 이치를 깨우치고도 남겠어.]
지금은 가을이다. 올해 안이라면 몇 달이 채 남지 않았다.
검노야는 그때까지 이치를 깨우친다고 했다.
‘……그게 가능할까?’
기간이 너무 짧아서 의심이 들었다.
또한, 검노야가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삼재검법을 절세의 신공처럼 펼쳐냈는데, 그게 어찌 어렵지 않다는 말인가!
오히려 저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어려워 보였다. 오죽하면 똑같은 검법이지만, 하나도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였을까.
눈으로 봤고, 몸으로 느낀 게 그랬다.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배워야 할지, 얼마나 배워야 할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진우선에게 재능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진우선은 자신이 무공을 익히기에 뛰어난 인재가 아니란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문득 두려워졌다.
의혹, 불안, 걱정 등이 마음에 마구 엄습했다. 처음의 희망과 기대에 부푼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진우선에게 검노야가 답했다.
[두렵고 어려워 할 필요가 없느니라. 올해 안에 이치를 깨우친다 함은, 삼재검법을 통해 먼저 검을 이해한다는 것뿐이니.]
검노야는 정말 쉽게 이야기했다.
문득 하나 더 묻고 싶어졌다.
“이해하면 되는 건가요?”
[그래. 검을 이해하여 뜻이 일 때 검을 쓸 수 있게 되면, 비로소 검에 대한 입문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구나.]
“그게 입문……이군요.”
[그렇지.]
검노야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진우선은 더 낙심했다.
‘입문을 마쳤음이라니…….’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 입문이니,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아……!”
정신이 멍해졌다.
실력이 얼마나 올라가야, 이 정도를 입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검노야가 바라는 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우선아. 우리가 함께하다 보면 어렵지 않을 것 이니.]
검노야가 손을 내밀었다.
진우선이 그 손을 잡았다.
잡은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청아한 기운도 밀려들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머리가 맑아졌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의 의문을 지웠다.
‘내가 모르는 뜻이 있으실 거야.’
검노야는 스승님이었다.
진우선은 제자였다.
세상은 온통 모르는 것들로 가득차 있고, 무공에 관해서도 모르는 게 정말 많았다.
신비로운 존재인 검노야가 이런 것에 대해 잘못 말했을 리도 없었다.
[나를 믿어줘서 고맙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검노야가 인자하게 웃더니, 진우선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우선아. 너는 충분히 잘할 수 있어.]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네! 해보겠습니다!”
[좋다! 시작하자!]
***
“우선이는 어제 잘 다녀왔으려나?”
황호가 고서점으로 들어오며 중얼거렸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고, 고서점의 주인인 그는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진우선의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이 가득했다.
어제 즐겁게 수련을 다녀온 진우선이 웃는 얼굴로 뭐라 말할지 기대하는 까닭이었다.
“하! 무한의 차가운 남자인 내가 이럴 줄이야!”
황호가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우선에게 괜히 마음이 가는 게 못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마음이 쏠리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그건 삼 년 전에 황호가 진우선을 처음 만났던 날에도 그랬다.
열두 살의 진우선은 온통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고, 책을 전달하는 일로 고서점에 들렀었다.
그 아이는 책을 건네받는 동안, 잠시 고서점의 다른 책들에 한눈이 팔렸었는데, 그 눈빛이 참으로 아련했다.
무언가 익숙해 보이고, 또한 반가워하는 눈빛이었다. 책과 친해 보였다.
“눈빛이 정말 초롱초롱했지!”
그때 진우선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할 정도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초롱초롱한 눈이 문제였다.
눈동자가 맑게 빛나면서도, 무언가 어두운 기색이 가득했다. 밝게 웃고 있지만 슬픔이 어린 얼굴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마음이 쏠린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을 터이다.
그래서 고서점의 점원으로 고용했다. 마침 아버지께 글을 배웠다고 하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면서 들었다.
부모님은 작은 마을에서 글을 가르치셨는데, 마을에 복면을 쓴 산적 같은 자들이 나타나 부모님을 죽였다고. 자신만 혼자 살아남았다고.
열두 살의 진우선이 자기 일을 마치 남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미소가 서글퍼 보였지…….’
황호는 그때 애틋함을 느꼈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았는지 지금 또 생각이 나고 있었다.
“나 참, 옛날 기억이 또 왜 떠올라!”
황호가 투덜거렸다.
진우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싶은데, 괜스레 옛날 생각이 나 버렸다.
“명이가 커도 이러려나? 이런 게 아버지 마음인가?”
명이는 그의 다섯 살 된 아들, 황명이었다.
“아무렴 어때. 지금은 잘 살고 있으니 됐지, 뭐.”
진우선은 좋은 점원이고 괜찮은 청년이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서점 일을 능숙하게 잘 해냈다. 또한 적은 돈이나마 잘 모아서 자신의 염원이었던 무공도 배우고 있었다.
진우선이 희망을 품고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황호는 자신이 도움 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근데 우선이가 왜 아직 안 왔지?”
황호가 고서점을 살폈다.
어디에도 진우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미 고서점을 열고 장사할 준비까지 마쳤을 텐데, 오늘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 안 나왔나?”
황호가 고서점 뒤로 나갔다.
그러자 애타게 찾던 진우선이 보였다.
“잘 하네…….”
황호가 진우선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우선은 모든 걸 잊은 채 홀로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집중력이 좋아서 그런지, 아무것도 안 들리고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집중력이 떨어진 느낌이다. 서른이 넘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황호가 팔짱을 낀 채 진우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진우선의 모습은 다른 때와 달랐다.
자주 보던 모양인데,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듯했다.
더욱 날렵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좋아 보였다.
여태까지 뭉툭한 몽둥이 같았다면, 이제야 칼을 벼리는 느낌이 들었다.
‘잘 배우고 왔구나.’
분명 청운무관에서 을급으로 배운 건 어제 하루뿐인데, 무공에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훨씬 나았다.
바로 그때, 진우선이 황호를 발견했다. 이내 수련을 마치고 후다닥 달려왔다.
“아저씨, 벌써 오셨어요?”
“아까 왔어, 나는.”
“죄송합니다. 수련에 집중하다 보니 그만…….”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황호가 슬쩍 웃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보기 좋더라. 어제 많이 배웠나 보네?”
황호가 물었다. 눈으로 봐서 알고 있지만, 귀로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네. 아저씨 덕분에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그럼 됐다.”
황호가 진우선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고서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일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