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연지곤지]
[5가지 속성의 정령이 아니라, 6가지 속성의 정령이라고……?]
[마, 마물이 정령이 됐다는 게 진짜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그렇다면 핀들레이 가문은 지금껏 역사를 조작해 이 모든 사실을 은폐해왔다는 건가? 그런 파렴치한!]
고서의 내용은 발하나스 전역에 공평하게 공개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경악하며 믿지 못했다.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인 나머지 케이든이 잡음 없이 황좌를 차지하고, 아내인 디아나를 감싸기 위해 없던 증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혹마저 떠돌았다.
하지만 케이든이 처음 고서의 해독을 의뢰했던 것은 건국제 기념 행진 직후. 그리고 핀들레이 영지에서 생환한 후였다.
자비에 핀들레이와 마룡을 저지한 후, 순조롭게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다는 것은 아귀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케이든과 디아나 덕에 목숨을 건진 이들이 눈을 부릅뜨고 자발적으로 헛소문을 퍼트리는 이들을 감시했기 때문에, 그러한 의혹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 대신 이제는 다 무너져 무덤처럼 보이는 핀들레이 공작성을 향해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렇게 한 차례 혼란이 가시자 찾아온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빛의 정령왕, 그리고 어둠의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가 동시에 발하나스에 존재하다니. 게다가 그 둘이 부부라니! 심지어는 최근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라니!
틸리아께서 발하나스에 축복을 내리셨구나!
사람들은 매일같이 거리로 나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케이든과 디아나를 찬양했다.
1황자 엘리엇은 전투가 끝난 직후 곧장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했고, 레베카는 잠시 전투에 참여하긴 했으나 여전히 죄인 신분이었다
하여 사람들은 이제 공공연히 케이든을 황제, 디아나를 황후라 부르며 그들의 즉위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사실에 속이 쓰릴 법도 하건만. 분명 전투에 나서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랬건만.
레베카는 어쩐지 그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그 바보 같던 기사들 때문에 무언가 심경의 변화라도 일어난 것일까.
어쨌거나 자비에 핀들레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해 보일 뿐. 레베카가 지은 죄 역시 무겁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여 그녀는 조금 전, 재판장에서 선언하고 온 참이었다.
[……황족의 지위를 포기하겠네.]
스스로 황족이길 포기하겠다고.
당연하겠지만, 레베카의 선언에 재판장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그간 그녀가 황위를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정작 레베카는 후련한 마음뿐이었다. 스스로도 신기했지만, 정말 후련했다.
어쩌면 지금 자비에 핀들레이가 퍼붓는 저주처럼, 자신은 황좌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인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보다 더 황좌에 걸맞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결국 자비에 핀들레이는 레베카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지쳐 입을 다물었다. 레베카는 조용함을 만끽하며 침대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3황자비…… 디아나.’
일전에 열병을 앓으며 꾼 꿈. 분명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어쩐지 그 꿈이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이후로, 레베카는 그것과 관련한 꿈을 꾸지 못했다. 혹은 꾸었는데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오늘은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 재판장에서 끌려 나간 디아나 블루벨…… 아니, 디아나 서즈필드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황제가 된 레베카 블루벨은 어떻게 되었는지.
레베카는 오늘은 과연 이 궁금증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덧없는 바람을 품고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
레베카는 머리를 통째로 도려내는 듯한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제 숨에서 술 냄새가 느껴졌다. 기다렸다는 듯 구역질이 났다.
[우욱.]
레베카는 또 한 번 속을 게워낸 후에 침대에 아무렇게나 털썩 드러누웠다. 그래도 속을 게워내니 두통은 가셨다.
머리는 여전히 멍했다. 날짜가 얼마나 지났지?
디아나 서즈필드의 재판이 끝난 후. 레베카는 본능적으로 술을 찾았다. 맨정신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의 배신감 탓에 도저히 술을 들이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래 술이 잘 받지 않는 몸에 독주를 연달아 때려 부으니 정신을 잃는 것은 예사였다. 그렇게 정신 나간 것처럼 술을 마시고, 기절했다가, 다시 눈 뜨자마자 술을 찾는 생활을 한 것도 벌써 며칠째.
점점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느낌이었다. 이성이 흐려지고 충동이 그 자리를 메웠다.
레베카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괘씸한 것.]
곱씹어 생각할수록 디아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성이 건재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술에 절어 있었기에 레베카는 충동에 몸을 맡겼다.
그녀는 슬립 위에 얇은 가운만 걸친 채, 맨발로 비틀비틀 복도로 나갔다.
[세상에,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명하실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아직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황궁의께서…….]
하지만 레베카는 감옥에 채 닿기도 전에 사용인들의 손에 붙들렸다. 짜증을 내며 그들을 뿌리치려 했으나 망가진 몸은 이미 덜컥 기울어지고 있었다.
레베카는 사용인의 어깨를 간신히 움켜쥔 채 중얼거렸다.
[감옥…….]
[감옥이라고 하셨습니까, 폐하?]
[그래, 디안…… 디아나 서즈필드를 보러 가야겠다. 대체 내 뭐가 그렇게 싫어서, 아니, 아니. 그냥 여기로 불러와라. 지금 당장.]
그 말에 사용인들이 당황해 눈빛을 주고받았다. 황제가 제정신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뜻보다는, 그녀가 뱉은 말의 내용에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그게 묘하게 거슬렸다.
뭐지?
레베카가 의아함에 인상을 찡그리는데, 곁에 서 있던 사용인 하나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 디아나 서즈필드는 이미 참수되었습니다.]
[……뭐?]
그 순간 거짓말처럼 이성이 돌아왔다. 누군가 얼음물에 전신을 담갔다가 빼낸 느낌이었다. 레베카는 저도 모르게 사용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꾹 주며 말했다.
[사형 집행일까지는 아직 날짜가…….]
[피, 핀들레이 공작께서 말씀하시길, 폐하께서 사형 날짜를 앞당기라 하셨다고…….]
쿵.
어디선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사형 날짜를 앞당기라고 했다고, 내가.
레베카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져 보았다. 하지만 술 때문에 드문드문 끊겨 있는 기억에서는 핀들레이 공작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디아나 서즈필드의 시체는?]
[피, 핀들레이 공작님께서…… 폐하!]
레베카는 그 길로 사용인들을 뿌리치고 핀들레이 공작을 쫓아 영지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녀가 공작성에 도착했을 때 본 것은…….
[이런, 폐하. 예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셨다면 제가 손수 그 목숨을 거두어들이러 갔을 텐데요. 설마하니 이런 귀한 것을 코앞에 숨겨 두고 계셨을 줄이야.]
[뭐, 이제라도 알아보아서 다행이지만요.]
디아나의 시체에서 뽑아낸 심장을 들고. 손수 차린 연구실 한복판에서 환히 미소 짓는 핀들레이 공작의 모습이었다.
* * *
사박사박 눈을 밟던 디아나가 움찔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중얼거렸다.
“……어디서 레밋 경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 같은데요.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다가 우리가 과로로 죽기라도 한다면 그게 더 손해라는 것쯤은 알 놈이야. 이렇게 숨 돌릴 때도 있어야 사는 거 아니겠어?”
케이든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디아나도 모른 척 따라 웃으며 다시 발을 떼었다.
그들은 최근 말 그대로 서류의 산에 파묻힌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자비에 핀들레이가 벌인 일들을 수습하고. 1황자 엘리엇이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황궁에서 나가 살겠다고 선언한 탓에 그에게 내릴 작위를 고민하고. 레베카의 처우도 논의해야 하고. 아므리엔의 도움을 받아 지워지고 뒤틀린 역사도 바로잡아야 했으며.
거기에 본인들의 즉위식까지 점검해야 하니 문자 그대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하여 참다못한 케이든은 디아나를 데리고 잠시 황궁 밖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수도 인근의 언덕을 산책하며 간만의 바깥 공기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디아나는 발끝으로 새하얀 눈밭 위에 꽃잎을 만들다가 설핏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봄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녀가 과거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케이든을 다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을 때는 꽃이 한창 만발한 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함께 눈이 쌓인 언덕을 걷고 있었다. 새삼 시간이 참 빠르다며 디아나가 웃었다.
케이든은 디아나가 만들어 놓은 꽃송이 아래에 줄기와 잎사귀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그때까지만 해도 현상 수배범들 잡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발이 아팠는데. 지금은 발보다는 손이 더 아프네.”
케이든이 너스레를 떨자 디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얼굴을 기꺼운 듯 시야에 담던 그가 문득 입술을 뗐다.
“디아나, 그거 알아?”
“뭐가요?”
“오늘이 우리 계약이 끝나는 날이야.”
“무슨…… 아.”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이던 디아나는 케이든이 품에서 꺼낸 서류를 알아보고 탄식했다.
그것은 그들이 1년 동안 흠 없는 결혼 생활을 연기할 것을 다짐하며 적었던 계약서였다.
디아나는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짓궂게 물었다.
“그런데 왜요? 갑자기 이혼하고 싶어지기라도 했어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무섭다고.”
케이든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며 질색했다. 디아나는 그 반응에 웃긴 동시에 의아해졌다.
그럼 저걸 갑자기 왜 꺼낸 걸까. 기념품 삼자는 걸까?
디아나의 표정에서 그런 의문을 읽은 것일까.
“이러려고.”
케이든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양손으로 계약서 윗부분을 잡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계약서를 반으로 찢었다.
찌익-
반으로 찢어지는 종이 너머로 케이든의 웃는 얼굴이 드러났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놀람으로 굳어진 사이. 케이든은 계약서를 찢는 것으로도 모자라 엘판드를 두 마리 불러내더니, 각각의 입에 계약서 반쪽을 물려주며 진지하게 말했다.
“먹던지, 어디 모닥불이나 강에 던져 버리던지 너희 마음대로 해. 대신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라.”
고개를 끄덕인 엘판드 두 마리가 반대 방향으로 갈라지더니 신이 나 달려 나갔다. 흰 표범 형태의 정령들은 금세 눈밭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이게 무슨…….”
디아나는 여전히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케이든이 눈밭 위로 한쪽 무릎을 꿇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을 알아본 순간 목이 왈칵 메었다.
품에서 반지를 꺼낸 케이든이 조심스럽게 디아나의 왼손 약지에 그것을 끼워주었다. 그가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눈을 접어 웃었다. 어깨 위로 내려앉는 눈송이처럼 다정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돌아가면 새로운 계약서를 쓰자, 디아나.”
그 말에 디아나의 눈에 끝내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울지 않으려 노력하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 계약서에도 기한이 있어요?”
“당연하지.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게…….”
케이든이 태연하게 말하며 디아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제 어깨에 몰래 눈물을 닦아 내는 걸 못 본 척하며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라고 적으려고.”
그가 말을 맺으며 디아나의 손가락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 위로 입을 맞출 때는 잔망스럽게 쪽 소리까지 내 가면서.
상황에 맞지 않게 퍽 요망하고 발랄한 소리에 디아나는 결국 울다가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큽.”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뭐 난댔는데.”
“확인해 보겠다고 하지 마요…….”
“이런, 들켰네.”
케이든은 저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는 거 아니냐며 혀를 찼고, 그로써 또 한 번 디아나의 웃음을 자아냈다.
“전하-! 그만 돌아오십시오-!”
그들이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 황궁에서는 도망간 주인 때문에 한 마리의 짐승이 구슬피 울고 있었지만.
그리고 조금 전의 일로 인해 즉위식에 결혼식이라는 업무까지 더해졌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지금의 행복에 충실하기로 약속하며, 영원을 맹세했다.
-본편 完-
[연지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