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캬아아악!
늑대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데이지의 앞을 가로막은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늑대의 몸 주위로 찰나 보랏빛 안개 같은 것이 서렸다가 사그라들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데이지의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당장 정신 차리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인간!>
“……어?”
데이지는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방금.
‘마물이 말을, 머릿속에 직접……?’
하지만 이건 정령의 방식인데?
“아……!”
혼란에 빠져 있는 데이지의 곁으로 소년, 롬바드가 다가왔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데이지의 손목을 잡아채 당겼다.
사람들이 도망치는 곳으로 등을 떠미는 것, 그리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보아 ‘대체 왜 멍청하게 그러고 서 있냐, 도망가라’라고 말하는 듯이 보였다.
“데이지!”
“괜찮아?”
그러나 때마침 각자 맡은 구역을 정리한 정령사들이 그들을 도우러 왔다. 덕분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결국 각혈하다가 그 자리에서 기절한 데이지는 곧장 침대로 옮겨졌고, 밤중에 간신히 깨어난 후에야 동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리핀의 말이…… 들린다고? 머릿속에?”
“응…….”
데이지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사들은 심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말의 내용만으로 따지자면 그녀가 미쳤다고 보는 게 옳을진대. 그 대상이 데이지인지라 쉽사리 그렇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니오타가 다른 이들을 대표하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데이지. 그러면 정령왕을 불러서 물어보는 게 제일 확실하지 않을까?”
그들 중 정령왕과 계약한 것은 데이지뿐이었다. 아무래도 상급 정령보다는 정령왕이 아는 것이 더 많고 정확하겠지, 하는 판단에서 나온 말이었다.
데이지는 그의 말에 동의했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롤린을 다시 불러냈다.
“저쪽에서 뭐라고 해? 대화가 되긴…… 해?”
데이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한참 동안 늑대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던 롤린이 몸을 돌려 답해 주었다.
<우선 네가 물어보았던 것들부터 물어보았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건…… 정령이 맞다.>
롤린은 늑대로부터 전해 들은 것들을 간략하게 데이지에게 전해주었다.
롬바드 디하니스는 본래 마물들로 인해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인간 중 하나가 숲에 버리고 간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 롬바드를 저 마물, 아니 늑대, 아니 정령이 순간의 충동으로 살려서 제 동굴까지 데려갔고. 이후에는 정이 들어 자식을 기르듯 키웠다고 한다.
“그거 말고는?”
<……도와 달라는군.>
“뭐를?”
<정령이 되었어도 여전히 피 냄새가 달콤하게 느껴진다거나 하는 특성은 남아 있는 모양이야. 내게 마물의 본성을 억누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저 아이를 해치고 싶지 않다면서.>
“…….”
데이지는 잠시 숙연한 얼굴로 침묵했다.
마물은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살육과 피 냄새를 쫓는 짐승이었다. 아니, 오히려 평범한 짐승보다도 이지가 옅고 본능이 강한 족속.
그런 마물이, 비록 충동이었다지만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간을 곁에 두고 챙겨 주었다는 게 얼마나 무겁고 깊은 마음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혹시 정령이 된 것도 저 마음 때문 아닐까.’
제 본능을 억누르고서라도 롬바드를, 다른 생명체를 지키고자 하는 고귀한 마음.
그것이 마물이 정령으로 변화하게 된 요인이 아닐까?
이는 정령왕인 롤린조차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데이지는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그보다, 방법이 있는 거야?”
<글쎄. 새로운 속성의 정령이 탄생한 건 맞는 듯한데, 저건 정령왕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존재다. 상급 정령에 가까워 보이는군. 그러니 저들을 대표할 왕이 있어야 다른 정령들도 차례로 생겨날 테고, 그쯤은 되어야 제대로 된 정령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롤린이 말을 맺자,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하던 데이지가 불쑥 내뱉었다.
“그럼 네가 겸업해주면 안 돼?”
<뭐?>
“어, 겸업이라는 표현은 좀 그런가? 그래도 명색이 왕인데. 으음…… 그럼 연합 정령왕?”
<……혹시 싶어서 말하는데, 다른 정령왕들 앞에서 겸업이니 뭐니 했다간 진작 물벼락이든 불벼락이든 맞았을 거다.>
“헤헤, 미안. 그래서 결론은? 할 수 있는 거야?”
데이지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롤린이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할 수는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와의 계약이 끊어질 위험이 커. 그래도 괜찮겠느냐?>
“음…… 네가 괜찮다면.”
<계약자가 바라는 것이 곧 내가 바라는 것이다.>
“아니,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그만큼 나를 위해주는 건 물론 고맙지만, 나는 네가 너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고 살아가길 바라.”
<…….>
롤린은 그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가장 완벽한 크기의 ‘그릇’을 지니고 태어나 롤린을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준 은인.
그런 은인이 저렇듯 따스하기까지 한데, 롤린이 데이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계약이 끊어진다고 하더라도 곁에 있을 수는 있겠구나. 저 롬바드라는 소년의 그릇도 마침 나를 담아낼 정도의 크기는 되는 듯하니까. 너와 직접 대화할 수는 없어도 롬바드를 통해 대화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야.>
“헉, 그래? 다행이다!”
이후 롤린은 데이지의 마력을 사용해 ‘어둠’ 속성 정령의 왕을 자처했고, 그 여파로 데이지와의 계약은 끊어졌다. 존재의 구성이 달라짐에 따라 이름도 ‘아므리엔’으로 바뀌었다.
아므리엔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과 소통하게 된 늑대 ‘유로’와 롬바드는 은혜도 갚아야겠다, 정도 들었겠다, 하여 데이지의 곁에 남기로 했다.
데이지가 약해진 만큼, 일행은 롬바드라는 정령사의 합류를 반겼다.
이제는 아므리엔이 된 롤린이 롬바드와 계약한 탓에, 데이지는 자연히 아므리엔과의 대화를 위해서라도 롬바드의 옆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몇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빛 속성 정령사와 어둠 속성 정령사의 접촉으로 마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연으로부터 흡수할 수 있는 일반적인 마력이 아니라, ‘그릇’의 크기를 좌우하는 진(眞)마력.
진마력을 더 많이 가진 사람으로부터 더 적게 가진 사람에게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는 식이었다. 접촉 시간이 길어지고, 짙어질수록 진마력이 옮겨 가는 양도 늘어났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데이지는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예전과 비슷한 크기의 그릇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빛 속성 정령사와 어둠 속성 정령사의 접촉이 상호 간의 안정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아므리엔은 이 모든 것이 그가 빛과 어둠, 두 속성을 동시에 관장하는 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추측했다.
애초에 그가 어둠 속성 정령들의 왕이 되기로 했던 것은 유로가 누군가를 해치지 못하게 ‘진정’시키기 위함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 보니 마침내 데이지가 마룡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는 데 성공했을 무렵.
데이지와 롬바드는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어. 건국 기념일에 맞춰서.”
마룡 토벌 이후. 사람들은 마룡을 해치운 용사들의 이름을 연호하며, 데이지가 자신들의 황제가 되어 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 염원을 외면하지 못한 데이지는 황좌를 받아들였고, 황궁 터가 정해지던 날.
데이지는 황궁이 자리 잡을 땅 앞에서 롬바드와 손을 꼭 맞잡은 채 다른 정령사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렸다.
그 순간 니오타는 심장이 산산이 부수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축하해주었다.
“……축하해, 두 사람.”
니오타는 갈가리 찢어진 마음을 떠안고 천사처럼 웃었다. 하지만 눈만은 독을 탄 듯 섬뜩했다.
‘역시 죽여야겠어.’
그동안 데이지가 롬바드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결국 마지막에는 그녀가 서는 곳은 제 곁일 것이리라 생각하며 애써 관조했다.
하지만 데이지는 끝끝내 저 짐승 새끼를 붙잡고 놓지 않을 작정인 듯 보였다. 니오타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 일어서지 마시길. 잠깐 들린 것뿐이니까요. 그보다 이게 설계도인가요? 제가 몇 가지 조언을 좀 해도 괜찮을지…….”
그가 황궁 설계사를 은밀히 찾아간 것은, 데이지와 롬바드의 결혼 소식을 들은 그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