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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141/145)

141화

“어떻게 할까, 데이지?”

“으음.”

데이지는 고민에 잠겼다. 확실히, 마물이 득시글한 이 시대에 누군가 운 좋게 혼자서 탈출할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발자국의 존재가 어떤 인간인지, 혹은 인간이 맞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혼자 마주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다만 그만큼 다른 이들의 생사 확인 및 구조도 시급했다.

다른 이들은 데이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잠자코 그녀를 기다렸다.

데이지가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가장 강했고, 또 지혜로우며 현명했다. 그러니 그녀가 정령사들의 암묵적인 리더인 것은 당연했다.

긴 고민 끝에 데이지가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랑 니오타가 발자국을 따라 가볼게. 다른 사람들은 민간인들의 자취를 쫓아줘. 확인만 하고 금방 따라갈 테니까.”

“알았어. 대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정령을 통해 연락해.”

“응.”

맥시가 데이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녀는 곧 투덕거리는 윅스빌과 위버를 데리고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가자, 니오타.”

“응.”

데이지와 니오타는 나란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발자국을 좇아 움직였다.

니오타는 빠르게 달리다가 말고 시선을 힐긋 돌려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황홀한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몽롱해졌다.

‘아름다워.’

금색 머리카락이 하얗고 작은 귀밑에서 살랑거렸다. 이따금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데이지의 눈에 닿을 때면 그녀의 눈은 태양처럼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났다.

흰 제복, 그리고 흰 검이 그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 용사, 구원자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오롯이 빛나는 사람.

그것이 데이지 블루벨이었다. 동시에, 니오타가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이지는 그런 방면으로는 눈치가 조금도 없었다. 하여 니오타는 몇 년째 속앓이만 하는 중이었다.

“……동굴이네.”

그때 데이지가 걸음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니오타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멈춰 섰다.

그들이 쫓던 발자국은 음산한 동굴 앞에서 끊겨 있었다.

컴컴한 동굴 안에서 스멀스멀 찬 기운이 흘러나왔다. 동굴이 꽤 깊다는 소리였다.

니오타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 데이지.”

“아니야.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 너는 저번 전투에서의 상처도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잖아.”

“……알고 있었어?”

“또 이상한 소리 한다. 내가 설마 동료한테 그 정도 관심도 없을까 봐? 게다가 너는 나랑 가장 오래 알고 지냈잖아.”

데이지가 가볍게 웃으며 팔꿈치로 니오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는 아야, 하고 엄살을 부리며 허리를 굽히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터질 듯 새빨개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진정하자. 데이지한테 나는 동료일 뿐이고, 여긴 마물의 숲이고, 지금 고백하면 최악이야…….’

니오타는 지끈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간신히 마음을 억눌렀다.

“알았어. 그래도 조심해.”

“응. 너도.”

그렇게 두 사람은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니오타는 데이지의 등 뒤에서 불을 밝혀주고 보조하는 역할이었고, 만약의 사태가 생긴다면 공격하는 것은 데이지의 몫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얼마나 헤치고 걸었을까. 데이지가 발을 떼어 모퉁이를 돌자마자 머리 위로 날카로운 돌조각들이 쏟아졌다.

“데이지!”

니오타가 경악해 외쳤다. 하지만 데이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황금빛 검을 휘둘러 제게 쏟아지던 돌조각을 모두 쳐냈다.

“이봐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다짜고짜 공격하면…….”

데이지가 언짢은 기색으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니오타의 불꽃에 의해 온전히 드러난 눈앞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턱을 떨궜다.

“……마물?”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해서든 데이지와 니오타에게서 멀어지려는 듯. 막다른 벽에 몸을 딱 붙이고 한 몸처럼 엉켜 있는 존재.

그들은 늑대를 닮은 형태의 마물 한 마리. 그리고 겁에 질린 보랏빛 눈을 가진 인간 소년이었다.

* * *

니오타는 마물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마물과 소년을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물과 소년이 평범한 마물처럼 살의에 잠식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사람들을 잡아갔던 마물을 소탕한 다른 정령사들도 그들에게 합류했다.

“저는 반대입니다.”

“그럼 난 찬성할래.”

“음…… 알렌처럼 발포르를 화나게 하고 싶어서는 아니지만, 나도 찬성.”

위버는 니오타에게 동조했고, 윅스빌과 옐링은 데이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소년과 마물은 정령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이 사는 마을 근처의 헛간으로 이송되었다.

“저, 이름이 뭐야?”

“…….”

“혹시 이름이 없으면 내가 지어줘도 될까? 롬바드 디하니스 어때? 내가 좋아하는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야.”

소년과 마물은 정령사들을 경계하긴 했으나, 데이지가 그들을 단호하게 가로막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는 조금 경계를 푼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데이지는 소년에게 계속 말을 붙여 보았다. 이름은 무엇인지, 어쩌다가 마물과 함께 살고 있던 것인지 등등.

하지만 소년은 울음 비슷한 소리를 낼 수는 있었으나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꼭 태어났을 때부터 마물과 함께 살았던 것처럼.

결국 데이지는 소년과 마물에게서 정확한 이야기를 듣는 데 실패하고, 그들을 마을 한편에 머물게 해주었다.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마물과 소년은 데이지가 옷가지와 먹을 것을 가져다줄 때만 잠시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뿐, 헛간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위태로운 듯 기묘한 평화가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일전에 숲에서 간신히 도망친 마물이 다른 마물들을 이끌고 그들이 살던 마을을 습격했다.

“꺄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사방에서 불길이 솟구치고 비명이 난무했다. 이렇게 많은 수의 마물이 몰려든 것은 처음이었다.

“니오타, 남쪽을 맡아! 맥시는 북쪽! 발포르와 알렌은 동쪽을 맡아줘! 서쪽은 내가 맡을게!”

데이지는 정신없이 지시를 내리고 정령들을 이끌었다.

그녀는 다섯 정령사 중 유일하게 상급 정령이 아닌 ‘정령왕’과의 계약에 성공한 사람이었기에 다른 이들보다 더 빠르게, 많이 움직여야 했다.

빛의 정령왕 롤린은 데이지를 도와 사람들을 대피시키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데이지. 네가 자주 찾던 그 소년은 어디에 있는가?>

“……아!”

데이지는 그제야 소년과 마물의 존재를 떠올리고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아직도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이 상황이 더없이 당황스러울 텐데. 다른 이들을 대피시키느라 그들에게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잠시만 여기 여기서 일하고 있어, 롤린. 금방 돌아올게!”

데이지는 롤린에게 사람들의 인솔을 맡기고 서둘러 헛간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헛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물 여럿이 헛간을 무너트리고 그 안의 소년과 늑대를 끌어내고 있었다.

“안 돼……!”

데이지가 다급하게 마물들을 없애려 했으나 이미 롤린이 현신해 있는 상황에서 추가로 힘을 끌어다 쓰려니 몸이 덜컥 무너져내렸다. 순식간에 몸 안쪽이 진탕이 되는 듯한 기분과 함께 입을 타고 피가 터져 나왔다.

“커헉!”

<데이……!>

데이지의 몸이 무너졌다. 롤린이 경악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더니 사라졌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무리한 탓에 역소환된 모양이었다.

정령왕이 역소환된 여파는 컸다. 데이지의 입에서 쉼 없이 핏덩이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키이익. 키익.

그러는 사이 마물들이 데이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피를 많이 토해서인지 시야가 흐릿해졌다. 데이지가 혼몽한 눈을 깜박이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칼날을 바라볼 때였다.

“아……!”

캬아아악!

이제는 어느 정도 귀에 익은 소년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늑대가 데이지를 향해 날붙이를 휘두르던 마물에게 앞발을 들고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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