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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140/145)

140화

모의 전투에서 케이든에게 패배한 후, 뼈를 깎는 듯한 수련을 지속해왔다. 그러니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실력이 발전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공작이 바닥에 엎어진 채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레베카는 이내 표정을 지우고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어차피 잡아가 봐야 즉결처분이고, 그가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이 자리에서 없앨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검을 막 내리꽂으려던 찰나. 강풍이 불어닥치며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마구 흩날렸다.

레베카는 돌 부스러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직후 그녀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게 무슨…….”

레베카의 시선이 찰나 하늘을 나는 마룡에게 붙들린 순간.

그녀의 발치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던 공작이 이를 악물고 팔을 뻗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고, 노리는 것은 레베카의 심장이었다.

* * *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지나치리만큼 커다랗게 들렸다. 디아나는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눈을 떴다.

“……?”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는 케이든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그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케이든? 울어요?”

“디아나……?”

“어?”

케이든이 놀라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디아나의 입에서도 얼떨떨한 탄식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이…….

‘가벼워.’

분명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마룡의 날개를 멍하니 바라보던 것이었다.

그 육중한 날개에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멀쩡할 리가 없는데, 기이하게도 몸이 가벼웠다. 케이든의 볼을 감쌌던 손을 떼어내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조금 전까지 의식을 잃은 디아나를 붙들고 절망하던 케이든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이 뚝 그쳤다.

“이게 대체 무슨…….”

두 사람은 당황스러워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더한 놀라움이 찾아들었다.

세상이, 꼭 흑과 백으로만 그린 그림처럼 고스란히 멈춰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마룡도, 그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도. 케이든과 디아나처럼 양팔을 머리 위로 모아 막은 사람들도.

전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중에서 색을 띤 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케이든과 디아나뿐이었다.

디아나는 케이든의 부축을 받아 조심히 땅을 딛고 섰다. 하지만 그들이 움직여도 세상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그릇’을 갖춘 사람이 나타난 것도 오랜만인데, 상반된 속성이기까지. 놀라운 일이구나.>

별안간 천둥 같은 음성이 귓전을 때린 것은 그들이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케이든과 디아나를 덮쳤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헉, 하고 다급히 숨을 삼키며 휘청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었다.

케이든과 디아나가 천천히 경계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직후 그들의 입에서 동시에, 다른 단어가 튀어나왔다.

“빛?”

“어둠……?”

두 사람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허공에 뜬 채 은은한 기운을 뿜어내는 구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케이든의 눈에는 여전히 빛의 구체로, 디아나의 눈에는 여전히 어둠의 구체로 보였다.

다행히 이어진 목소리가 그들의 혼란스러움을 종식했다.

<다르게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빛이자 어둠이기도 하니까.>

“그게 무슨…….”

케이든이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때 두 사람의 주변으로 빛이 반짝이더니 정령들이 나타났다.

“유로?”

디아나가 어리둥절하게 유로를 불렀다. 정령들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튀어나오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로는 대답하지 않고 다만 조용히 몸을 낮춰 엎드렸다. 무프도 유로와 같았고, 힐라사는 몸통이 구체라 엎드리질 못하겠는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엘판드.”

케이든은 눈앞의 구체가 적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기에 엘판드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엘판드를 시작으로 빛의 하급, 중급, 상급 정령 모두가 구체 앞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마치 경배라도 하는 것처럼.

“설마…….”

그 광경을 보자 퍼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케이든이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만약 그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정령왕?”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말을 디아나가 자그맣게 내뱉었다.

그러자 그들의 짐작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듯, 구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빛의 정령왕이자 어둠의 정령왕, 아므리엔이다.>

“그런데 왜 그런 모습으로…….”

케이든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황궁에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정령왕과 그 휘하 정령들은 모두 눈코입이 달린 생명체의 모습이어야 했다.

실제로 힐라사는 짐승을 닮은 모습은 아니었으나 단추 같은 눈, 털에 파묻힌 코, 몸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입과 팔다리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저것은 그저 빛 덩어리, 혹은 어둠 덩어리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정령왕이라니.

케이든과 디아나가 상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그걸 설명하려면 이것부터 알아야겠지. 아무래도 너희는 우리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아므리엔이 담담한 어조로 폭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본래는 5가지 속성의 정령만 존재하는 것이 맞다.>

누군가 머리를 한 대 세게 때린 느낌이었다. 디아나와 케이든이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특히 디아나가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가 손을 올려 가슴께를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팠다.

‘그럼 처음부터 나는…….’

불길한 힘을 타고난 게 맞다는 소린가?

그동안 어둠 속성의 정령사가, 내가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애초부터 다 의미 없고 부질없는 짓이었던 걸까.

어쩔 수 없이 눈가가 시큰해졌다. 디아나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기에는 일렀다. 아므리엔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마물 대범람의 시대에, 인간들에게 버려진 한 아기를 기른 마물이 있었다.>

“마물이…… 아기를 해치지 않는 것도 모자라 길렀다고?”

<그래.>

케이든이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내 담담하던 아므리엔의 음성이 조금 음울해졌다.

<그 마물이 바로 최초의 어둠 속성 정령. 그리고 그가 기른 아기가 최초의 어둠 속성 정령사, 롬바드 디하니스다.>

* * *

때는 바야흐로 마물 대범람의 시대.

초대 5인의 정령사는 마물 무리에 잡혀간 인간들을 찾기 위해 숲을 뒤지고 있었다.

부스럭-

“어머.”

그러던 중 수풀을 검 끝으로 헤치던 데이지 블루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소리를 들은 맥시 옐링이 데이지에게 다가섰다.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찰랑였다.

“왜 그래, 데이지?”

“여기 봐, 맥시. 여기 사람 발자국이 있어. 마물에게 끌려갔다던 사람일까?”

데이지의 말에 근처에 흩어져 있던 다른 정령사들도 모여들었다. 그들은 데이지가 가리킨 땅 위에 찍힌, 인간의 선명한 발자국을 보고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것은 맞는 듯하군. 그런데 발자국이 하나뿐이야. 잡혀간 건 못해도 수십이라고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을 미끼로 쓰고 혼자 탈출했나 보지. 우와, 쓰레기.”

“……제발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말해라, 윅스빌.”

“너야말로 복잡하게 생각하는 짓 좀 그만해, 위버.”

“지금 말 다 했나?”

“아니. 할 말 많은데 내 입만 아프니까 참을래.”

“이 새끼가……!”

“두 사람 다 그만해.”

습관처럼 으르렁대던 물, 바람 속성의 정령사 사이로 흰 불꽃이 화르륵 피어났다. 당장에라도 상대방에게 달려들 것처럼 굴던 두 사람이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을 말린 것은 더없이 청초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흰 은발과 엷은 벽안은 청년을 신성한 무언가로 보이게 했다.

청년, 니오타 핀들레이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눈을 사르르 접어 웃으며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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