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안 돼……!”
“비 전하!”
케이든과 기사들이 기겁해 외쳤다. 그들은 투석기로 쏘아진 돌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디아나를 간신히 받아 냈다.
“디, 아나.”
케이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언제나 희던 얼굴이 질척하고 붉은 피로 뒤덮여 있는 광경은, 그 감촉은. 단순히 섬뜩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했다.
“쿨럭…….”
하지만 디아나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간간이 끊어질 듯 불규칙한 숨과 피만 입을 통해 나올 뿐이었다.
“전하, 저기!”
멍한 귓가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억센 손길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 바람에 강제로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 케이든이 탄식했다.
‘아.’
어쩌면 초대 정령사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검고 불길하고 거대한 것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마룡의 입 주변으로 심상찮은 마력이 응축되었다.
저것이 다음으로 할 행동은 어찌 보면 뻔했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움직였다.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디아나를 덮치듯 감쌌다.
이윽고 세상을 온통 녹여버릴 듯한 열기와 독기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순간.
똑-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며 멈추었다.
* * *
마룡이 하늘로 떠오르기 몇 분 전.
“큭…….”
부욱-
제 팔을 물어뜯은 마물을 막 해치운 핀들레이 공작이 나지막이 신음했다.
그는 힘겹게 옷자락을 찢어내 피가 줄줄 흐르는 팔을 꽉 동여맸다. 그러나 엉성한 천은 금세 붉게 물들어 그 틈새로 피가 새어 나왔다.
공작이 담벼락처럼 땅에 꽂힌 성채 잔해에 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고개를 슬쩍 돌려 기사들을 난자하는 마룡을 바라보았다.
키에에에엑!
기사 하나를 통째로 씹어 삼킨 마룡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절로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설마 저런 것이 나올 줄은…….’
황궁에서 도망친 공작은 자신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핀들레이 공작성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지하 마물 사육장에 두었던 마물과 변종 마물들을 죄다 성 근처에 풀어두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하지만 이건 결국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또한 알 수 있었다.
마물 연구에 관한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난 이상, 공작의 적은 발하나스 전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가 풀어놓은 마물들의 강함과 수는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되었으나, 시간을 들여 차근히 격파한다면 못 없앨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케이든의 곁에는 어둠 속성의 정령사까지 있으니 방어선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깨어나라, 어서!]
그래서 공작은 연구실 중앙에 놓인 알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나온, 처음 보는 결과물.
그는 저 안에 어둠 속성의 정령이 들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사용인들의 피까지 뽑아 알을 부화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막상 깨진 알껍데기 틈으로 드러나는 날카로운 발톱을 목격한 순간. 공작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알 밖으로 튀어나온 발톱이 알 전체의 크기보다 컸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지끈!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알이 반파되고, 그 안에서 뻗어 나온 거대한 앞발이 연구실의 절반을 뭉갠 후였다.
공작은 그 순간 직감했다.
[……도망쳐야 한다.]
공작이 지금껏 최고 귀족의 자리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던 건 그의 영리함, 끈기, 인내.
그리고 도망쳐야 할 때와 아닐 때를 판단할 수 있는 직감 덕이었다.
공작은 살아오며 몇 번이나 자신을 살렸던 감을 믿고 곧장 홀몸으로 성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사용인들이 무너지는 성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그의 발걸음을 늦출 이유가 되지 못했다.
간신히 성 밖으로 몸을 빼낸 후에는 제 손으로 풀어두었던, 성 근처를 배회하던 마물을 만나 싸워야 했다. 그로써 이렇듯 피투성이가 되긴 하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건재했다.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그래야 저것을 제압하든 사살하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공작은 다시 움직이기 전, 깊이 심호흡하며 다시 마룡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들 역시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룡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고함과 비명이 어지러이 메아리쳐 들려왔다.
‘회유에 실패한 것은 아깝지만……. 회유가 되지 않을 상대라면 죽여 후환을 없애는 편이 낫지.’
강한 것은 저 하나면 충분하다. 공작은 그리 생각하며 냉정하게 머릿속에서 ‘디아나 블루벨’의 이름 위에 가위표를 쳤다.
예기치 못한 마룡의 존재로 인해 성을 잃은 것은 큰 손실이지만, 하나뿐인 어둠 속성의 정령사를 없앨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공작이 형형한 표정으로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지지 않는다.’
황실 근위대에게도, 케이든에게도, 디아나에게도. 그 어떤 것에게도. 결코!
마룡이 완전히 근위대 쪽으로 관심을 돌린 걸 확인한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성 후미를 통해 마을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어차피 상처 입은 정령사 하나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해 빠진 이들 뿐. 필요한 물자를 챙겨 곧 무덤이 될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작의 계획은 채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했다. 그가 발을 떼는 순간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어딜 가는 거지, 공작?”
이제는 완전히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 무미건조한 호칭.
그것이 공작의 자존심을 거슬렀다. 그는 무의식중에 발걸음을 멈추고 노기 띤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너……!”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린 레베카가 흰 검을 늘어뜨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은 분노를 터트리다가도 본능처럼 레베카의 주위를 살폈다. 그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우아한 목소리로 답을 주었다.
“안심해도 좋아. 나밖에 없으니까.”
“……허.”
물론 다른 기사들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그건 그거대로 공작의 속을 긁었다.
어떻게 공작이 혼자 빠져나오리라는 걸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혼자서도 그를 상대하기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저리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어찌나 오만하고도 멍청한 손녀인지. 제 박살 난 자존심을 챙기고자 무모하게 적 앞에 뛰어드는 꼴이란.
공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마력을 움직이자 빛 한 줄기가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그의 손 안으로 일전의 흰 창이 나타났다.
“감히 날 대적하겠다고, 네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당시에 몸이 반쯤 찢긴 상태였어. 그런 걸 상대해놓고 의기양양하게 굴진 말지 그래.”
레베카는 상처 입었을 당시의 자신을 다른 덜떨어진 무언가를 대하듯 했다. 그 말에 핀들레이 공작이 입매를 뒤틀었다.
“그런 변명을 늘어놓는 건 꼭 패배자뿐이지.”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하던지.”
레베카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고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채앵-!
빠르게 휘둘러진 검을 기다란 창이 튕겨냈다. 공작은 레베카의 목을 노리면서도 주위를 경계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해놓고 주위에 기사들을 숨겨 놓았을지도 모른다.’
핀들레이 공작에게는 여기서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최대한 빠르게 레베카의 목을 치고 자리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윽.”
공작은 확실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레베카가 그의 창을 간발의 차로 막아내며 신음을 삼켰다.
상급 정령사와 중급 정령사. 그 사이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었지만, 핀들레이 공작에게는 긴 세월 쌓아온 경험 또한 있었다.
그것이 상급 정령사 중에서도 초입 부근에 있는 레베카와 공작의 차이를 좁혔다.
그러나…….
“커헉!”
동시에 공작의 노련함은, 만전 상태인 레베카와의 차이를 좁히는 데서 그쳤다.
공작이 피를 왈칵 토해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핏물 새로 바람 빠지듯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 어떻게…….”
공작의 음성은 경악에 차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레베카를 속속들이 파악하는 데 한없이 정성을 기울였다. 자칫 기르던 개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개의 힘이 어느 정도이며 이빨은 몇 개인지까지도 세세히 세어 두었다.
하지만 지금의 레베카는 그가 알던 것 이상으로 강했다. 어쩌면 모의 전투 때의 케이든 만큼.
레베카가 한심하다는 듯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상냥히 웃었다.
“나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당신을 의심해왔어.”
“컥, 크흐…….”
“그런 상대 앞에서 내 모든 패를 내보일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