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연지곤지]
“디아나!”
케이든은 순간 디아나가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비명을 질렀다. 불가항력이었다.
케이든과 디아나 사이의 거리가 상당했으므로 도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디아나는 케이든의 외침을 듣고 아슬아슬하게 몸을 기울여 마물을 피했다.
투둑-!
그러나 흐트러진 후드의 옆 부분이 마물의 이에 걸려 찢어졌다. 그 바람에 후드와 이어져 있던 복면도 함께 사라졌고, 디아나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순간 지금의 혼란의 어울리지 않는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조용했던 만큼 말소리가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저건…… 3황자비 전하?”
“하지만 3황자비 전하께서는 정령사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정령사인 걸 왜 굳이 숨긴 거지?”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아니, 3황자비 전하의 힘이 꼭…….”
수많은 말들이 허공을 떠돌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디아나가 가장 두려워하던 종류의 말도 있었다.
“마물의 기운이랑 닮지 않았었나?”
누군가의 속삭임이 소란을 넘어 선명히 귓가를 파고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귓가에 환청이 메아리쳤다.
[마녀!]
“수장님!”
뮈젤이 위험을 무릅쓰고 황급히 뛰어와 제 망토 자락으로 디아나를 가렸다. 하지만 그것이 외려 더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는 핀들레이 공작이라는 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케이든이 신원을 보증한다는 말을 들어 입을 막았다는 점 때문에.
기사들은 지금까지 난생처음 보는 능력을 쓰는 디아나에 대해 암묵적으로 묻지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전투의 승리가 더 중요하다고 되뇌며 애써 그 힘으로부터 느껴지는 두려움과 불길함 등을 억눌렀다.
하지만 디아나의 모습이 드러나고, 그녀가 지금껏 무언가를 ‘숨겼다’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애써 짓밟아 놓았던 의문들이 더욱 크게 술렁거렸다.
“그, 그렇잖아.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얼굴을 숨긴 거 아니야?”
“저런 속성의 정령이 있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저 힘으로만 상처 입는 마물이 있다는 것도……. 사실 마물과 같은 종류의 힘이라 상처를 입는 거 아니야?”
두서없이 뱉는 말이 우연히 진실에 도달할 때도 있는 법이다. 순간 과거의 기억에 매몰될 뻔했던 디아나는 케이든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애써 무너진 정신을 수복하고 몸에 힘을 주었다.
‘……일단은 살아남는 게 먼저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참전을 결정했을 때부터 정체가 밝혀질 위험이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다음 일은 지금을 무사히 넘긴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디아나는 자신을 향한 수군거림으로부터 애써 귀를 닫고 몸을 일으켰다. 설핏 웃음 지은 그녀가 뮈젤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고마워, 뮈젤. 그런데 근위대 기사들을 뒤쪽으로 물러나게 하는 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어.”
“……위험한 짓을 하시려는 건 아니죠? 가령 혼자 희생한다거나.”
“그럴 리가. 아마 저 용도 일전에 상대했던 슬라임처럼, 내가 첫 상처를 내는 데 성공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틈을 파고들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급소 근처에 상처만 내고 보조 쪽으로 빠질 거야. 결정적인 역할은 케이든이 하게 되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일 같습니다만……. 믿습니다. 돌아오세요.”
“응.”
한번 죽음을 겪어보았기에 삶의 소중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거기에 케이든을 비롯해 소중한 사람마저 여럿 생긴 지금 죽을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디아나가 곱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숨을 후 내뱉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콰앙! 쾅!
마룡은 여전히 성벽 위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기색을 살피니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간들부터 모조리 없애며 전진하려는 듯했다.
“디아나!”
그때 케이든이 뒤늦게 제4연대의 기사들과 함께 디아나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가 사색이 되어 그녀를 살폈다.
“괜찮아?”
“네. 케이든은요?”
“나야 뭐. 그대가 무사하다면 다행이지. 그보다 저 용…….”
케이든이 고개를 돌려 성벽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성벽 위에 남은 이는 열 손가락이 채 되지 않았다. 그가 낮게 물었다.
“아무래도 어둠 속성 정령의 힘에만 상처를 입는 것 같은데. 조금 전에도 무리했잖아. 괜찮겠어?”
애써 웃고 있지만, 조금 전 케이든과 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힐라사를 불러낸 탓에 마력이 반절쯤 동나 있었다.
디아나 역시 케이든 만큼은 아니더라도 방대한 마력을 타고났던 이인지라 이 정도로 큰 마력 소모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케이든의 손을 잡으니 어쩐지 어지러움이 나아지는 듯해 다행이었다. 디아나가 그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답했다.
“그래서 최대한 급소 주위로 상처를 내 볼 생각이에요. 그 뒤는 전하와 다른 기사들께 맡길게요.”
“……그래. 맡겨둬.”
케이든은 이를 악물지 않으려 애썼다. 디아나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도 그녀에게 기대야 하는 현실이 뼈아파서. 짐이 아니라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사무쳤다.
“엄호 부탁드려요.”
케이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없애고, 대신 활을 들었다. 디아나는 지체하지 않고 유로를 불러내 그 등에 탔다.
머리를 치켜들고 긴 울음소리를 뱉은 유로가 마물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기 시작했다. 케이든과 제4연대는 디아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활과 검 등으로 엄호했다.
디아나는 마물을 밟고 뛰어오르는 유로의 갈기를 단단히 붙잡으며 속삭였다.
“유로, 저번처럼 느낄 수 있겠어? 냄새가 특히 짙은 곳을 찾아봐.”
<아마도 눈, 그리고 날개 아래. 그보다 괜찮겠나?>
코를 킁킁거리던 유로가 마룡이 미처 부수지 못한 성벽 일부에 올라섰다. 시선을 내리자 볼품없는 돌무더기로 전락한 성채에 언뜻언뜻 피가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저놈이 피를 다 파묻어버려서 내게 줄 대가가 부족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빠르게 치고 빠지는 수밖에는.”
디아나의 중얼거림 직후, 보랏빛 선이 나타나 그녀의 손목을 그었다. 흰 손목을 타고 떨어지는 붉은 피를 유로가 혀를 쯧 차더니 핥았다.
<시간 싸움이다.>
나도 알아.
그렇게 답할 기력마저 아까웠다. 디아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마력을 움직였다. 유로 역시 주인의 생각을 읽고 입을 다문 후, 성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마룡이 끝내 성벽 위의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고, 다른 인간을 찾기 위해 두리번대고 있을 때였다.
유로가 마룡의 등 뒤에서 접근해 그것의 꼬리 위에 내려앉았다. 마룡의 몸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무게지만 이질감만은 분명했다.
크아악!
무언가 제 몸에 달라붙었음을 깨달은 마룡이 쿵쿵 발을 구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유로는 사방으로 튀는 돌무더기를 이리저리 피하며 마룡의 머리를 향해 내달렸다.
‘기회는 많지 않아.’
그러니 한 번에 힘을 집중해서, 보다 확실히 상처를 내야 한다. 슬라임을 도륙하던 그때보다 막대한 힘이 필요하리라는 건 당연했다.
디아나는 숨을 고르고 최대한 남은 마력을 끌어모아 날카롭게 벼렸다.
마룡이 고개를 틀어 그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유로가 마룡의 이를 밟고 뛰어오르며 외쳤다.
<지금!>
서걱-
디아나가 유로의 외침에 맞추어 마룡의 왼쪽 눈을 향해 마력을 휘둘렀다. 보랏빛 선이 커다란 눈을 반으로 갈랐다.
키에에에엑!
끔찍한 고통에 마룡이 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유로가 마룡의 꼬리를 가까스로 피하고 다시 날개 쪽을 향해 뛰었다.
그들이 마룡의 날갯죽지에 다다른 순간. 디아나가 유로의 등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날개 아래에 감춰진 가죽을 길게 갈랐다. 디아나가 뛰는 순간에 맞추어 빠르게 아래로 내달린 유로가 그녀를 다시 등으로 받아 냈다.
마룡이 전보다 한층 더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며 날뛰었다.
디아나가 베어낸 부분에서 검보랏빛 피가 팍 튀어 올랐다. 성공했다. 그것을 직감한 그녀가 외쳤다.
“됐어! 이제 멀어져야……!”
마력은 거의 바닥난 데다가 유로에게 빌린 힘만큼의 대가를 지불하지 못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마룡의 곁에서 멀어져야 했다.
하지만 직후. 내내 접혀 있던 날개가 서서히 펼쳐졌다. 성을 가로지르고도 남을 정도로 넓은 날개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날개가 휘둘러졌다.
퍼억-!
그 아래 있던 디아나와 유로가 날개에 맞아 속절없이 튕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