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서걱-!
보랏빛 선이 뮈젤을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들던 마물을 양단했다.
후드와 복면으로 외모를 감춘 디아나가 낮게 타박했다.
“뮈젤, 조심해야지. 왜 가만히 있어?”
“……달려든다는 걸 인지는 했습니다. 몸이 안 따라줘서 그렇지.”
“가끔 후방까지 오는 마물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알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뮈젤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정령을 다룰 수 없기에 후방에서 기사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이따금 기사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변종 마물이 사람들을 덮치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그래도 처음에 비해선 수가 많이 줄었어. 이 정도면…… 일부가 마물들을 견제하는 사이에 성벽을 넘을 수 있을 거야.’
핀들레이 공작과의 대치도 벌써 5일째.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초목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변종 마물이 있었다. 개중에는 이제껏 본 적 없던 변종 마물들도 다수 존재했다.
정령사들이 날아서 성벽으로 접근하려 하면 날개 달린 변종 마물들이 끈질기게 그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지상의 기사들이 비행 변종 마물을 처리하려 하면 땅속에서 다른 마물들이 튀어나와 그들을 덮쳤다.
[그때 우리가 봤던 연구실 말고도, 변종 마물들을 가두는 우리는 따로 뒀던 건가?]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많은 수였다. 변종 마물 하나하나가 일반 마물보다 월등히 강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들 중 어둠 속성 정령에게만 상처를 입는 개체는 극히 일부라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전투는 배로 길어졌을 것이다.
디아나는 뮈젤이 내민 물을 들이켠 후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이제 끝이 코앞이었다.
“안타르!”
가장 앞에서 마물들을 쓸던 케이든이 고함쳤다.
콰앙!
거대한 황금빛 검이 굉음을 내며 땅을 갈랐다. 마물들이 기겁하며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덕에 찰나 성벽까지 일직선으로 길이 만들어졌다.
“노에스!”
안타르가 그 순간에 맞추어 마력을 움직였다. 땅에서 굵은 덩굴이 돋아나 케이든이 낸 틈으로 뻗어나갔다. 덩굴이 성벽 위까지 비스듬한 길을 만들었다.
“제4연대, 진입한다! 나머지는 엄호해!”
“불화살은 운다인이나 운디네에게 맡겨라! 황자 전하를 엄호해라!”
케이든에 이어 옐링 공작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 음성에 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안타르가 만들어낸 길을 따라 성벽 위를 향했다.
촤아악!
키에에엑!
마물을 베어내는 소리, 마물의 비명 등이 난잡하게 뒤엉켰다.
디아나는 일전에 보았던 슬라임들을 잘게 난자하며 케이든의 뒷모습을 살폈다.
‘됐다.’
성벽 위에서 공작의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들은 이미 공작의 죄가 알려진 후, 그것이 자신의 죄가 아님에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경멸의 시선에 지쳐 있었다.
그러나 공작에게 약점을 잡혔거나, 죄에 가담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뿐. 사실 그들에게 싸우고자 하는 의지는 진즉 증발한 상태였다.
게다가 핀들레이 공작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가장 많은 정령사를 보유한 것은 황궁 근위대였다.
1개 연대를 제외한 모든 근위대가 여기에 모여 있다. 거기에 디아나를 비롯해 윙즈의 정령사들까지 몇 더해졌으니.
공작성을 둘러싼 마물이 워낙 많아 길을 뚫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을 뿐. 길이 뚫렸다면 머잖아 결착이 날 것이 분명했다.
끝이 보인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선택해야겠지.’
디아나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케이든을 벗어났다. 그리고 덩굴 아래쪽에서 엉망이 된 모습으로 싸우고 있는 레베카 쪽을 향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당신을 용서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내가 그랬듯 친히 그 목을 베고 싶은 걸까.
디아나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핀들레이 공작을 잡고 나면, 그녀의 마음이 어떻든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레베카는 어쨌거나 핀들레이 공작과 한배를 탄 사람이었으니까.
“……!”
그때 시선을 느낀 것인지, 레베카가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디아나는 꼼짝없이 그녀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일순 호흡도, 시간도 모조리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찰나 레베카의 눈빛이 회귀하기 전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디아나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착각인가?’
방금, 한순간이지만. 회귀 전 레베카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레베카는 회귀 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으니까.
디아나가 무슨 착각을 한 거냐며 자신을 향해 실소를 흘리는 순간이었다.
쿵-
“……어?”
땅이 진동했다. 동시에 심장도 함께 내려앉았다. 다가올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예감이라도 한 양.
“무슨…….”
“해가…….”
분명 한낮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공작성 주위로 어둠이 드리웠다.
먼 곳에서는 아직도 나뭇잎에 햇빛이 맺혀 반짝거리는 것이 보이는데, 공작성 주변만이 저주라도 받은 듯 어두워졌다.
기사들이 하나둘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든 역시 성벽을 코앞에 두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직후 근위대, 공작성의 병사 할 것 없이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게…… 뭐야?”
공작성의 중앙 첨탑. 그곳에 사람의 키를 거뜬히 넘을 법한 발톱이 달린 발이 튀어나와 있었다.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직후 첨탑이 폭발했다.
콰앙!
거대한 돌덩이들이 꽃잎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드러난 그것은, 가히 ‘절망’이라는 말을 형상화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케이든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마룡.”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마룡.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알 수 있었다. 마룡이 아니라면 저 새카만 용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변종 마물’로부터 태어난 저것이 태초에 존재했다는 마룡보다 더 사악하게 느껴졌다.
키에에에엑!
첨탑을 부수고 나와 건물에 붙어선 마룡이 길게 소리를 내질렀다. 단지 소리를 지른 것뿐인데도 그 반동으로 나무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꺾여나갔다.
넋을 놓고 있던 디아나가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물었다.
‘설마 연구실의 그 알이……!’
공작성의 지하 연구실에서 보았던, 중앙의 알. 본래는 탈출하기 전, 연구실 안의 모든 생명체를 죽여 없애려 했지만 예기치 못하게 레베카와 마주치며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알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는데. 만약 그 알에서 저런 게 태어난 것이라면…….
선득한 감각이 심장을 베고 지나갔다. 디아나가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마룡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케이든이 서 있었다.
케이든과 제4연대의 기사들 역시 마룡의 포효를 들은 즉시 이성을 찾고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마룡이 날개를 한번 휘두르자 그들의 공격은 모조리 튕겨 나갔다.
“공격이 안 먹혀!”
“물러나라! 물러나! 우리 공격은 소용없다!”
기사들은 마룡 역시 특정 기운이 담긴 공격이 아니면 상처 입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는 어느새 몰려든 마물로 인해 막혀 있었다.
기사들이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룡이 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그들을 덮쳤다.
“으아아악!”
“도망쳐!”
변종 마물이기 때문인지, 마룡은 날개를 펴지 않고 그 거대한 몸뚱이로 사방을 휩쓸고 다녔다. 마룡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성벽이 무너졌다. 케이든과 제4연대의 기사들을 지탱하고 있던 덩굴이 와드득 소리를 내며 끊겼다. 그들의 몸이 허공에서 급격히 추락했다.
“주군!”
안타르가 기겁하며 외쳤다. 케이든과 기사들이 마물로 가득한 땅 위에 추락하기 직전. 검은 먼지 구름이 허공에서 퐁 하고 피어오르더니 가까스로 그들을 받아 냈다.
삐이익!
“……고마워, 힐라사.”
케이든이 무수한 힐라사들 사이에 파묻혀 신음했다. 하지만 동시에 하급이라지만 이만한 수의 정령을 불러낸 디아나가 염려되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자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디아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의 위로 변종 마물이 달려들었다.
케이든이 경악해 외쳤다.
“디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