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아, 왔어요?”
소파에 앉아 있던 디아나가 반가운 얼굴로 일어서며 케이든을 맞이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그가 곧장 팔을 벌리고 그녀를 제 품에 가두었다.
디아나의 어깨에 턱을 괸 케이든이 편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입술로 가볍게 지분거리며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아?”
“뭐가요?”
“1황녀 말이야.”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나요? ……아야. 뭐 하는 거예요?”
디아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케이든을 타박했다.
그가 이를 세워 어깨를 깨문 탓에 따끔한 통증이 일어서였다.
하지만 케이든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답지 않은 태도였다. 오히려 당당하게 시선을 올려 디아나와 눈을 맞췄다.
“거짓말하지 말고.”
“……어떻게 알았어요?”
“그대는 거짓말을 할 때는 입만 웃잖아.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데.”
케이든의 말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제 입가를 어루만졌다.
그린 듯 휘어져 있던 입매가 서서히 제 모양을 찾았다.
청보랏빛 눈에는 미약한 혼란이 서려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디아나가 결국 케이든을 마주 끌어안으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회귀 전. 그녀가 누명을 썼던 것이 레베카의 의도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건 이번 일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묵은 원망이 곧장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핀들레이 공작에게 철저히 기만당한 레베카를 동정하는 마음도 있었다.
수십 가지 감정이 마음속에서 복잡하게 뒤얽혔다.
그중 디아나의 마음과 가장 어울리는 단어를 구태여 골라낸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애증.’
전혀 다른 두 마음이 공존하는 상태.
케이든이 디아나의 귓불을 입술로 슬쩍 물며 물었다. 한 손은 어느새 허리를 은근히 타고 오르고 있었다.
“어쨌든 모레면 알 수 있겠지. 참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경비에게 말해서 근위대에 합류하라고 했으니까 말이야.”
“왔으면 좋겠어요?”
“이성적으로는. 한 사람의 전력도 아쉬운 게 사실이니까.”
“올 것 같…… 읏. 어딜 만지는 거예요?”
디아나가 허리를 타고 슬금슬금 가슴으로 올라오던 케이든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불순한 손과 달리 그 태도는 천진한 소년 같았다.
“부부끼리는 만져도 되는 곳? 지난번에 그대도 엄청 좋아했…….”
“……조용히 해요.”
“맨날 나보고만 조용히 하라고 하네. 서럽게 만들었으니까 책임져 줘.”
“무슨 억지야, 그게…….”
디아나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케이든은 뻔뻔했다.
결국 디아나는 이번에도 케이든의 뻔뻔함에 못 이겨 해가 희붐하게 밝아올 때까지 그에게 붙들려 있어야 했다.
창밖에선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함께 있는 방만큼은 계절을 모르는 것처럼 따스했다.
* * *
마침내 출정 당일이었다.
위버 공작과 윅스빌 공작이 이끄는 제5연대는 황궁을 지키는 최소한의 호위로 남고, 그 외의 전력은 모두 황궁 정문 앞에 도열 해 있었다.
“전하.”
옐링 공작이 낮은 목소리를 내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부름에 케이든이 시선을 돌리자 그가 속삭였다.
“제1연대와 제3연대의 지휘는…….”
옐링 공작이 저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케이든은 티 나지 않게 흘끔 시선을 돌려 제1연대와 제3연대를 바라보았다.
‘다들 눈치 보느라 바쁘군.’
제1연대와 제3연대의 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눅 든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의 주인인 핀들레이 공작은 상상도 못 할 반역을 저지르고 도주했으며, 레베카 또한 감금되었으니까.
난데없이 지휘관을 잃었으니 불안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해와 수용은 별개였다. 핀들레이 공작은 성문을 닫아걸고, 온갖 종류의 변종 마물과 마도구를 이용해 저항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끌어내려면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사기를 올려도 모자랐다.
‘……나오지 않는 건가.’
아직 명명백백히 힘을 드러낼 수 없는 디아나는 케이든을 배웅하는 척하고, 뒤에서 윙즈 길드원들과 함께 합류하기로 했다.
케이든의 곁에 서 있던 디아나가 무의식중에 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탑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군.”
케이든이 결국 입을 뗐다. 그가 굳은 얼굴로 옐링 공작에게 명령했다.
“경이 제1연대와 제2연대를, 내가 제3연대와 제4연대를 이끄는 수밖에 없겠어. 두 개의 연대를 한꺼번에 통솔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저, 전하!”
그때 누군가 비명과도 같은 부름을 내뱉었다. 정문 앞에 도열 해 있던 모두가 일제히 긴장하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경계는 이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디아나는 제1연대의 중간을 가로질러 오는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망토를 입은 채 발을 옮기던 레베카가 케이든의 앞에서 멈춰 섰다. 디아나를 힐끔 일별한 그녀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우아하고도 오만한 목소리로 툭 말했다.
“다음부터는 정확한 시각을 알리도록 해. 괜히 어설프게 일 그르치지 말고.”
“아…… 예.”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그 태도에 휩쓸려 얼떨떨하게 답을 내뱉었다.
그가 답하자마자 레베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제1연대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기사들을 향해 보란 듯 혀를 쯧 찼다.
“다들 정신이 빠졌군. 그냥 전장에 서기 전에 여기서 내 손에 죽는 게 더 명예롭지 않겠나?”
그 말에 제1연대의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바짝 세웠다. 저 섬뜩한 지청구가 이렇듯 반가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휘관이 익숙하게 자리를 채우자 기사들의 얼굴에도 서서히 평소와 같은 침착함이 돌아왔다.
케이든이 뒤늦게 피식 웃으며 입술을 뗐다.
“다시 명하지. 제3연대만 특별히 내 명을 따르는 것으로 하고, 다른 연대는 평소처럼 움직이면 된다. 이견 있나?”
“없습니다!”
쩌렁쩌렁한 대답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레베카는 귀가 아파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쳤지.’
사실은 벌써 제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내가 그놈 좋을 일을 굳이 할 이유는 없지.]
원래는 케이든의 말 따위 보란 듯 무시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해가 밝아오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이불까지 뒤집어썼다.
[저는 전하의 사람이에요. 전하께서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어요.]
하지만 외려 깜깜한 어둠 속에 있으려니 환청이 들리고, 이상한 장면마저 언뜻언뜻 시야에 아른거렸다.
본래 온전한 기억보다, 보일 듯 말 듯 온전하지 않은 기억이 더 자주 생각나는 법이다. 찝찝하니까.
결국 레베카는 신경질적인 욕설을 짓씹으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급하게 옷을 꿰어 입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모두 평소라면 황족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며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래. 미친 거다.’
이건 전부 웃기지도 않는 망상이 희미하게나마 머리에 남은 탓에. 마음이 혼란해져 나온 변덕이자 충동일 뿐이다.
레베카는 속으로 같은 말을 여러 번 되뇌며 자신을 다독였다. 자꾸만 디아나 쪽으로 돌아가려 하는 시선을 애써 붙잡으면서.
* * *
그렇게 약 일주일 후. 핀들레이 공작성 근처의 민가.
“벌써 며칠째지?”
“나흘은 넘었지.”
“어휴, 저것도 못 할 짓이야. 웬 미친놈 하나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만 고생하는구먼.”
옆구리에 바구니를 낀 주민들이 숙덕거렸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검은 연기에 휩싸인 핀들레이 공작성을 향해 있었다.
발하나스의 주요 전력이 핀들레이 공작성 앞에 도달한 지도 벌써 5일째였다.
그러나 그들은 견고한 성벽과 더불어 공작성 근처에 빼곡히 깔린 변종 마물들 때문에 적잖이 고전 중이었다.
[신원은 내 이름으로 보증하겠다. 이들은 아군이니 그에 합당한 예를 갖추도록.]
특히나 어둠 속성 정령의 힘이 아니면 상처를 내기 어려운 마물들은 디아나가 없었다면 진작 연대 하나는 궤멸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케이든은 디아나와 그녀를 보조할 윙즈 길드원들을 그렇게 소개했고. 기사들은 처음에 온통 검은 로브 일색인 길드원들을 수상쩍게 바라보았으나, 그들이 전투에 나서는 것을 본 이후로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고 할 것은, 레베카가 디아나의 능력을 보았다는 점이었다.
케이든과 디아나는 행여 레베카가 어둠 속성 정령의 힘을 알아보고, 그것을 폭로할까 염려했지만 의외로 레베카는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기사들은 힘겹지만 조금씩 공작성을 포위해 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성벽을 넘겠다던데.”
“에휴, 제발 그랬으면 좋겠구먼. 나쁜 놈 잡는 것도 일이긴 한데, 그보다는 저 이상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맞지. 그런 의미에서 밥이라도 좀 해다가 줘야겠네.”
“나도 돕지.”
수다를 떨던 주민들은 이내 하나둘 팔을 걷어붙이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부디 이 전투가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