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이건…….’
청보랏빛 눈이 점차 짙게 침잠했다. 그 안에는 공작 본인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빼곡하게 들이차 있었다. 가장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조께서는 언제나 그가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라 말씀하셨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어째서 두려워해야 함이 마땅한가?
두려움이란 결국 자신이 뛰어넘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감정의 찌꺼기일 뿐이다.
그리고 내게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일 뿐.
그자의 자리에 이어 힘마저 빼앗는 데 성공한다면 핀들레이에는 무궁한 영광이 깃들리.」
‘그……?’
다소, 아니, 상당히 오만하고도 자신감에 차 있는 말이었다.
‘초대 어둠의 정령사를 말하는 건가?’
디아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책장을 넘겼다. 이후로 적힌 것들은 다양한 실험에 관한 이야기였다.
핀들레이 공작은 어둠의 정령을 만들어내기 위해 정말 부단히도 노력했다.
「어둠 속성 정령의 힘은 마물을 닮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물이 특정 조건에서 어둠 속성 정령이 되는 것 아닐까?」
「고통 속에서의 각성을 전제로 실험 진행. 실패.」
「앞선 실험이 실패하고 남은 부산물로 정령의 형태를 만들어 보려 함. 실패. 단, 기존 마물의 신체 일부를 다른 마물과 교체하는 실험은 성공.」
「‘재조립’한 마물 중 몇이 발작을 일으킴.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고 능력도 변이됨. 몇 가지 실험을 더 거친 결과, 타 마물의 체액이 몸 안에 침범하면 그중 일부가 변이를 일으키는 듯.」
「변이 마물을 연구하던 연구원 몇이 사망. 변이 마물로부터 신규 독성 추출.」
하지만 공작은 정작 원하는 것을 만드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마물을 뒤틀고 재조립해 더 강한, 더 기괴한 마물을 만들어내는 방법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마물을 다시금 짓이겨 만들어낸 독. 그것이 엘리엇을 중독시켰던 독의 정체였다.
‘……결국 어둠 속성 정령의 존재 자체를 증명할 만한 기록은 없네.’
이후 연구 일지를 끝까지 살폈지만, 변이 마물 중 하나가 알을 낳아 그것을 관찰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마지막이었다.
이 일지를 통해 증명되는 것은 핀들레이 공작의 선조로부터 전해진 ‘말’뿐이니 증명이 되어 주지는 못한다.
그 부분은 아쉽지만, 핀들레이 공작의 실험과 케이든의 누명은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디아나는 여전히 거품에 휩싸여 있는 알을 힐끔 일별하고 일지와 기타 자료를 챙겼다.
디아나가 연구실 수색을 끝마쳤을 때쯤 반대쪽을 수색하던 케이든이 곁으로 돌아왔다. 그도 종이 뭉치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모은 증거들을 서즈필드 자작이 준, 내부가 겉모습에 비해 월등히 넓은 가방에 쑤셔 넣었다.
“시간이 꽤 지났어. 나갈 때는 어느 정도 기사들과 맞부딪쳐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네. 그리고 저 알, 혹시 공작이 이렇게 제멋대로 굴기 시작한 게 저것 때문일 지도 모르니 부수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케이든이 가방의 입구를 매듭짓는 동안, 디아나는 중앙의 원통 앞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관찰하니 알에서는 미약한 박동이 느껴졌다.
‘정령의 기운은…… 아니야. 그렇다면 마물이겠지.’
디아나가 약간의 죄책감을 애써 지우며 손을 휘두르려던 때였다.
쿵-
묵직한 소리가 케이든과 디아나가 들어온 통로 쪽을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두 사람에 귀에 닿는 것과 동시에, 통로에서 검은 복면 일색의 누군가 튀어나왔다.
“……!”
케이든과 디아나, 그리고 낯선 침입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직후, 머리로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케이든과 디아나는 본능적으로 능력을 사용해 침입자의 입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침입자 역시 정령사인지 제 능력을 이용해 매섭게 날을 세웠다.
쩌엉-!
케이든이 휘두른 검과 침입자가 휘두른 검이 부딪히며 굉음을 냈다. 케이든은 눈을 부릅떴다.
‘막았어?’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현재 발하나스 제일의 검사이자 제이의 정령사인 케이든의 검을 막았다.
그만한 실력자는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대부분 황궁에 속해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케이든이 아는 이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마주한 이에게서는 달갑지 않은, 그러나 더없이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케이든이 상대의 기운이 익숙한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상대 역시 케이든을 눈치챘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1황녀……?”
“……3황자?”
케이든이 복면인의 움직임을 막은 사이, 상대의 팔다리를 부러트리려던 디아나가 그 말에 놀라 멈춰 섰다. 1황녀라면.
‘레베카?’
경악할 틈도 없이, 찰나의 틈 사이로 소란이 불쑥 가까워졌다.
“……입자다! 아래로 내려갔다!”
“젠장, 상대는 하나뿐이야! 막아라!”
케이든과 디아나는 무프의 결계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이곳까지 내려올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레베카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케이든!”
추적자들이 코앞까지 왔음을 직감한 디아나는 지체하지 않고 케이든에게 손을 뻗었다.
케이든은 재빨리 정신을 차려 레베카를 튕겨내고 디아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딜……!”
레베카는 그들을 잡으려 했으나, 간발의 차로 두 사람의 모습이 지워지듯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것이 모습을 투명하게 만드는 결계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레베카는 두 사람이 눈 깜박할 새 이동한 줄 알고 당황해 멈춰 섰다.
동시에 연구실 안으로 공작의 심복들이 달려 들어왔다.
“저기 있다!”
“잡아!”
“젠장…….”
결국 레베카는 나직이 욕지거리를 지껄이더니 심복들을 향해 매섭게 불꽃을 날려댔다. 그리고 종내에는 그들 모두를 가까스로 쓰러트리고 도망쳤다. 달아나는 그녀의 뒤로 핏자국이 점점이 이어졌다.
숨어서 기척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디아나와 케이든이 혼란스럽게 시선을 마주했다.
‘대체…….’
레베카는 핀들레이 공작의 손녀이자, 그의 지지를 받는 황녀였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불청객 같은 모습으로 이곳에 스며든 것인가. 꼭 그들처럼.
그때 일전에 들었던 보고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쪽은 3황자 전하의 수하들, 그리고…… 다른 한쪽은 1황녀 전하의 수하들이었습니다.]
설마…….
‘……1황녀는 공작의 실험에 대해 모르고 있던 건가?’
하지만 답을 줄 수 있는 이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만이 화염과 함께 연구실을 떠돌았다.
* * *
늦은 밤.
“젠장…….”
레베카는 소파에 엎드린 채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루드비히는 붕대를 갈아주다가 말고 들려온 신음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곳은 1황녀 레베카의 방이었다. 미약한 촛불이 간신히 어둠을 몰아내 주변의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주홍색 불빛에 레베카의 몸 곳곳에서 번지는 피가 선명히 비쳤다.
루드비히는 결국 붕대를 든 손을 툭 떨구었다. 그가 한없이 덤덤하게, 그래서 외려 더 무겁게 입술을 달싹였다.
“왜…….”
“…….”
“왜 제게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작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
“그랬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텐데요.”
루드비히가 시선으로 답을 채근했으나 레베카는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오만상을 찌푸린 채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을 따름이었다.
제 시선을 피하는 레베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결국 한숨과 함께 일어났다.
그는 피가 묻은 붕대, 그리고 피가 스며들어 붉어진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일어났다.
“……우선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루드비히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레베카는 문이 탁,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나자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내가 먼저 찾아야 했는데.’
황제가 살해당했고, 그 원인은 1황자 엘리엇 때와 같은 독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인이 핀들레이 공작인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레베카는 제게 한마디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인 그에게 매섭게 화를 냈다. 하지만 공작은 온기 한 점 없이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이제 전하께서는 더 기다릴 필요 없이 황위에 오르실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그 말에, 레베카는 더는 핀들레이 공작이 제멋대로 굴도록 놔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는 그가 저를 위해 해온 일이 있어 섣불리 나서지 않고 지켜보았지만. 노망난 개는 결국 주인을 무는 법이니까.
레베카는 핀들레이 공작의 비밀을, 그 비밀에서 풍겨오는 짙은 피비린내를 두고 보지 못하고 결국 그의 성에 숨어들었다.
행여 제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있다면 손수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레베카는 예상치 못한 이들을 만났다. 3황자, 그리고…….
‘……정령사가 맞았군.’
3황자의 손을 잡고 사라지던 3황자비.
레베카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래.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기묘한 균열은 3황자비, 디아나 서즈필드가 그녀의 인생에 나타난 순간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