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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130/145)

130화

몸을 숨길 장소가 결정된 후, 디아나 일행은 3황자궁의 비밀 통로를 이용해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케이든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안 보인다니. 그건 그렇고 디아나, 괜찮아?”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시선을 내렸다.

케이든의 품에 안겨 있는 디아나는 조금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은요. 이렇게 많은 인원의 모습을 감춰본 건 처음이라 그래요. 그래도 기척까지 감춰지지 않으니까 다들 조심하세요.”

“……알았어.”

디아나를 안은 케이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의 목을 끌어안은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을 끌수록 디아나의 몸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케이든은 최대한 빠르게 서즈필드 자작저까지 이동할 것을 다짐했다. 그가 다른 이들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황궁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다들 알아서 따라붙어. 뮈젤, 자작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일행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케이든은 말없이 땅을 박찼고, 벨라와 뮈젤, 서즈필드 자작이 그 뒤를 따랐다.

다행히 3황자궁에서 황궁 뒷문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게다가 디아나의 대응이 빨랐고, 엘리엇과 플뢰르가 눈치껏 기사들을 붙잡아둔 덕분에 아직 뒷문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다.

케이든은 디아나를 안은 채 조심스럽게 발끝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그가 막 황궁 밖에 한 발을 내디디려는 차였다.

쇄액-!

“……!”

등 뒤로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로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케이든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기울여 날아드는 화살을 피해냈다.

팍!

화살이 케이든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문에 박혔다. 그 반동으로 나무 문이 덜컹거렸다.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려는 자작의 입을 뮈젤의 손이 번개처럼 틀어막았다.

‘뭐지?’

케이든은 당황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뮈젤 역시 경계심을 바짝 세운 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부스럭-

그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기만 하던 근처의 나무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언뜻 들으면 바람 소리처럼 느껴지는 속삭임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상하네. 바람이었나?”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언뜻 검은 옷 일색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라 들뜬 건 알겠지만,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 지금 근처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들킬 뻔했잖나.”

“죄송합니다…….”

“기억하게. 우리의 임무는 사살이 아니라 포획이라는 걸.”

“예, 선배님.”

“쯧. 3황자가 숨겨 둔 정령사가 또 있을 거라니……. 어디서 갑자기 안타르인지 뭔지 하는 중급 정령사 놈을 데려왔을 때도 놀랐는데, 정령사가 땅에서 솟아나는 존재도 아니고…….”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인기척이 다시 씻은 듯 사라졌다. 조금 전 화살로 인해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지 않았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한 은신술이었다.

‘포획이라니, 설마…….’

케이든의 시선이 무의식중에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그를 바라보고 있던 디아나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디아나는 입술을 깨물며 케이든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요.’

디아나의 입 모양을 읽어 낸 케이든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기사들이 뒷문을 통제하러 오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황궁을 벗어났다.

* * *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케이든 일행이 서즈필드 자작과 함께 자작저에 도착했을 때. 자작 부인은 언질 받은 바가 없음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고 깍듯이 일행을 맞이했다.

디아나는 지금껏 늘 벌레를 보듯 저를 바라보던 자작 부인의 그런 태도에 조금 어색해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케이든과 함께 안쪽 방으로 향했다.

자작 부부가 3황자 부부에게 내어준 곳은 서즈필드 자작저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입구가 이중으로 감춰져 언뜻 밀실 같은 방이었다.

덕분에 밀라드의 죽음 이후, 자작저에 남은 몇 안 되는 사용인들도 은밀한 손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최대한 막아보겠지만, 근위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은 되도록 이곳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이 방구석 바닥에 나 있는 네모난, 상자 뚜껑처럼 보이는 문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쪽 바닥의 문을 열면 식료품 창고의 위쪽 천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니, 먹을 것은 그쪽으로 조용히 빼돌리시면 됩니다. 그 외에 제게 할 말이 있을 때는 저쪽의 줄을 빠르게 세 번 당기시면 되고요.”

자작은 이외에도 몇 가지 당부를 남기고 사라졌다. 뮈젤과 벨라는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것을 찾아보겠다며 식료품 창고로 내려갔다.

케이든과 디아나는 곧장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며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디아나가 어두운 낯으로 입술을 지그시 당겨 물었다.

“아마 위버 공작님을 비롯한 귀족들은 우리의 실종이 핀들레이 공작 탓이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 황제 시해 죄를 이쪽에 덮어씌우려 했다고 주장하시겠죠. 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예요.”

“그래. 나오기 전에 3황자궁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가짜 증거를 챙겨 나왔으면 모를까, 결국 찾지 못하고 몸을 피해야 했으니까.”

케이든이 한숨처럼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이 황제를 시해했다고 주장하는 1황녀 파. 그리고 핀들레이 공작이 케이든을 시해했다고 주장하는 3황자 파.

그 둘의 대립은 오래지 않아 1황녀 측으로 승리의 추가 기울어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나가 말했듯,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독을 유일하게 발견해낸 것은 케이든으로 알려져 있고 심지어는 지금쯤 핀들레이 공작이 숨겨두었을 가짜 증거마저 발견되었을 테니까.

‘완벽한 명분은 아니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이라는 게 문제야.’

이렇게 된 이상 케이든과 디아나가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핀들레이 공작이 그 독을 연구 및 제조했다는 증거를 찾는 것. 거기에 그가 변종 마물까지 만들어냈다는 증거도 찾아낼 수 있다면 더 좋고.

‘독…….’

현 상황에서 증거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핀들레이 공작이 엘리엇에게, 그리고 황제에게 쓴 독의 정체.

어둠 속성 정령과 언뜻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그러나 더없이 불길한 그것.

디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하죠. 제가 엘리엇 전하께서 중독되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건, 전하에게서 어둠 속성 정령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공작은…….”

“……마물로 연구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었지. 평범한 마물을 변종 마물로 만드는 연구를.”

“네. 그리고 아까 복면인들의 말도 그렇고. 혹시 공작이 원하는 건…….”

디아나는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 자신이 입 밖으로 내뱉으려는 말이 너무도 불길해 차마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에는, 모든 단서가 정확히 한 방향을 가리고 있었다.

케이든이 나지막이 디아나 대신 말을 맺었다.

“……어둠 속성의 정령.”

“…….”

“확실히, 어둠 속성 정령들은 마물과 비슷해 보이는 구석이 있지.”

케이든이 탄식했다.

“그 미친 작자는…… 어둠 속성 정령에 관한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물을 연구해서 어둠 속성 정령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나 보군. 설마 저번 토벌에서 내 주위에 어둠 속성 정령사가 있음을 눈치채고 감시하던 건가?”

“네. 아무래도…….”

케이든의 말로 인해 제 생각이 막연한 추측이 아님을 확인받은 디아나가 끝내 탄식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손톱 옆의 살을 물어뜯었다. 생각이 극도로 많아질 때 나오는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케이든이 그런 디아나의 손을 감싸 쥐어 잡아당겼다. 그가 그녀의 손끝에 자잘하게 입 맞추며 부드럽게 만류했다.

“피 나잖아.”

“아…….”

“그대를 깨물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뒷말만 안 했더라면 고마워했을 텐데요. 이 변태.”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를 웃게 하는 이 남자가 어쩔 수 없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디아나는 제 손끝에 연신 입 맞추는 케이든을 내버려 두며 간지럽다고 키득댔다. 물론 그것도 그의 입맞춤이 다분히 불순해진 순간에 그쳤다.

케이든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순순히 디아나에게서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곧 진지해졌다.

“그런데 증거를 어디서 찾지? 이미 공작의 뒤에 사람을 붙여 보았지만, 특별히 뭔가를 발견하지는 못했어. 꼬리를 잡았다 싶은 곳에 쳐들어 가봐도 이미 내뺀 후였고…….”

케이든이 혀를 쯧 찼다. 지금으로서는 공작을 조지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어둠 속성의 정령을 입증할 증거라도 찾아낸다면 모르겠지만 당장은 요원해 보이니…….

그가 고민에 잠겨 있을 때였다. 마찬가지로 고민하던 디아나가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녀가 조금 환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움을 청할 만한 분이 있어요.”

* * *

그리고, 다음 날.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고 말해줄 참이었는데, 어디로 내뺐나 했더니.”

4황비 미애나는 보랏빛 편지를 목에 매달고 찾아온 무프의 턱을 간질이며 담배 연기를 후, 뿜었다. 그리고 깃펜을 들어 휘갈기듯 답신을 적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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