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45)

129화

“전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서즈필드 자작께서 찾아오셨는데요.”

디아나는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 소리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가, 이내 작게 탄식했다.

‘마음을 정했구나.’

사실상 레베카가 밀라드를 끊어낸 이상, 서즈필드 자작이 구태여 그녀를 지지할 이유는 없긴 했다.

그러나 원래 모든 일은 확실한 게 가장 좋은 법이다. 자작이 케이든을 지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니 다행이었다.

“곧 나갈…… 윽.”

디아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어깨를 가볍게 미는 손길에 의해 베개에 풀썩 등을 기대게 되었다.

청보랏빛 눈을 몇 번 깜박인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케이든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나가볼게. 쉬고 있어.”

“그래도…….”

“힘들잖아.”

정작 그 말을 꺼낸 이가 힘듦의 원인이긴 하지만 디아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온몸이 뻐근한 동시에 녹진녹진해 움직이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결국 디아나는 한숨과 함께 몸에서 힘을 풀었다. 베개에 깊숙이 몸을 기댄 그녀가 제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줘야 해요.”

“당연하지.”

케이든은 대답과 함께 디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에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디아나의 주변에 남은 것은 고요뿐이었다.

어쩐지 옆자리가 지독하게 싸늘하게 느껴졌다.

‘……나도 참 중증이지.’

케이든과 이렇듯 한 몸처럼 붙어 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헛헛할 일이던가.

디아나는 자신의 상태가 우스워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눈꺼풀이 점차 묵직해졌다.

“졸려…….”

그렇게 몸의 힘이 풀리고, 의식이 막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던 차였다.

삐익! 삑!

“……응?”

자그마한 소음이 디아나의 의식을 강제로 끄집어냈다. 그녀는 미약하게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에 미간을 찡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디아나는 이불 위에서 안간힘을 쓰며 분홍빛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검은 공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황궁의 동태를 살피도록 지시해둔 아이였다.

“힐라사?”

삐이이익!

힐라사가 신경질을 내듯 길게 울고는 이불 위에서 방방 뛰었다.

디아나는 급하게 힐라사에게 마력을 한 뭉텅이 떼어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러나 힐라사는 드물게도 마력을 무시하고 곧장 디아나의 손끝에 양손을 올렸다.

힐라사가 보고 들은 것들이 고스란히 디아나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하! 정신 차려보십시오!

-어찌 이런……!

-지금 당장 ……를…….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손끝을 뒤로 물렸다. 지나치게 놀란 나머지 온몸이 빳빳이 굳는 느낌이었다.

삐이익!

힐라사는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디아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부들댔다.

그 움직임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가 곧장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서즈필드 자작의 방문으로 벨라가 다른 사용인들을 미리 내보내 둔 덕에 행동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벨라! 뮈젤!”

디아나는 노크도 없이 그녀의 옆방 문을 당겨 열었다. 그곳은 벨라가 황궁에서 머물 때 사용하는 방이었다.

“전하?”

“수장님?”

그 안에 있던 벨라, 그리고 하인으로 변장하고 있던 뮈젤이 의아하게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디아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확인한 즉시 얼굴을 굳혔다.

디아나는 전에 없이 싸늘한 얼굴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둘 다 3황자궁에 둔 중요한 물건이나 서류 있으면 당장 챙겨. 그리고 곧장 응접실로 와.”

“네?”

“그게 무슨…….”

“서둘러. 시간이 없어.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해줄게.”

디아나는 그 말만을 남기고 재빨리 몸을 돌려 응접실로 뛰어갔다. 가벼운 실내용 드레스 자락이 숄과 함께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처럼 흩날렸다.

복도에 난 창으로 바깥을 힐끔 내다보자 저 멀리서 가까워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벌써……!’

디아나가 이를 악물었다. 청보랏빛 눈에 단호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응접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 앉아 있던 케이든과 서즈필드 자작이 놀라 뒤를 돌았다.

“디아나? 왜 쉬지 않고.”

케이든이 의아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디아나는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케이든, 피해야 해요.”

“그게 무슨…….”

“황제 폐하께서 독살당하셨어요. 그 독은 엘리엇 전하께서 당하셨던 것과 같은 종류이고, 핀들레이 공작은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던 그 독을 찾아냈던 당신이 범인이라 주장하는 모양이에요.”

“……뭐?”

서즈필드 자작과 케이든이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두 사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디아나가 힐라사를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별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수장님!”

때마침 등 뒤로 벨라와 뮈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역시 창밖으로 바깥을 확인했는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창을 통해 내다보니 1황자 내외께서 병사들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방금 저희가 들은 게 사실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뮈젤이 낭패 어린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발하나스 최고의 정보 길드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윙즈의 부길드장이었다. 하지만 윙즈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힐라사처럼 사건이 벌어지는 즉시 소식을 전해줄 수는 없었다.

디아나는 굳은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엘리엇 전하께서 중독되셨던 일도 공작의 짓이라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아니에요. 명분이 너무 그럴듯해서…….”

디아나의 목소리에 죄책감이 아른거렸다. 애초에 그녀가 어둠 속성의 정령사라서 그 독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이렇게 복잡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케이든이 디아나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들었다. 그녀가 놀라 고개를 들자 그가 심지 곧은 눈빛으로 말했다.

“디아나. 이건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

“그러니 자책 말아. 나는 그대 덕에 형님을 살릴 수 있었음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케이든이 말끝에 싱긋 웃었다. 디아나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흐린 미소를 흘렸다.

케이든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 내 죄를 주장할 정도라면 벌써 3황자궁 어딘가에 독을 숨겨뒀겠군. 황후 폐하와 형님께서 계시는 한 사형당하진 않겠지만, 지금 붙잡혔다가는 공작이 증거를 처리하기 전에 물증을 잡아내는 데 제약이 생길 테니…….”

“네. 그러니 당장은 도망치고, 최대한 빠르게 공작의 짓이라는 걸 밝혀낼 증거를 찾는 편이 나아 보여요. 그런데 어디로 가야…….”

디아나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윙즈 본부로 몸을 피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부근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경비대도 자주 드나들고…….’

윙즈 본부가 있는 곳은 뒷골목. 온갖 범죄자가 드나드는 곳이다. 그런 그들이 황궁에서 수배된 죄인을 발견하면 함구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곳이 적당한데, 문제는 당장 몸을 숨길만 한 장소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서즈필드 자작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제 저택으로 가시죠.”

“……자작님?”

디아나가 놀라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케이든이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디아나의 친정인 자작의 저택은 수색 1순위일 텐데.”

“그 부분을 노리는 겁니다. 너무도 빤한 선택지이니 오히려 시간을 벌 수 있겠지요. 게다가 고작 며칠 전에 후계자를 잃은 가문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오지는 못할 테지요.”

상복을 입고 있는 자작이 덤덤히 말을 맺었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자작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아무리 부모를 해치려 한 자식이지만 얼마 전에 가족을 잃은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괜찮을지 조금 염려되었다.

자작은 두 사람의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본 듯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1황녀와 그 세력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제겐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케이든과 디아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이 무거운 목소리로 냈다.

“가지, 자작저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