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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128/145)

128화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가.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3황자비 전하.”

루드비히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손등에 키스할 수 있도록 손을 달라는 뜻이었다.

잠시간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디아나가 그를 따라 하듯 빙긋 웃으며 양산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양산이 조금 무겁네요. 후작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루드비히의 어깨가 슬쩍 굳었다. 당황했는지 눈을 한번 깜박인 그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며 상체를 바로 했다. 조금은 느릿하게 입술이 움직였다.

“……그렇군요. 어쩐 일로 시녀조차 대동하지 않으셨습니까.”

“케이든이 볼일을 마치면 이곳으로 데려와 달라고 보내놓은 참이에요. 후작께서 때를 못 맞추셨네요.”

“3황자 전하의 볼일이라…….”

루드비히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궁 저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역시 탑에 연금되어 있는 2황녀 전하를 만나러 가신 것일까요? 제가 아는 3황자 전하라면 서즈필드 영식의 사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분을 설득하려 하실 테니까.”

“…….”

순간적으로 디아나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났다. 하여간 한결같이 눈치 빠른 작자였다. 그녀는 가까스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티 나지 않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루드비히가 불쑥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살려드릴까요?”

“……네?”

디아나는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반문이 튀어 나갔다.

루드비히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자못 상냥한 손길로 디아나의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겨 주며 속삭였다.

“저는 서즈필드 영식의 사형 날짜를 확정하기 위해 재판장을 만나러 온 참입니다.”

“…….”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고 한들 나름 남매인데, 전하께서도 마음이 영 좋지만은 않으시겠죠.”

“…….”

“전하께서 ‘살려달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영식이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 간청해 보겠습니다.”

흡사 뱀과도 같은 속삭임이었다. 루드비히는 먹잇감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눈을 길게 접어 디아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참 신기해.’

루드비히는 문득 속으로 생각했다. 그를 마주하고 있는 청보랏빛 눈은 고요했다.

루드비히는 본디 시선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속내를 짐작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디아나의 속내는 잘 읽어낼 수 없었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리만큼 담담한 눈빛의 조합이 기이했다.

루드비히의 제안을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 침묵하던 디아나가 입술을 뗐다.

“……그러면, 저는 그 대가로 뭘 드려야 하나요?”

“아주 간단한 거면 됩니다.”

루드비히는 그리 답하며 시선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그의 눈이 연분홍빛 입술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본 디아나가 끝내 작게 실소했다. 그녀가 상냥한 부름을 뱉었다.

“카드몬드 후작.”

“예, 3황자비 전하.”

“헛꿈 꾸지 마세요.”

“……예?”

루드비히는 이번에야말로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인지부조화가 올 정도였다. 달짝지근한 목소리에 전혀 그렇지 못한 말이라니.

그러거나 말거나 디아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칼같이 말을 이었다.

“후작은 본인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제게는 아니에요.”

“…….”

“그러니 괜히 가망 없는 일에 기운 빼지 마시고, 후작 때문에 가슴을 앓는 영애들을 더 세심히 살펴주시는 편이 보람차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

루드비히는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모습에 디아나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런 기색을 아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이후로도 한참이나 웃어젖히던 루드비히는 간신히 진정했다.

그는 여전히 미소가 서린 입가를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곤란한데요.”

“…….”

“그런 말을 들으니 정말로 가망 없는 상대에게 목매고 싶어지잖습니까.”

연푸른 눈에 전에 없던 기묘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디아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잘 조리해 놓은 먹잇감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뭐랄까…….

‘……변태였나.’

진정으로 ‘열망’하는 사람을 보는 듯한 기색이었다.

디아나는 입 안으로 혀를 찼다. 회귀 전의 루드비히는 여자라고는 일절 가까이하지 않았기에 그가 거절당할수록 흥미로워하는 변태임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로써 루드비히가 의도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하고 있었다는 점은 확신했다.

아무래도 케이든과 저를 갈라놓고 싶은 모양이지.

필요한 걸 알아냈으니 그와 굳이 더 얼굴을 맞댈 필요는 없다. 디아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루드비히가 생글생글 미소 짓는 얼굴로 재빨리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어디 가십니까?”

“제가 갈 곳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겠어요?”

“바래다 드리겠…….”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왔으니까.”

디아나는 루드비히와 실랑이하느라 코앞까지 다가온 기척을 뒤늦게 눈치챘다. 루드비히 역시 놀란 기색이었다.

단단한 팔이 순식간에 디아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안정감 있는 품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디아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은 케이든이 루드비히를 향해 사납게 웃어 보였다.

“호의든 흑심이든 거절하지. 나는 버젓이 아내의 곁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내에게 에스코트를 맡길 만큼 모자란 인간은 아니어서 말이야.”

* * *

루드비히는 케이든이 나타나자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인사하고는 순순히 물러났다.

확실히 내치기는 했지만, 루드비히의 눈에 순간적으로 비쳤던 열기 때문에 디아나는 조금 찜찜했다. 그러나 케이든은 디아나가 찝찝함을 곱씹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침대에서 다른 남자 생각이라니. 좀 너무하지 않아?”

“아. 그게 아니라, 읏…….”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귓가가 따끔했다. 디아나가 반사적으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의 위에서 그녀의 귓가를 잘근거리던 케이든이 뚱한 얼굴로 팔에 힘을 풀었다.

그 바람에 그의 묵직한 몸에 짓눌리게 된 디아나가 몸을 뒤틀며 칭얼거렸다.

“무거워요.”

“무거우라고 그러는 건데.”

“……심술쟁이.”

“섭섭하네. 제대로 심술 한번 부려봐?”

“이번에는 손등에 인사하는 것도 허락 안 했단 말이에요…….”

“저번에 끼 부릴 때는 손등에 입 맞췄다는 소리야, 그거?”

“…….”

“그 자식이 진짜…….”

케이든이 이를 뿌득 갈았다. 무거운 것도 무거운 건데, 그가 몸에 힘을 줄 때마다 근육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 썩 곤혹스러웠다. 디아나가 바둥거렸다.

“카드몬드 후작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는 건 좋은데, 좀 내려가서…… 흡.”

불평을 토하던 입이 순식간에 가로막혔다. 그 틈으로 말캉한 살덩이가 침범했다.

“흐…….”

호흡이 순식간에 다시 가빠졌다. 분명 입맞춤일 뿐인데도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디아나가 숨을 할딱이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케이든은 한참 만에 입술을 뗐다. 그가 이를 살짝 세워 디아나의 아랫입술을 장난치듯 깨물었다. 정염으로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이름으로, 안 불렀잖아요.”

“몰라. 아무튼 생각도 하지 마. 질투 나니까.”

“억지…….”

“그래서 싫어?”

케이든은 보란 듯이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타고난 얼굴 자체가 아름답다 보니 그조차 어울렸다.

디아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툭 쳤다. 그리고 팔이 찌르르 울리는 고통에 곧장 후회했다. 까불지 말걸…….

“……자꾸 저 떠보지 마세요. 어차피 뭐라고 대답할지 다 알면서.”

“들어도, 들어도 좋으니까 또 듣고 싶은 거지.”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디아나는 케이든의 능청맞음을 이기지 못하고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디아나의 기분이 풀린 것을 확인한 케이든의 손이 다시 슬슬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그것을 눈치챈 것은 이미 그에게 손목을 붙들린 후였다.

결국 디아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케이든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손에 씻김 당하고 함께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벨라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들렸다.

“전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서즈필드 자작께서 찾아오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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