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45)

127화

“오랜만입니다, ……누님.”

“…….”

카를롯타는 그 인사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와 그는 아주 오랜만이라고 답하기도, 그렇다고 당장 나가라고 윽박지르기에도 애매한 사이였으니까.

그녀는 난감하게 입술만 달싹이다가 결국 작게 물음을 내뱉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설마 내 처분이 결정된 걸까.

카를롯타는 입 밖으로 물음을 내뱉는 순간 직감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추측에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녀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괜찮아.’

카를롯타는 그동안 이 감옥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최후를 상상했다.

그녀는 제 상상 속에서 이미 수십 번 죽임당한 후였다.

그러니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있었는데…….

“……사형이 결정되었습니다.”

쿵.

막상 케이든의 입으로 제 끝을 선고받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카를롯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그녀는 겸허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 자신도 예상했듯, 아무리 음모를 주도하지는 않았다고 한들 황위 계승에 위협이 되는 이를 굳이 살려둘 이유는 없으니까.

만약 그녀가 케이든이었더라도 자신을 죽여 경쟁자를 없앴을 것이다.

카를롯타가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덤덤하게 “그렇구나”라고 답하려던 차였다.

“서즈필드 영식이요.”

“……뭐?”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그득 메우고 있던 말들이 모조리 날아갔다.

일순 저도 모르게 턱을 떨군 카를롯타가 직후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 서즈필드 영식이라면 1황녀 전하의 약혼자 아니야?”

“예. 그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왜…….”

“제 친부를 살해하려 들었다가 실패했거든요. 아마 1황녀 전하께서 의도하신 바겠지요. 서즈필드 영식이 자작의 살해에 실패하자마자 약혼을 파기하고, 그 누구보다 앞장서 영식의 사형을 주장하셨으니까.”

케이든은 이제 더는 레베카를 겉치레로나마 ‘누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말을 내뱉는 그의 눈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 싸늘한 위압감에, 카를롯타는 무의식중에 어깨를 움츠렸다. 한편으로는 왜 저런 소식을 제게 전해주나, 싶기도 했다.

‘설마 나도…… 그와 나란히 사형당하게 될 거란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

그사이 케이든이 경비병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경비병이 밖에서 낡은 가죽 자루를 들고 왔다.

입구가 단단히 동여매진 가죽 자루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허리께까지 올 정도로 컸다.

케이든이 그것을 카를롯타의 발치에 내려두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

“1황녀 전하께서 누님을 죽이기 위해 보냈던 독, 암살자들의 머리 등이 담긴 자루입니다.”

카를롯타의 얼굴에서 혈색이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녀가 막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을 때, 그녀조차 모르는 새에 코앞까지 죽음이 다녀갔다니. 뒷덜미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물론 레베카의 성정을 생각하면 예상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

카를롯타는 주춤 등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그래봤자 의자 등받이에 더욱 깊숙이 몸을 기대는 꼴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카를롯타는 꾹 다문 입술 새로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케이든이 답했다.

“오늘 이렇게 누님을 찾아온 것은, 밀라드 서즈필드 영식의 재판이 진행되는 사이 누님의 처분에 관한 논의도 끝났기 때문입니다.”

역시 본론은 저것이었나 보다. 카를롯타는 초조한 심정으로 케이든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카를롯타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조용하지만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로 떨어졌다.

“살고 싶으십니까?”

카를롯타의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다. 안 그래도 그의 말을 기다리느라 잔뜩 예민해진 그녀가 울컥해 날카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하면 살려줄 거니?”

비아냥이 다분한 어조였다. 카를롯타는 뒤늦게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를롯타가 불안하게 케이든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동요 한 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려드리겠습니다, 누님께서 원하신다면.”

“……!”

“단, 황위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신다면요. 그렇게 하신다면 1황녀 전하의 손에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조용한 곳으로 내려가 살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여러 조건이 붙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믿기지 않을 만큼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진짜일까?’

하지만 카를롯타는 케이든의 말을 쉬이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1황녀의 앞잡이로 그를 핍박해온 세월이 어디 짧던가.

하지만 카를롯타를 응시하는 케이든의 눈빛은 그저 곧았다. 경멸도, 불쾌함도 없이 그저 고요했다.

처음 케이든을 괴롭히기 시작했던 것은 레베카의 명령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를롯타는 어느 순간부턴가 저 눈빛이 싫어 자발적으로 그를 괴롭혔다.

자신의 추악한 민낯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눈. 아무리 짓밟고 꺾으려 애써도 꺾이지 않던 저 눈.

하지만 외려 지금은 자신이 그토록 없애려 애썼던 맑은 눈빛이 기묘한 믿음을 주었다. 우스울 따름이었다.

한참의 침묵 후. 카를롯타의 입술이 무겁게 들렸다.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면 된다고 했지?”

* * *

한편. 디아나는 케이든이 카를롯타를 찾아간 틈을 타 밖으로 나왔다. 그가 시도 때도 없이 들러붙는 통에 자의 반, 타의 반인 감금 생활을 한 지도 벌써 며칠째였다.

‘영영 해를 못 보는 줄 알았네.’

케이든과 함께하는 시간은 물론 좋았다. 다만 그와 함께하지 않는 시간에는 체력이 부족해 까무룩 기절하고, 깨어나면 그가 곁에 있어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디아나는 오늘 케이든이 카를롯타를 만나기 위해 떠난 후, 벨라에게 부탁해 억지로 의복을 갖추고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나올 때까지는 당장에라도 방에 돌아가 침대 위에 쓰러지고 싶었는데, 막상 나오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디아나는 이 김에 조금 더 햇살을 만끽하고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정원을 다시 돌기 시작했다.

멍하니 걷고 있자니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차올랐다. 디아나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사형이라.’

수도로 복귀하던 중에 밀라드가 서즈필드 자작을 살해하려 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레베카는 곧장 그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황궁에 발을 들이자마자 루드비히를 앞세워 그의 사형을 주장했다.

그래도 한때는 레베카의 약혼자였던지라 눈치를 보던 황궁 관료들은 그녀의 태도에 조금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별말 없이 밀라드의 사형을 결정 지었다.

그 소식이 퍼져나가자, 일부 귀족들은 디아나에게 상심이 크겠다며 위로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디아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분명 결혼 전, 밀라드에게 레베카를 조심하라고 친히 경고도 해주었다.

그것을 무시하고 결국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끈 것은 밀라드였다.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

‘자작은 어떻게 나오려나.’

서즈필드 일가에 대한 디아나의 관심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서즈필드 자작이 이 일을 계기로 레베카에게 복수하기 위해 케이든의 손을 잡을 것인지, 아닌지.

‘원래라면 이번 일로 죽어야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반응이 예상이 가지 않네…….’

디아나는 혀를 찼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고 그녀가 기억하는 미래를 토대로 무언가를 바꿔나갈수록 알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늘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무엇보다 값진 사람과 손을 맞잡을 수 있었으니까.

‘케이든도 슬슬 볼일을 마쳤으려나?’

시간을 가늠해보던 디아나가 케이든과 함께 3황자궁으로 돌아갈까, 하며 몸을 돌리던 때였다.

저 멀리, 마차에서 내려 정원을 가로지르던 누군가가 그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디아나가 상대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가 지척까지 다가온 후였다.

루드비히 카드몬드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곱게 눈을 휘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가.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3황자비 전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