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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145)

122화

이윽고 약이 서즈필드 자작의 목구멍을 타고 남김없이 사라졌다.

밀라드는 빈 그릇을 회수해 쟁반 위에 얹었다.

자작이 베개를 정돈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는 하품을 한번 하고 밀라드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만…… 가보아도 좋다. 오늘도…… 고맙구나.”

“아닙니다. 잠드시는 것까지 살펴야죠.”

“허허.”

밀라드가 그림 같은 미소를 띤 채 응수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효자이자 후계자의 모습이었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을 넘겨주어도 손색이 없겠구나.’

서즈필드 자작은 그 대답에 감명받아 그에게 서랍 안을 열어보라고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입술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입술에 실로 추를 매달아 놓은 듯한 느낌.

자작은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약의 부작용인가?’

그동안 매일 먹어오던 약이긴 하나, 약도 사람의 몸 상태에 따라서 그 효과가 달라지는 법 아니던가. 혹시 저나 주치의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부작용일 수도 있었다.

서즈필드 자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밀라드가 자리를 떠나지 않아 망정이지, 혼자였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자작은 침대 곁에 선 밀라드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쇳소리 같은 음성이 색색 힘겹게 새어 나왔다.

“밀, 가, 가서 주치의를…….”

하지만 자작의 손끝이 밀라드의 소매에 닿기 직전. 밀라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

동시에 자작은 저를 내려다보는 아들의 눈이 시리도록 무감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뭐, 무, 무슨.”

자작은 충격에 눈을 부릅뜨고 더듬거렸으나 더는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고목처럼 뻣뻣이 굳어 가는 느낌이었다.

“흐음.”

그때 밀라드가 비음을 흘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는 제게로 뻗어지다가 돌처럼 굳어진 자작의 손을 손끝으로 툭 건드려보더니 히죽 웃었다.

다정하고 선량하던 얼굴이 한순간에 악귀처럼 바뀌었다.

“약효는 확실하군. 역시 반평생을 충성한 사람보다는 돈이 더 중요한가 봐요.”

‘주치의……!’

그 말로 인해 주치의가 매수당했음을 깨달은 서즈필드 자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밀라드는 느긋이 서즈필드 자작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베개를 빼냈다. 그 동작이 한없이 우아하고 정갈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제가 끝까지 잘 돌봐드릴 테니까요. 뭐, 애초에 아버지가 1황녀 전하를 선택한 저를 믿어주셨다면 이럴 일 자체가 없었겠지만.”

“…….”

“독살은 너무 티가 나기도 하고, 아버지께서도 많이 아프실 테니까. 최대한 편한 방법으로 보내드릴게요.”

밀라드가 베개를 들고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서즈필드 자작은 어떻게 해서든 손끝을 움직이려 애썼으나 온몸이 돌처럼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양손으로 베개를 높이 들어 올린 밀라드가 따사롭게 웃어 보였다.

언제나 그가 자랑스러워하던, 귀공자 같은 미소였다.

“부디, 안녕히.”

“……!”

그 말을 끝으로, 밀라드는 베개로 서즈필드 자작의 얼굴을 짓눌렀다.

서즈필드 자작이 숨을 컥컥 몰아쉬는 소리가 베개에 먹혀 들려 오자 밀라드가 혀를 차며 손에 힘을 더했다.

“저런. 괜히 버티지 말고 편히 잠드세요, 아버지. 그편이 덜 괴로우실 테니까요.”

느긋한 어조로 중얼거린 밀라드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달이 눈에 들어왔다.

희고 푸른 달이 꼭 레베카처럼 느껴졌다.

밀라드의 눈이 몽롱해졌다.

흥분과 고양감으로 인해 심장이 점차 빠르게 뛰며 그 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웠다.

‘드디어.’

드디어 레베카의 곁에, 그녀의 남편으로서 당당히 설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은 지금까지 서즈필드 자작의 말에 휘둘려 다니며 낭비한 시간이 억울할 정도로 달콤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래야 했어.’

애초에 서즈필드 자작이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려 3황자에게까지 손을 뻗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터다.

그는 서즈필드 자작의 잘못된 선택을 이제라도 원래대로 돌리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죄가 아니다.

밀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서즈필드 자작의 숨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가느다란 숨결을 마지막으로 그의 목숨이 끊어지려던 찰나.

쨍그랑!

“으아악!”

별안간 자작의 방 유리창이 산산이 깨져나갔다.

그 충격으로 튄 유리 조각이 자작의 침대까지는 미치지 않았으나, 순간적으로 놀란 밀라드는 베개를 놓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당황한 그가 반사적으로 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서 작은 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알아본 그가 눈을 부릅떴다.

“하급 정령? 대체 누가……!”

“이게 무슨 소리냐!”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깨어난 것인지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그에 밀라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집사가 뛰어 들어왔다.

‘아차……!’

집사의 방이 서즈필드 자작의 곁방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갑작스럽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련님?”

방 안의 광경을 눈에 담은 집사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눈에 핏발이 선 채 눈동자만 굴려 밀라드를 노려보고 있는, 기괴한 자세로 굳어진 자작.

침대 옆에 나동그라진 밀라드.

그의 곁에 떨어진 베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집사가 비명처럼 외쳤다.

“경비병! 지금 당장 도련님을……! 도련님께서 주인님을 살해하려 하셨다! 경비병!”

밀라드는 그 외침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려 들었으나, 사용인들이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는 경비병에게 양팔이 붙들려 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창문을 돌아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저기 침입자가 있다! 나를 잡을 게 아니라 유리창을 깬 놈을 찾으라고! 이거 놔!”

그러나 사용인들은 경멸 어린 눈으로 그런 밀라드를 쳐다볼 뿐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밀라드를 끌어낸 후, 다급하게 자작의 상태를 살핀 집사가 그를 둘러업고 인근의 병원을 향해 뛰었다.

협탁 위에 놓인 빈 잔을 보고 주치의조차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집사가 자작을 업고 사라진 후, 자작의 방에는 조금 전의 소란이 꿈이었다는 듯 쥐 죽은 듯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휴, 들키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 처음 자작 감시 명령이 내려왔을 때는 참 쓸데없는 짓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터질 줄이야.”

그때 창밖에서 후드를 깊이 눌러쓴 한 사내가 나타났다.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그가 혀를 끌끌 차더니 주위에서 반짝이는 빛을 향해 웃어 보였다.

“잘했어, 실프. 그럼 이제 본부로 돌아가 볼까? 부길드장님께 연락해야지.”

푸르륵.

사내의 말에 빛이 동의하듯 날개를 파닥였다.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의 도움을 받아 자작저의 지붕을 뛰어넘은 사내는 어둠에 몸을 숨기고 길드 윙즈 본부로 복귀했다.

디아나와 케이든이 절벽 아래로 추락한 그 밤의 일이었다.

* * *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진영 앞에서 뒷짐을 진 채 북쪽 숲 입구를 바라보고 있던 핀들레이 공작이 잠잠히 말을 내뱉었다.

제4연대가 연통 하나 없이 진영으로 복귀하지 않은 지도 이틀.

하늘에는 어느덧 노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공작의 곁에 서 있던 레베카가 그 말을 듣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라고 묻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레베카는 대신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만약 공작이 정말로 무슨 수를 쓴 것이라면, 그것이 곧 그녀의 실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베카는 다른 것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라도 수색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작.”

그 말에 핀들레이 공작이 고개를 돌려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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