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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7/145)

117화

촤악-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케이든의 검이 마지막 마물의 목을 베어냈다.

캬아아아악!

집채만 한 크기의 마물이 커다랗게 비명을 내질렀다.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슴뿔이 달린 거대한 지렁이 형태의 마물이 사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짧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던 기사들은 마물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아…….”

“아이고, 죽겠다.”

“괜찮냐, 안타르?”

“괜찮습니다.”

“땀 좀 봐라, 괜찮기는.”

기사들이 하나둘 앓는 소리를 흘리며 바닥에 풀썩 드러눕는 사이.

기사단 내에서도 상당히 나이가 있는 기사가 안타르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안타르는 그제야 제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며 상체를 숙였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나이 든 기사가 다시금 안타르의 어깨를 도닥였다.

“고생했다. 오늘 돌아가면 네가 제일 먼저 씻어라.”

“감사합니다.”

“뭘. 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아뇨, 저보다는…….”

고개를 젓던 안타르가 문득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사들이 모두 주저앉은 지금까지도 묵묵히 마물들의 사체를 하나하나 살피며 확인 사살을 하는 케이든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타르가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며 약해졌다 해도 어지간한 마물과는 궤를 달리할 놈이었다.’

안타르 역시 처음에는 제4연대에게 몇 안 되는 수의 마물을 토벌하라 명한 핀들레이 공작의 저의를 의심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마주한 마물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다.

처음 마물들이 그가 만들어낸 벽으로 달려와 부딪쳤을 때는 정령이 역소환 될 뻔했으니까.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마물이 빠르게 약해진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마물은 강했다.

마물들을 막아내다 마력이 바닥나 안타르가 뒤로 물러난 이후에도 기사들은 한참이나 고전을 이어갔다.

만약 케이든이 없었다면…….

‘……전하께서 없었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겠지. 분명 사상자도 나왔을 것이다.

케이든이 강하다는 것이야 방어전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는 정말이지 일반적인 정령사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보아야 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검술 수련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가진 마력 자체가 전보다 서늘하고 매서워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 차이가 안타르에게 또다시 절망을 안겨주었다.

당장 안타르는 이렇듯 형편없이 주저앉아 있는데, 케이든은 홀로 마물들 틈을 걸어 다니고 있다는 점이 쓰라렸다.

“…….”

안타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꽉 그러쥔 채 움직이지 않다가, 곧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안타르와 마찬가지로 슬슬 숨을 돌리고 일어나는 기사들 사이로, 파트라슈가 케이든에게 다가갔다.

“이쪽도 확인 끝났습니다, 전하.”

“…….”

“전하?”

파트라슈가 여러 번 케이든을 불렀으나, 그는 마물의 사체 한가운데 걸음을 멈춘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파트라슈가 그에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이었다.

검 끝으로 반으로 갈라진 마물의 사체를 슬쩍 들춰본 케이든이 까딱 턱짓해 파트라슈를 불렀다.

“패트.”

“예?”

“네 눈엔 이게 뭐로 보이나?”

“뭐가…… 헉.”

파트라슈는 케이든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가 기겁했다.

반으로 갈라진 지렁이 마물의 뱃속으로 작게 몸을 웅크린, 언뜻 슬라임과 비슷한 모양새의 마물이 죽어 있었다.

케이든과 파트라슈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마물 두 마리의 사체를 응시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들이 나란히 입술을 달싹였다.

“새끼 마물 같지?”

“……새끼 마물 같네요. 하, 젠장. 어쩐지 일이 나름 쉽게 풀린다 했더니만.”

파트라슈가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구시렁대면서도 예리한 눈길로 마물을 샅샅이 살폈다.

“아무래도 동쪽의 변종 마물이 일부 넘어온 게 아닐까 싶은데요. 아니면 이놈들이 동쪽으로 가서 동족까지 먹어 치우고 돌아온 거던지.”

“우선 새끼 마물을 먹어 치운 건 이놈 하나뿐인 거 같지만, 혹시 모르니 남은 구역도 샅샅이 뒤져 보고. 개체 수가 늘어나기 전에 확실히 처치하고 돌아가지.”

“예, 예. 전하라면 당연히 그러시겠죠. 다들 들었지! 일어나라!”

파트라슈가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그러자 기사들이 후다닥 몸을 일으키고 태세를 정비했다.

그렇게 그들은 북쪽 숲의 수색을 재개했다.

숲의 끄트머리, 절벽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기사들은 수풀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슬라임 무리를 찾아내곤 속닥거렸다.

“……작지?”

“작네…….”

“진짜 작아.”

토벌 직전 케이든이 전해준 내용을 토대로, 동쪽 숲에 출현했다는 변종 마물이 작은 슬라임 형태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마물들은 귀엽다는 감상이 들 정도로 작고 무해해 보였다.

파트라슈가 케이든에게 물었다.

“별다른 특징은 없다고 했죠?”

“응. 그냥 보통의 마물보다 빠르고, 위기에 몰리면 제 몸에 벼락을 두른다는 것 정도?”

“그럼 얼른 정리하고 돌아가죠. 전하께서는 아까도 선두에서 고생하셨으니 안타르 경이랑 뒤쪽에서 쉬고 계십시오.”

파트라슈가 케이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케이든은 잠시 망설였지만, 안타르의 상태가 갈수록 나빠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의 곁에 남기로 결정하고 기사들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이놈들만 정리하면 집에 갈 수 있다!”

“돌아가자!”

“벼락 조심하고! 통구이가 되면 집에 못 간다!”

기사들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검, 혹은 활 등 제 무기를 쥐었다.

허공에서 빛이 여럿 반짝이더니 정령들이 나타났다.

삐익!

그때 기척을 눈치챈 마물들이 일제히 울며 기사들 쪽을 돌아보았다.

그것을 신호로 기사들이 마물들에게 달려들었다.

사아악!

누군가의 검이 마물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방심하지 않았던 것이 무색하게 마물은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그것을 본 몇몇 기사들은 약간 황당한 기색마저 내비쳤다.

“뭐야? 그래도 변종이라길래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약하…….”

그러나 그 순간.

삐이익! 삐이이익!

주변의 마물들이 거세게 울부짖었다.

그들의 몸에 번개가 어리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반으로 갈라진 마물의 몸뚱어리가 꾸물거리더니 그 자체로 한 마리 마물의 형태를 이루었다.

“무슨……!”

기사들은 뒤늦게 무기를 거두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누군가가 쏘아버린 화살, 비수 등이 다른 마물들을 공격한 후였다.

퍼억! 푹!

화살에 직격당한 마물이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그 조각 하나하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수십 마리의 마물이 되어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생전 처음 목격하는 광경에 기사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뭐 하는 거야! 상처 내지 말고 불에 태워!”

상황이 달라지자 케이든은 주저하지 않고 검을 뽑아 기사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그의 외침을 들은 불 속성 정령사들이 황급히 마물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삐이이익!

“돼, 됐다!”

커다란 불길이 마물들의 몸을 감싸고, 기사들이 반색했다.

그러나 연기가 되어 사라질 듯했던 마물은 허공에서 다시금 뭉쳐 땅에 내려앉았다.

“흐, 흐아악!”

“죽지 않아! 죽질 않는다고, 제기랄!”

마치 지옥 같은 풍경에 기사들이 두려움 섞인 비명을 질러댔다.

“침착해라! 날붙이는 위험하니 거두고, 불꽃으로 태운 후 연기는 바람으로……!”

“크아악!”

그때 섬뜩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케이든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리자 몸을 늘인 마물이 파트라슈의 눈가를 사납게 물어뜯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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