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무슨 꿍꿍이십니까.”
추궁에 가까운 말을 들었음에도 핀들레이 공작의 눈에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공작은 오히려 레베카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에 따라 입꼬리 또한 비스듬히 늘어졌다.
“꿍꿍이라니.”
“…….”
“아군에게 할 말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 섭섭하군요. 오히려…….”
공작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레베카를 훑어보았다. 일순 그의 눈에 벼락과도 같은 빛이 스쳐 갔다.
“꿍꿍이를 가진 것은 황녀 전하가 아니십니까?”
“……!”
레베카의 어깨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튀어 올랐다.
그녀는 표정을 무너트릴 뻔한 탓에 급하게 볼 안쪽을 짓씹어 평정을 유지했다.
‘어떻게…….’
분명 핀들레이 공작의 뒤를 밟게 시켰던 수하들은 들키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중간에 공작에게 붙어 있던, 아마도 케이든이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과 잠시 스쳐 지나간 것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 텐데.
심지어는 루드비히조차 레베카가 공작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핀들레이 공작은 애초부터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양, 잠잠한 어조로 레베카를 타일렀다.
“그러니 제 뒤를 캐는 것은 이쯤에서 그만두십시오, 전하.”
“……애초에 숨기질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저번의 그건……!”
“듣는 귀가 많습니다.”
“…….”
레베카는 울컥해 외치다가 나지막한 경고에 다시금 입술을 붙였다.
그러자 핀들레이 공작은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을 보듯이 레베카를 사뭇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께서 정 불안하시다면 여신 틸리아를 걸고 맹세하지요.”
“…….”
“저는 전하께 해가 될 짓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야말로 뱀의 속삭임이 다름없었다.
당장은 달콤하게, 믿음직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더없이 지독한 독을 품고 있는 듯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
레베카가 입술을 꾹 닫고 숨을 고르는 사이, 핀들레이 공작이 우아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베카는 한때 저 몸짓을 동경했다.
공작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도, 위압감도.
모두 할 수만 있다면 훔쳐서라도 가지고 싶은 것들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공작의 위압감이, 그가 우아한 동작으로 휘두른 칼날이 제게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동경이었다.
공작은 테이블을 따라 걸으며 막사의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중간에 걸음을 멈춘 그가 레베카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공작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그저 제가 손에 쥐여드리는 것을 누리시면 됩니다.”
그 말에 레베카의 눈썹이 불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공작은 그녀에게 더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막사를 나가버렸다.
쾅!
“젠장…….”
막사에 홀로 남겨진 레베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리고 그 순간에 맞추어, 테이블 밑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먼지 공 하나가 데구루루 굴러 막사의 천 밑으로 빠져나갔다.
막사 뒤쪽에 늘어져 있던 검은 고양이가 귀를 쫑긋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냐앙.
기지개를 쭉 켠 고양이, 무프가 반갑다는 듯 울자 힐라사가 팔다리를 필사적으로 파닥거리며 조용히 하라 일렀다.
냥.
그러나 무프는 힐라사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저 같이 엉덩이를 씰룩일 뿐이었다.
힐라사가 소리 없이 통곡하며 땅을 쳤다.
부스럭-
그때 막사 안에서 레베카가 몸을 일으키는 듯한 기척이 들렸다.
힐라사가 기겁하며 허겁지겁 무프의 발을 쳤다.
그러자 무프가 몸을 낮추어 힐라사가 올라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삐익!
무프의 머리털을 움켜쥔 힐라사가 자그맣게 울자 무프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몸을 돌려 막사를 이리저리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무프의 머리 위에서 힐라사가 빨랫줄에 걸린 빨래처럼 팔랑거렸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 두 정령은 조금 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하기 위해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 * *
다음 날.
각 연대는 전날 회의 결과에 따라 곳곳으로 흩어졌다.
“정지.”
선두에서 제4연대를 이끌던 케이든이 한 손을 들었다. 그러자 기사들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케이든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몸을 숙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땅바닥과 근처의 나무를 살피던 그가 몸을 돌렸다.
“흔적을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해. 진형을 갖춰. 진입한다.”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이 상대해야 할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는 마물이었기에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방어 진형을 갖췄다.
이번 토벌의 핵심은 사실상 안타르가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방어 진형의 가장 앞에 서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케이든을 발견하고 움찔 걸음을 멈췄다.
[경은 이곳에 남아 있도록.]
케이든이 안타르의 마음을 알아챈 것.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 이후 안타르는 되도록 케이든과 디아나를 피하려 애썼다.
그것이 감히 다른 이의 반려를 눈에 담은,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반려를 마음에 품는다는 게 옳지 않은 일임을 안다.
하지만 안타르는 디아나의 호위였고, 호위 중 무의식중에 시선이 향하는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녀의 웃음에 전과 달리 그늘이 져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케이든 또한 디아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곤 했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둘만 남게 되면 조금은 어두워진 얼굴로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안타르는 어쩌면 디아나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케이든과 디아나 사이에 그어진 실금을 눈치챘고, 그것을 모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안타르는 차마 케이든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케이든 역시 디아나를 마음에 품은 이였고, 같은 마음을 품은 이들은 서로를 기가 막힐 정도로 잘 파악할 수밖에 없다.
안타르는 케이든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눈을 내리깔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불편하시겠지.’
케이든은 알 것이다. 안타르가 아직도 시선으로 디아나를 열렬히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하여 안타르는 최대한 케이든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고, 묵묵히 제 역할만을 다하겠노라 다짐했다.
어찌 보면 안타르는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위험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연모하는 상대의 남편에게 격려나 치사까지 바라는 것은 사치일 테니까.
안타르는 시선을 내리깐 채 케이든의 곁에 가서 섰다.
그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숨을 고르며 마력을 점검하던 그때.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5분.”
“…….”
“잘 부탁하네, 안타르 경.”
나지막하지만 선명히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에 안타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케이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공과 사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그 말을 실제로,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사람이란 결국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생각으로 움직이는 존재였다.
어떤 상황에서건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이 악감정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케이든은 안타르가 제 아내를 마음에 품고 있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웃어 보였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한 격려와 응원을 담은 웃음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또한 만약 안타르 자신이 케이든의 입장이었다면 결코 그러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절망스럽게도 안타르는 찰나, 디아나가 어째서 눈앞의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지 절절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꽉 막힌 목소리를 가까스로 쥐어 짜냈다.
“……존명.”
그 답을 들은 케이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시 진중한 표정을 지은 그가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진입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콰아앙-!
집채만 한 마물이 안타르가 만들어낸 벽을 향해 돌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