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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145)

110화

4황비에게 어둠 속성 정령들의 연구를 맡기고 돌아온 후.

디아나는 일전에 계획했던 대로 1황자 엘리엇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검은 옷을 뒤집어썼다.

머리카락을 묶어 후드 안으로 밀어 넣고, 복면으로 얼굴까지 완벽하게 가린 그녀가 벨라에게 방의 경비를 맡기고 3황자 궁을 빠져나왔다.

“무프.”

하아악.

낮에 4황비의 손에 이리저리 만져지고 늘여진 탓에 심기가 불편한 무프가 디아나를 향해 하악질을 했다.

난처한 웃음을 지은 디아나가 슬쩍 입을 열었다.

“……이따가 토끼 잡아다 줄까?”

햐악.

“사슴?”

…….

“……세 마리?”

냥.

무프는 그제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디아나는 제 다리에 얼굴을 비비는 무프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영악한 정령 같으니.’

<주인을 닮아서 그렇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끼어들지 마, 유로.’

<……너, 자꾸 그렇게 나를 막 대하면 연구에 협조하지 않는 수가 있다.>

‘해 보던가.’

<…….>

괜히 심술을 부리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유로가 조용해졌다. 이내 그녀의 몸이 무프가 만들어 낸 어둠 속에 감춰졌다.

디아나는 기척을 죽이고 1황자 궁으로 향했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뮈젤이 했던 말에 대해 생각했다.

[한쪽은 3황자 전하의 수하들, 그리고…… 다른 한쪽은 1황녀 전하의 수하들이었습니다.]

뮈젤의 보고.

그리고 사냥대회 때, 숲에서 보았던 기묘한 대치 상황.

엘리엇을 살리는 게 먼저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나 자꾸만 레베카와 핀들레이 공작 쪽으로 신경이 기울어졌다.

‘핀들레이 공작이 레베카에게도 감추는 것이라…….’

대체 뭘까.

‘레베카가 공작을 거스르면서까지 그가 감추고 있는 걸 알아내려 한다는 건…… 그게 자신에게 위협이 되리라 판단했을 경우뿐인 것 같은데.’

하지만 그간 핀들레이 공작이 레베카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생각하면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까 싶어 확신하기가 모호했다.

결국 디아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상념을 애써 털어 냈다. 지금은 레베카보다 엘리엇이 먼저였다.

발걸음을 빨리하자 이윽고 1황자 궁이 가까워졌다. 어둠에 휘감긴 1황자 궁을 바라보자니 묘한 감상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과 반대네.’

과거에는 엘리엇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면, 지금의 그녀는 엘리엇을 살리기 위해 1황자 궁을 찾은 것이었다.

그 차이가 어쩐지 우스웠다. 디아나가 자조 어린 웃음을 머금고 경비병의 눈을 피해 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뮈젤이 알려 준 대로 1황자 궁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언제나 불을 밝혀두었던 최근과 달리 지금은 1황자 궁의 불이 모조리 꺼져 있었다.

‘플뢰르…… 괜찮을까?’

뮈젤은 며칠 내내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엘리엇의 곁을 지키던 플뢰르가 결국 정신을 잃어 다른 방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소식을 덧붙여 전해주었다.

그래서 플뢰르가 충분한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오늘 하루는 황궁의의 명령에 따라 1황자궁의 불을 모두 꺼두기로 했다는 것도.

디아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플뢰르를 살펴보고 가고 싶었으나, 혹시 그녀를 간호하고 있는 사용인이 기척을 눈치챘다가는 곤란하니 어쩔 수 없었다.

엘리엇의 방문 앞에 선 디아나가 짧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살짝 열었다.

방 안에 엘리엇을 제외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디아나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창문 쪽은 마도구로 보호되어 있구나.’

방 안을 한번 휘 둘러본 디아나가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며칠 전에 보았던 것보다도 한층 창백한 얼굴로 색색 숨을 몰아쉬는 엘리엇이 보였다. 파리한 얼굴과 숨소리에 가슴이 아렸다.

‘힐라사.’

디아나는 입속으로 조용한 부름을 읊조렸다.

그러자 작게 바람이 일더니 그녀의 발치에서 힐라사가 나타났다.

디아나는 방문 쪽을 눈짓했다. 그러자 힐라사들이 쪼르르 바닥을 굴러 방문 아래의 틈으로 사라졌다. 방문 밖의 경계를 맡긴 것이었다.

그사이, 디아나는 엘리엇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 조심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직후, 그녀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곧장 손을 물렸다.

‘뭐지?’

디아나가 당황한 얼굴로 제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다시 엘리엇의 손에 손끝을 살짝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디아나의 얼굴이 확실히 굳어졌다.

‘어떻게…….’

1황자 엘리엇은 마력을 전혀 다룰 수 없는 몸이었다. 그 말은 곧 선천적으로 몸 안에 타고난 마력이 없다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엘리엇의 몸 안에서는 희미하게 마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마력에서는 친숙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유로.”

디아나가 무프의 결계를 해제하며 굳은 목소리를 냈다. 힐라사와 무프, 유로의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기에는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복면도 썼으니까, 혹시 암살자와 마주친다고 해도 알아보진 못하겠지.’

부름에 응한 유로가 그녀의 등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가 침대 위로 고개를 얹고 냄새를 맡더니 흥미롭게 말했다.

<정령사도 아니면서 우리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 인간이라…… 재미있군.>

유로의 말로 자신이 느꼈던 것이 착각이 아닌 사실임을 깨달은 디아나가 희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어둠 속성 정령의 기운이 확실해? 착각한 게 아니라?”

<확실하다고는 말 못하겠군. 분명 우리의 기운과 놀랍도록 닮았지만, 뭔가 달라.>

유로가 코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킁킁거렸다.

디아나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침대 시트를 세게 움켜쥐었다.

‘이건…….’

어둠 속성 정령과 ‘비슷해 보이는’ 기운.

그리고 몸의 곳곳에 올라온 짙은 보랏빛의 멍.

‘닮았어.’

이런 것이 하나둘 겹쳐지자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황제 폐하께서 독에 당하셨다!]

[온몸에 보랏빛 멍이라니……! 얼마나 지독한 독을 썼으면!]

[네가 사특한 힘을 쓴다는 제보가 있었다! 잔말 말고 따라와!]

디아나가 레베카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

그 과정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과 지금의 상황이 겹쳐진다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

……우연이 아니다. 본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아.’

레베카의 경우에는 목숨을 잃을 것임이 분명하다는 등의 말이 없었다.

실제로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더없이 건강하고 깨끗한 모습이지 않았는가.

‘레베카 측에서 만들어 낸 독이라 해독제가 따로 있는 건가? 대체…….’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이 온통 혼란뿐이었다. 디아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침대를 한 바퀴 빙 돌며 꼼꼼히 냄새를 맡던 유로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코로 엘리엇의 반대쪽 손을 쿡 찔렀다.

<여기서 느껴지는 향이 제일 짙다. 정신 차리고 이쪽으로 와봐.>

디아나는 유로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발을 떼었다.

그녀가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쓰며 유로가 코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반지?”

디아나의 미간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유로가 가리킨 것은 엘리엇의 약지에 끼워져 있는 결혼반지였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디아나가 작게 중얼거리며 엘리엇의 반지를 향해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이었다.

삐이익!

날카로운 울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반지에 정신이 팔려있던 디아나와 유로가 고개를 홱 내리자 힐라사가 필사적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식어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그리고 무언가 반응을 내비칠 새도 없이.

끼익-

3황자 케이든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형님?”

기척을 죽이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그와 디아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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