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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109/145)

109화

“늦었네.”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던 4황비가 고개를 돌려 디아나를 맞이했다.

일전에 사냥대회에서 보았을 때는 그래도 공적인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라 단장을 하고 왔던 것인지, 지금 4황비의 머리카락은 복슬복슬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부스스했다.

거기에 퀭한 눈 위로 안경까지 쓰고 있자니, 황비라기보다는 연구에 찌든 학자에 훨씬 가까워 보였다.

디아나는 가볍게 예를 취하고는 4황비의 손에 들려 있는 긴 담뱃대로 시선을 옮겼다.

“신기할 정도로 긴 담뱃대네요. 그것도 저번의 활처럼 직접 만드신 건가요?”

“아니, 이건 서방에서 들여온 거고. 저쪽이 만든 거. 그나저나.”

4황비가 등 뒤를 고갯짓하자 몸을 돌리려 했던 디아나가 이어진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4황비가 긴 담뱃대의 끝을 입에 물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이어 담뱃대에서 입술을 뗀 그녀가 잇새로 연기 섞인 숨을 길게 내뱉으며 디아나를 직시했다.

디아나가 늘 퀭하던 4황비의 검은 눈에 숲에서 보았을 때와 비슷한,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흥미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카드몬드 후작은 자네의 정부인가?”

“콜록. ……예?”

너무 당황한 나머지 숨을 잘못 삼켜 콜록거린 디아나가 가까스로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나마 쥐어짜 냈다.

하지만 4황비는 말실수가 아니라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연구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창문 쪽을 고갯짓했다.

디아나가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창 너머, 4황비 궁의 입구가 훤히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루드비히와 디아나가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그녀의 손에 입 맞추는 광경을 4황비가 전부 보았다는 뜻이었다.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까스로 평소의 상태를 되찾은 그녀가 차분하고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해십니다.”

“왜?”

“……예?”

“아니야. 그런 관계가 아니라니 아쉽군. 간만에 재밌는 일이 하나 더 생기려나 했더니.”

디아나가 황망한 얼굴로 같은 대답만을 반복하자, 4황비의 눈에 어려 있던 흥미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혀를 쯧 찬 그녀가 다시 담배를 입에 물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디아나는 황당하게 눈을 끔벅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정부를 뒀으면 재밌었겠다는 소리를 하는 건가?

‘특이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아무래도 4황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상식’이라는 것에서 동떨어진 인물로 보였다.

“지루해……. 더 연구할 게 없어.”

4황비가 담배를 뻑뻑 피우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잠시 대화가 단절된 틈을 타 연구실 곳곳을 살펴보던 디아나가 이어진 읊조림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정령이라도 하나 죽여서 제대로 연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정령사가 죽으면 계약이 해지된 정령은 자연히 정령계로 돌아가야 하니 붙잡을 수도 없고. 정령과 정령사 간의 유대 때문에 제 정령을 연구 대상으로 넘겨줄 자도 없고…….”

디아나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4황비가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올리고는 입술을 뗐다.

“아, 그대도 정령사이니 이런 이야기는 불편한가?”

“…….”

디아나의 얼굴에 스며 있던 엷은 미소가 차츰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4황비를 응시했다.

‘제안이군.’

[비밀로 해주지. 대신 다음에 내 연구실에나 한번 놀러 와. 무슨 정령사인지도 알려주면 좋고.]

4황비는 조금 전, 일부러 디아나가 정령사라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며 은연중에 그녀를 압박한 것이다.

‘3황자비가 정령사다’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 줄 테니, 그녀의 정령을 연구하게 해달라고.

‘차라리 이게 나아.’

4황비가 그 숲에서 분명 디아나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주겠다고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것이 말뿐인 약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외려 대가 없는 침묵이야말로 가장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제 정령의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4황비가 말했듯이, 아무리 속을 썩인다고 한들 정령과 정령사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관계니까.

디아나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목격한 4황비의 눈에 다시 흥미로움이 돌아왔다.

이윽고 디아나가 서늘한 눈으로 빙긋이 미소 지었다.

“본격적인 연구를 도와드릴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정령의 특징과 마력 파장을 관찰하게 해드릴게요.”

4황비의 눈썹이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 디아나를 응시했다.

“자네는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야? 그 정도는 다른 정령들로도 이미…….”

“그게 지금까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속성의 정령이라도요?”

“……뭐?”

4황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 마력을 움직였다. 그녀의 눈이 조금 더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살랑-

형태 없는 바람이 인다. 디아나의 주위로 숲에서 봤을 때와 비슷한, 하지만 그때보다 훨씬 절제된 마력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직후.

삐이.

디아나의 치맛자락 아래에서 언뜻 시커먼 먼지 공처럼 보이는 것들이 하나둘 굴러 나왔다.

이어서 그녀의 등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검은 고양이와 늑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늑대로 현신한 유로가 디아나의 머릿속에 대고 투덜거렸다.

<망할 것. 세상 어느 정령사가 자기 정령을 저런 미치광이 학자에게 팔아먹나?>

‘그럼 죽을래?’

<저, 저…….>

상냥하고 살벌한 대답이 돌아오자 유로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결국 유로는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라며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편, 세 종류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본 4황비의 눈은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상급 정령사? 하지만, 저건…….”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4황비 전하.”

그때 디아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문을 뗐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달콤한 음성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연구해보실 생각, 있으신가요?”

“……하.”

4황비가 엉망인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올리며 실소를 흘렸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던 머리카락을 걷어낸 이후로도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피식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러다가 4황비가 돌연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 움직임에 유로는 저도 모르게 움칫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검은 눈이 형형한 생기로 가득 찼다. 4황비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아를라스의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미쳤다며 나를 비난할 거다. 거래하지.”

“대신 조건이 더 있어요.”

“뭔데?”

4황비는 당장에라도 힐라사들을 연구대 위로 올리고 싶은지 손끝을 움찔거렸다.

4황비로부터 무언가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힐라사들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슬그머니 디아나의 치맛자락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디아나는 그녀의 초조함을 굳이 덜어 내주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제국 내에서 이 아이들의 마력 파장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없는지. 그것까지 함께 연구해주세요.”

디아나와 윙즈는 찾지 못했다지만, 혹 어딘가에 어둠 속성 정령사와 관련한 자료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주 미세하게나마 자료에 남아 있는 비슷한 마력의 파장이 감지될 테고.

‘무엇보다…….’

제국 내에 디아나 본인이 아닌 다른 어둠 속성 정령사가 몸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확률은 낮지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

만약, 정말로 만약에.

‘어둠 속성 정령’에 관한 명확한 근거를 찾아낼 수 있다면…….

“…….”

문득 케이든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그것은 너무도 신기루 같은 희망이었던지라 곧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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