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사박-
끝이 황금빛으로 바래기 시작한 잔디를 밟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디아나는 양산을 든 채 4황비의 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양산 너머로 하늘을 슬쩍 올려다본 디아나가 콧잔등을 엷게 찡그렸다.
‘날은 좋네.’
디아나의 뒤를 따르던 벨라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작게 입을 열었다.
“굉장히…… 자연적인 곳이네요.”
“그냥 관리가 안 되어 있다고 해도 괜찮아, 벨라.”
“음.”
디아나의 말에 벨라가 난감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도륵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나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4황비궁의 주변은 유달리 수풀이 무성했다. 황궁을 관리하는 이들이 잘 닦아둔 길이 잔디로 뒤덮일 정도로.
4황비는 사실상 황비라기보다는 아를라스 왕국과의 친교를 위해 이곳에 와 있는 학자에 가까운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언제나 궁에 틀어박힌 채 권력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연구실 근처에서 사람들이 알짱거리는 게 더 거슬리니까 관리든 뭐든, 그냥 하지 마.]
‘……라고 말했다고도 유명했지. 그래서 지금 이 근처가 이런 상태인 거고.’
디아나는 고개를 슬쩍 들어 저 멀리 위치한 4황비궁을 바라보았다.
그럭저럭 ‘궁’이라고 불릴 만한 형태를 갖춘 건물의 꼭대기, 기이한 구조로 삐죽 솟아 나와 있는 작은 탑이 청보랏빛 눈에 비쳤다.
그곳이 바로 4황비 미애나의 연구실이자, 오늘의 티타임 장소였다.
상식적으로 연구실에서 티타임을 가지자고 하는 귀족은 없었다. 처음 초대장에 적힌 장소를 본 벨라는 제 눈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냥대회 때, 숲에서 사용했던 기이한 형태의 활도 그렇고.
4황비가 ‘상식’과는 꽤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디아나는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내 목적은 티타임이 아니니까. 그보다 더 지체했다가는 늦겠네.’
디아나는 벨라와 산책하듯 걷다 보니 어느새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보폭을 늘렸다.
그녀가 막 한 걸음을 크게 내딛는 순간이었다.
“루드비히 카드몬드가 3황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4황비궁의 정문으로 들어서는 길목.
어디선가 나타난 루드비히가 디아나의 앞에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디아나는 갑작스럽게 앞을 가로막는 인영에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등 뒤로 벨라가 놀란 듯 작게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워요, 카드몬드 후작.”
사실은 하나도 반갑지 않았지만. 저렇듯 만면에 미소를 띤 이를 홀대하는 광경을 누군가 보기라도 했다가는 곤란했다.
게다가 루드비히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고.
‘앞에서는 웃겠지만, 뒤에서 칼을 갈겠지.’
그래서 디아나는 어쩔 수 없이 마주 미소를 띠며 루드비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그가 문자 그대로 싱그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4황비 전하를 만나러 가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디아나는 애써 경계심을 감추며 답했다.
루드비히 카드몬드는 하등 영양가 없는 안부 인사 따위로 시간을 낭비할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에 그 상대가 케이든의 배우자인 자신이라니. 더없이 수상쩍었다.
‘뭔지는 몰라도 저 사람의 의도에 휘말리기 전에 빠져나가야 할 텐데.’
문제는 루드비히의 눈이 도저히 약속이 있다는 말에 선선히 비켜줄 사람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디아나의 예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듯 루드비히가 재차 입술을 뗐다.
“의외로군요.”
“무엇이요?”
“4황비 전하께서는 다른 이를 궁에 들이지 않기로 유명하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티타임이든, 파티든 일절 참석하지 않으시고요. 세상사에 관심이라곤 전혀 없으신 분인데…….”
루드비히가 말꼬리를 느릿하게 늘이며 앞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좁혀진 거리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루드비히가 재미있는 광경을 본 사람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디아나의 불안을 가중했다.
“그런 분께서 3황자비 전하께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달리 있는 걸까요?”
“…….”
바람이 루드비히의 연한 금빛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의 머리 위로 오후의 햇빛이 쏟아졌다.
오롯이 디아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 모습은 얼핏 무언가에 마음을 뺏긴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연푸른 눈이 상대의 속을 낱낱이 긁어내겠다는 것처럼 진득하니 따라붙었다.
디아나는 호흡 한 자락마저 허투루 흘리지 않으려 조심하며 담백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4황비 전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셨다면 좋은 일이죠.”
“흠.”
“이 정도면 인사는 충분히 된 것 같네요. 자칫 저를 좋게 봐주신 4황비 전하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걱정되어서요. 이해해주실 수 있으시죠, 후작?”
그녀가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무구하게 웃었다. 그러자 머리카락에 가려진 루드비히의 눈썹이 찰나 구겨졌으나 곧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런. 제가 반가운 마음에 3황자비 전하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군요. 그럼.”
디아나는 루드비히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기에 옅게 한숨을 삼키고 디아나는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루드비히의 입술이 디아나의 손등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무슨…….”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내린 그가 혀끝을 내밀어 드러난 피부를 슬쩍 핥아 올렸다. 흰 이가 여린 피부를 살짝 깨무는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작별을 고하는 인사라기에는 지나쳤다.
디아나가 어깨를 파득 떨며 황급히 루드비히에게서 제 손을 빼냈다. 벨라는 그 반응을 보고 반사적으로 디아나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두 여인이 제게 날 선 시선을 보내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상체를 바로 하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디아나는 루드비히가 입 맞췄던 손등을 다른 손으로 감싼 채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후작?”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방금, 후작이…….”
디아나는 ‘당신이 내 손등을 핥고 깨물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려다가 입술을 꾹 닫았다.
이런 말을 직접 입 밖으로 내기에는 외설스러웠다.
그녀가 설마 하는 마음에 시선을 슬쩍 내려 손등을 살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가 핥고 깨물었던 부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얗기만 했다.
‘교활한 자식.’
이렇게 되면 루드비히의 무례를 지적한다 한들, 그가 디아나가 느꼈던 것들이 단순히 착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란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진다는 것 자체가 케이든의 평판에는 좋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디아나는 잠시간 미친 척 루드비히의 뺨을 때리고 ‘뺨에 나뭇잎이 붙어 있어서요’라고 주장해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든, 거기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됐네. 이만 가자, 벨라.”
“네, 전하.”
디아나는 루드비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냉랭하게 걸음을 뗐다. 그녀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속삭였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3황자비 전하.”
‘다음에 또’라니, 꿈도 크지.
디아나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4황비 궁으로 들어갔다. 루드비히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오셨습니까, 3황자비 전하.”
디아나가 4황비 궁으로 들어서자 하녀가 고개를 숙였다.
벨라를 1층의 게스트룸으로 데려간 하녀가 이내 다시 나타나 디아나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연구실은 이곳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꼭대기로 향하는 계단까지 디아나를 데려다준 하녀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디아나가 계단을 밟고 올라가 고풍스러운 나무 문을 열자 끼익,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늦었네.”
그 안에서,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던 4황비가 고개를 돌려 디아나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