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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07/145)

107화

‘3황자비.’

유리창 위로 디아나의 웃는 얼굴이 언뜻 비쳤다.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린 루드비히가 레베카를 돌아보았다.

“전하.”

“음?”

그 부름에, 핀들레이 공작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던 레베카가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루드비히는 그 반응이 의아한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자세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2황녀 전하에 관한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래는 사냥대회가 끝난 후, 2황녀 카를롯타의 처벌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질 예정이었지만 엘리엇이 쓰러진 일로 인해 그 일은 잠정적으로 연기되었다.

루드비히의 물음을 들은 레베카가 쯧 혀를 찼다.

“시일이 좀 지났는데도 3황자가 경계를 낮출 생각을 하지 않아. 사냥대회가 끝나기 전에 처리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카를롯타를 죽이려 했다가 실패했다는 말을 뱉는 레베카의 얼굴은 냉정했다.

카를롯타는 제 어머니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지만, 그녀가 케이든에게 회유당해 레베카 측의 정보를 누설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애초에 쓸만한 정보를 알려준 적은 없지만, 보고 들은 것이 있을 테니까.

“그래도 1황자가 쓰러진 덕분에 그쪽은 조금 느긋이 노려도 될 거다. 어차피 제대로 된 명분은 2황비 전하께서 끌어안고 가셨으니.”

레베카는 황족이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기 황제가 되리라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영향력 있는 황족.

게다가 최근 분위기가 오묘해졌다고 한들 그녀의 외가는 핀들레이 공작가였다.

그런 그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케이든은 아직 그것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이 흐름이 이어지는 사이 3황자 세력을 어떻게 해서든 뒤흔들어야 해. 내부의 결속이 단단해지는 시기를 지나면 떨어트리기 쉽지 않을 테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루드비히가 빙긋이 웃으며 동의했다. 그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생각한 것들을 늘어놓았다.

“전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서즈필드 영식을 이용해 오페라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권을 가져오는 데 집중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그는 그리 영리한 자가 아니니, 행여 서즈필드 자작이 저희의 지시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그 작자의 멍청함이야 내가 제일 잘 알 거다.”

레베카가 코웃음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녀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저는 3황자비를 떼어내죠.”

“……누구?”

“3황자비요.”

루드비히는 차향이 좋다고 말하듯 태연한 기색이었다.

뜻밖의 이름에 잠시 당황했던 레베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3황자비마저 떼어내면 3황자를 크게 흔들 수 있을 테고, 3황자 측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던 자금을 차단할 수 있을 테지만.”

“곧 연말이 다가오는데, 급증하는 자선 행사들에서 눈에 띄는 기부금을 내지 못하면 평판에 분명 큰 타격이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케이든이 레베카를 누르기 위해 일부러 많은 액수를 자선사업에 쓰던 일이 외려 자충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려고?”

“두 사람이 정치적 이해 관계로 맺어진 부부였다면 다른 수를 썼겠지만……. 끈끈한 연인 관계에 흠을 내는 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3황자비의 정부라도 될 셈이야?”

“필요하다면 그래야죠.”

루드비히가 태연히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입가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마음만 먹는다면 3황자비의 정부 자리 정도는 충분히 꿰찰 수 있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러한 말이 자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루드비히가 얼마나 영악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미모를 지닌 그이니, 저것은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리라.

‘물론 두고 봐야 알겠지만.’

연인 관계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레베카의 눈에도 케이든과 디아나는 문자 그대로 그린 듯한 연인으로 보였다.

그런 그들을 떼어놓는 것이 쉬울지는 모르겠으나, 쉽지 않아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베카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때 문득 레베카의 머릿속에 핀들레이 공작의 얼굴이 스쳐 갔다. 그녀는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짧게 고민했다.

‘말해야 하나.’

핀들레이 공작이 숲속에서 마물을 변종 마물로 바꾸어 퍼뜨린 것 같다고.

‘……아니다.’

고민은 짧았다.

핀들레이 공작은 그녀만큼, 혹은 그녀보다 더 영악한 이였다.

루드비히까지 가세해 그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면 분명 꼬리를 밟힐 것이다.

‘게다가 내가 그런 광경을 목격했으니, 제약을 걸려고 들 수도 있고.’

일단은 보류한다. 그것이 레베카가 내린 결론이었다.

* * * 

볕 좋은 아침. 디아나는 벨라를 통해 받아든 초대장을 보고 나지막이 신음했다.

“……그냥 잊어주시길 바랐는데.”

그녀가 손에 든 초대장은 황궁에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투박한 모양새였다. 글씨체마저 주인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처럼 휘날렸다.

<대체 언제 올 건가? 이러다가 찻잎이 다 썩겠네.

-미애나>

‘눈치가 없나? 아니, 눈치를 보지 않는 건가?’

디아나는 초대장이 4황비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다.

엘리엇이 쓰러진 지금, 황궁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암울했다.

그와 가깝게 지내던 3황자와 3황자비 또한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그들에게 파티나 티타임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4황비 미애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제멋대로였다.

‘뮈젤을 통해서 약점 잡을 만한 게 없냐고 물어봤지만 없다고 했었지.’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데다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미련도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연재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한달까.

결국 디아나는 한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채비를 도와줘. 4황비 전하께서 티타임에 초대하셨으니 응당 가봐야겠지.”

“네, 전하.”

디아나는 벨라의 도움을 받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가다듬었다.

디아나의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빗어낸 벨라가 빗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늘 입으신 드레스에는 3황자 전하께서 선물한 머리 장식이 어울릴 것 같은데, 그걸로 마무리해드릴까요?”

그 물음에 디아나의 어깨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움찔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거울 너머로 웃어 보였다.

“머리 장식은 내가 직접 고를게. 그보다 뮈젤을 좀 찾아와 줄 수 있어? 물어볼 게 있어서.”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머리 장식 다는 것 정도는 혼자 해도 괜찮아. 곧 출발해야 하니까 서둘러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벨라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달칵 소리가 나며 방문이 닫히고 나자 디아나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이내 손을 뻗어 한쪽에 놓인 장식함을 열었다.

그러자 한가운데에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한 채 놓여 있는 머리 장식이 보였다.

케이든이 처음 선물한 것이었다.

“…….”

디아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 장식의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케이든은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엘리엇의 일로 정신이 없는 것과 별개로, 그러한 상황을 틈타 그가 그녀와 거리를 두려는 것이 느껴져 신경이 쓰였다.

‘……정말 괜찮은 건지 살피고 싶은데.’

케이든이 바깥에서 밤을 지새우는 나날이 이어지자 자연히 걱정이 들었다. 찾아가서 그의 상태가 어떤지 살피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을 접으려 노력하고 있는 케이든에게는 못 할 짓이 되겠지.

그런 생각에 디아나는 씁쓸하게 장식함을 닫아버렸다. 자신이 내뱉었던 거절이 새삼스러운 무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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