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연지곤지]
“딸아.”
플뢰르는 그제야 멍하니 위버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작은 저를 보는 딸의 눈에 초점이 없음을 깨닫고는 절망스럽게 탄식했다.
“…….”
멀거니 위버 공작을 바라보던 플뢰르는 이내 그의 손을 힘없이 떨쳐내고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위버 공작의 눈에 무언가 결심 비슷한 것이 스쳐 갔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1황자비 전하.”
“…….”
“플뢰르!”
위버 공작이 플뢰르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금 그녀를 제 쪽으로 돌아보게 했다.
그제야 플뢰르가 위버 공작의 존재를 인지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하…….”
플뢰르의 목소리는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버석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손을 대기만 해도 바스러질 마른 장미꽃잎처럼 느껴졌다.
위버 공작이 끝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뱉었다.
“돌아오거라.”
“그게 무슨…….”
“황궁의에게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1황자 전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너는 황궁을 떠나 영지로 돌아오너라.”
“……뭐라고요?”
플뢰르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녀는 조금 전 제가 들은 말이 거짓이길 바라며 위버 공작의 손을 쳐냈다.
하지만 위버 공작은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자신과 똑 닮은 연녹색 눈이 이렇게까지 싸늘해 보일 줄은.
“나 역시 황궁의 일에서는 모조리 손을 뗄 거다. 지금까지는 너와 1황자 전하께서 부탁하여 황위 계승 전쟁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지만, 이곳은 위험해.”
“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게 사위에 이어 하나 남은 딸까지 잃으라는 말이냐!”
플뢰르가 결국 비명을 내질렀으나 위버 공작의 고성이 그녀의 목소리를 덮어버렸다.
플뢰르가 반사적으로 흠칫하는 사이 위버 공작이 고개를 떨궜다. 딸의 어깨를 쥔 그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플뢰르. 내 딸아.”
“…….”
“나는, 너만은, 잃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를 혼자 남겨두고 죽을 수도 없는 일이고.”
1황자 엘리엇이 죽는다면 1황자비인 플뢰르는 죽지 않는 한 평생 황궁에서 머물러야 한다. 짝을 잃은 신발이 신발장 밖을 나서지 못하듯이.
위버 공작은 도저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황궁에 갇혀 여생을 보낼 딸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1황녀가 후환을 남겨둘 리가 없어. 1황자 전하를 옹호하던 세력들을 확실히 끌어들이려면 플뢰르마저 없는 편이 깔끔할 테니.’
그럴 바에는 엘리엇이 아직 살아있는 지금, 요양을 핑계로 플뢰르를 황궁 바깥으로 빼돌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플뢰르가 황궁 바깥에 있는 상태로 엘리엇이 사망한다면 공작 부인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핑계로 들어 공작저에 두고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
위버 공작의 눈에서 그러한 속내를 읽어낸 플뢰르가 허탈하게 실소했다. 공작의 손을 피해 어깨를 비튼 그녀가 바람 꺼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세요.”
“…….”
“이 사람이…… 아버지를 얼마나, 얼마나…….”
“나도 안다.”
“…….”
“나도 알아…….”
위버 공작이 괴롭게 눈을 감았다.
[조금 민망한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겐 장인어른이 마치 친아버지 같습니다.]
그라고 해서 엘리엇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겠는가. 이렇게까지 모진 말을 내뱉고 싶었겠는가.
처음에는 딸아이가 너무도 좋아한다니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가 아무리 딱딱하게 굴어도 굴하지 않고 웃음을 내비쳤다.
그 곁에서 함께 행복해하는 딸아이를 보고 있자니 공작 역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풀렸다.
[케이든 세이릭 블루벨이오.]
몸이 약한 엘리엇이 저 대신 3황자 케이든을 지지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사람이 착하다지만 멍청한 것과 착한 것은 다르니까.
하지만 막상 엘리엇을 통해 ‘제대로’ 보게 된 3황자는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황제상이었다.
정중하고, 또 다정하면서도 진중하다.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고 모두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위버 공작이 본 케이든은 그런 사람이었다. 차마 마음에 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수년간 저를 감싸 안는 물의 앞에서는 제 형태를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다.
공작에게 엘리엇과 케이든은 그런 이들이었다.
‘그래도…….’
단지, 그들보다는 하나뿐인 딸인 플뢰르가 더 소중할 뿐이었다.
아무리 기껍다고 한들 태어난 순간부터 긴 시간을 함께해온 자식과 그들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
이미 죽음이 확정되다시피 했다는 엘리엇을 두고 비교하자면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
“너는 이 아비를 버릴 생각이냐, 플뢰르?”
위버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에 플뢰르의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잠시 제 아버지의 괴로운 얼굴을 눈에 담던 플뢰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공작을 밀어냈다.
“……가세요.”
“플뢰르.”
“우선 가시라고요. 저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플뢰르가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 말을 뱉었다. 위버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기색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알았다.”
“…….”
“그래도 물 정도는 챙겨 마시거라. 건강도…… 신경 쓰고.”
끝까지 염려를 놓지 못한 위버 공작이 무거운 걸음을 떼어 방을 벗어났다.
그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반대쪽 복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케이든과 디아나가 조용히 지켜보았다.
“…….”
위버 공작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방 안에서 숨죽인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긴 디아나가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삼켰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공작의 판단이 옳긴 해.’
엘리엇을 살릴 방도를 찾지 못했으니, 플뢰르라도 살리고 싶은 거겠지.
‘그나저나…… 케이든은 괜찮을까.’
디아나가 가라앉은 눈으로 케이든을 힐끔 돌아보았다.
디아나와 함께 엘리엇을 문병 왔다가 우연히 위버 공작의 말을 듣게 된 케이든은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속은 참담했다.
‘……이런 와중에도 형님을 중심으로 모였던 귀족들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는 내가 혐오스럽군.’
케이든이 자조 어린 미소를 흘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애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가장하며 디아나에게 속삭였다.
“지금은 형님을 찾아뵙기 썩 좋은 상황이 아닌 듯하니, 나는 패트를 만나고 갈게. 그대는 먼저 3황자궁으로 돌아가 있어.”
“……일찍 오셔야 해요.”
디아나는 행여 케이든이 엘리엇의 일로 인한 자책감으로 자신을 몰아붙일까 봐 걱정되어 작게 덧붙였다.
그러자 케이든이 일순 눈을 크게 떴다. 곧 픽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린 그가 손을 뻗어 디아나의 머리를 잠잠히 토닥였다.
“고마워. 밖에서 레제타 영애와 안타르 경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꼭 함께 가.”
“네. 그럴게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간신히 제대로 된 미소라고 할 만한 것을 지어 보였다.
이후 디아나는 벨라, 안타르와 함께 3황자궁으로 돌아갔다. 안타르는 디아나와 벨라를 3황자궁까지 데려다주고 제4연대로 돌아갔다.
“벨라.”
“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디아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벨라가 곧장 고개를 숙이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자 방구석의 휘장에서 하녀로 분장한 뮈젤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오셨습니까?”
“핀들레이 공작에 관해 조사해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디아나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물었다.
그녀는 지난 사냥대회에서 레베카와 핀들레이 공작의 기류가 심상치 않았던 것을 잊지 않고 뮈젤에게 명령을 내려놓았다.
뮈젤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사람을 시켜 감시해보았더니, 확실히 동선에 수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중간에 한 번씩 어디론가 사라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