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런데도 정말로 전하께서 제 도움 하나 없이, 이보다 더 잘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핀들레이 공작의 말에 레베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변종 마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작의 말은 최근 레베카가 느끼던 자괴감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설령 그것이 레베카의 물음에서 교묘하게 비껴간 대답일지라도 그랬다. 자괴감과 열등감이란 본디 그런 것이었으므로.
디아나가 두 사람을 발견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이런. 제가 말이 너무 심했나 봅니다. 사과드리지요.”
레베카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자 핀들레이 공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레베카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직이 말했다.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황위에 오를 생각만 하십시오.”
“…….”
“제가 반드시 전하를 황제로 만들어드릴 테니까요.”
황제로 만들어주겠다.
그 말은 언뜻 무한한 애정과 지지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레베카는 그의 말이 조금 다른 뜻임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레베카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또 무슨 짓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레베카는 핀들레이 공작이 달리 말을 얹지 않았어도, 다시 케이든을 공격하고 그의 지지기반을 무너트리기 위해 총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핀들레이 공작’이라는, 그녀가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변수가 생겼다는 것이 미치도록 불안했다.
“글쎄요.”
하지만 핀들레이 공작은 그런 레베카의 속을 모르는 듯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가 기묘한 안광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숲 바깥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작의 잇새로 새어 나온 작은 중얼거림이 용케 디아나의 귀에 닿았다.
“어차피 처리해야 할 일을 조금 앞당기는 정도?”
디아나는 무의식중에 공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움직임에 그녀의 머리카락 끝이 근처의 수풀에 걸리며 바스락, 하는 소리를 냈다.
“……누구냐!”
그 기척을 기민하게 눈치챈 레베카가 고개를 휙 돌렸다.
디아나는 그녀가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오자 황급히 숨을 죽이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
레베카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디아나의 머리카락이 걸렸던 수풀을 응시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불시에 손을 뻗어 근처의 나무를 짚어 보았다.
‘흡.’
그로 인해 디아나와 레베카의 얼굴이 한 뼘 차이만을 남기고 가까워졌다.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한동안 미심쩍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레베카는 이내 몸을 물리며 공작에게로 돌아갔다.
디아나는 레베카가 움직이며 기척을 내는 틈을 타 그들로부터 멀리 도망쳤다.
“하…….”
디아나는 더는 핀들레이 공작과 레베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달린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그녀는 혼란에 젖은 얼굴로 조금 전 본인이 보고 들었던 것들을 복기했다.
[……또 무슨 짓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레베카가 공작에게 건넨 그 말.
그것은 마치, 공작이 레베카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내분인가?’
디아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고민에 잠겼다.
레베카의 강력한 지지기반 중 하나인 핀들레이 공작가와 그녀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다면 케이든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다만 레베카의 표정이 어딘지 찜찜했다. 감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한동안 더 고민에 잠겨 있던 디아나는 곧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정말 문제가 생긴 거라면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 때 어떻게든 드러나겠지.’
지금 그녀가 확인해야 할 것은 케이든과 플뢰르, 엘리엇의 상태였다. 그녀는 빠르게 숲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디아나가 숲을 빠져나왔을 때.
“……엇! 정신 좀 차려봐요, 제발……!”
그녀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쓰러진 엘리엇을 붙잡고 오열하는 플뢰르의 모습이었다.
* * *
사냥제는 변종 마물의 갑작스러운 습격, 1황자 엘리엇이 쓰러지는 일 등 각종 사건 사고로 인해 소란한 가운데 막을 내렸다.
황족들은 1황자 엘리엇의 상태를 보다 기민하게 살피기 위해 급하게 수도로 돌아갔고, 사냥제를 위해 모여들었던 귀족들 역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자면, 1황자 엘리엇은 다른 이들과 함께 천막 아래에서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기던 중 갑자기 호흡 곤란을 일으키며 쓰러졌다고 했다.
하지만 독 때문이라고 보자니 그와 한 주전자를 쓴 다른 귀족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멀쩡하여 신빙성이 떨어졌다. 실제로 당시의 티타임 자리를 꼼꼼히 조사했음에도 독은 검출되지 않았다.
황후와 플뢰르, 디아나, 케이든은 황궁으로 복귀하자마자 황궁의에게 엘리엇을 보였다.
디아나는 자신이 회귀하기 전 들었던 것보다도 심각해 보이는 엘리엇의 상태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는 분명 치료 기간이 길기는 해도, 치료 후에는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하지만 정신을 잃고 침대에 누워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는 엘리엇의 목은 온통 보랏빛 멍으로 얼룩덜룩했다.
그러한 증상들에 대해 전해 들은 바가 없었기에 디아나는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걱정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황궁의의 표정 또한 어둑했다. 그는 긴 진찰과 치료 끝에 무거운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황후 폐하!”
황궁의의 말을 들은 황후가 이마를 짚더니 휘청거렸다. 플뢰르가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그녀를 붙들었다.
케이든은 당장이라도 황궁의를 향해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듯 엘리엇이 누운 침대 시트를 찢어질 듯 움켜쥐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처절한 목소리를 냈다.
“……정말 아무런 방도가 없는가? 이유라도 알아낼 수 없었어?”
“……죄송합니다, 3황자 전하. 하지만 1황자 전하에게선 그 어떤 독도 발견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쓰러지기 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으십니다.”
“어떻게 그런……!”
“그만…… 그만 하세요, 전하.”
결국 울컥한 케이든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창백한 얼굴의 플뢰르가 케이든을 만류했다.
그녀는 황후를 부축한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시금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
“다들…… 잠시라도 돌아가 주세요.”
평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어떻게 해서든 케이든과 디아나를 챙기려 애쓰던 플뢰르였다.
그런 그녀가 내리는 축객령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기에, 케이든과 디아나는 별말 없이 3황자궁으로 돌아갔다.
플뢰르는 같은 방식으로 황궁의를 제외하고는 최소한의 사용인만을 궁 안에 두고 사람들을 내보냈다.
이후 플뢰르는 황궁의의 도움을 받아 황후를 보살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엘리엇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과 물만을 섭취하고는 매 순간 엘리엇의 상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므로 나날이 수척해져 갔다.
그러던 중, 플뢰르의 친아버지인 위버 공작이 황후궁을 방문했다.
그는 1황자비가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는 말을 들었으나 딸이 걱정되어 궁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있는 사위, 그런 그의 손을 기도하듯 붙잡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딸의 모습을 보고 움찔 멈춰 섰다.
“……플뢰르.”
“…….”
위버 공작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플뢰르를 불렀다. 그러나 플뢰르는 친아버지의 음성을 듣고도 여전히 엘리엇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위버 공작이 울컥하여 발을 떼었다. 플뢰르의 곁에 선 그가 손을 뻗어 딸의 어깨를 감싸 저를 보게 했다.
손 안에 들어온 어깨가 고작 몇 주 사이에 적나라할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딸아.”
플뢰르는 그제야 멍하니 위버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공작은 저를 보는 딸의 눈에 초점이 없음을 깨닫고는 절망스럽게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