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45)

97화

케이든은 불안감에 쫓겨 엄청난 속도로 미친 듯이 업무를 처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부를 확인하자마자 곧장 자리를 박차고 디아나를 찾아 나섰다.

성의 다른 곳을 둘러보고 있을 파트라슈를 부를 정신도 없었다.

‘어디 있지?’

케이든은 저택 경비병의 말에 따라 디아나가 사라졌다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아서인지, 케이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과일나무 근처에서 디아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디…….”

반색하며 디아나를 부르려던 케이든이 저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숨마저 죽인 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몇몇 농민들에게 둘러싸여 과일 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조심스럽게 잡고…….”

디아나는 농민들의 지도에 따라 조심조심 푸른색 사과 꼭지로 가위를 가져다 댔다. 그녀는 저러다 식은땀을 흘리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진중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작게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사과가 디아나의 손 안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농민들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거 보게. 이번에는 제대로 한 것 맞지?”

“맞습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비 전하! 다음에는 이쪽도 와보시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 내가 먼저야! 새치기하지 말라고!”

농민들이 훈훈한 소란을 벌이자 디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안타르에게 사과를 보여주며 무어라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안타르가 디아나를 마주 보며 미소를 띠었다.

사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웃는 그들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던 것은 둘째치고, 너무도 잘 어울렸다.

안타르가 사과를 살피는 디아나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항상 무료하고 차분했던 탁한 푸른색의 눈에 드물게도 따스한 빛이 어렸다.

케이든은 안타르의 얼굴이 자신이 디아나를 볼 때와 닮았음을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

누군가 머리를 한 대 세게 치고 간 기분이었다.

그린 듯이 어울리는 디아나와 안타르를 보고 있자니 잊고 있던 불안감이 불쑥 그를 덮쳤다.

디아나와의 이혼은, 디아나가 아닌 다른 여자가 제게 손댈 빌미를 주게 되는 것과 동시에.

……디아나 역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게 되는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가슴으로 깨달은 것은 지금이었다.

심장 한구석이 서걱서걱 베여나가는 듯한 느낌에 케이든은 한참이나 제자리에 붙박인 채 시큰한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 * * 

업무를 마치고 별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케이든은 불쑥 제안했다.

“이 근처에 별궁과는 다른 느낌으로 굉장히 예쁜 호숫가가 있다는데. 잠깐 들렀다가 갈까? 할 말이 있어.”

“아…… 좋아요.”

디아나는 그의 제안에 머뭇거리다가 승낙했다.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망설였으나, 그와 별개로 그녀 역시 그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거절하자. 그게…… 맞아.’

디아나는 무릎 위로 치맛자락을 꾹 말아쥐고 그리 다짐했다.

케이든은 마차의 벽을 두드려 마부에게 목적지를 바꾼다고 말한 것 이외에는 드물게도 그녀와 비슷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윽고 마차는 호숫가에 도착했다. 디아나는 케이든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다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세상에.”

순간적으로 케이든에게 해야 할 말,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 등을 모조리 잊을 만큼 멋진 광경이었다.

주홍빛 노을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널따란 호수의 수면은 주홍색 다이아몬드를 흩뿌려놓은 것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 주위로 펼쳐진, 들판 같은 낮은 동산의 풀과 꽃들이 바람에 살랑였다.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이었음에도 그 자체로 장엄한 자연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디아나는 감명받은 얼굴로 케이든의 손을 놓고 천천히 동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호위인 안타르가 무의식중에 그 뒤를 따르려 하던 차.

“경은 여기서 기다리지.”

케이든이 안타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타르는 막 한 발을 떼려다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키는 똑같다 싶을 정도로 엇비슷했다.

디아나의 호위가 되기 전, 안타르가 언제나 그와 디아나의 앞에서 허리를 숙이며 자세를 낮추고 있었기에 몰랐던 부분이었다. 제대로 몸을 펴니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케이든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하지만 단호하게 재차 말했다.

“경은 이곳에 남아있도록.”

‘……아.’

그 얼굴에서 경계의 빛을 읽어낸 안타르가 속으로 탄식했다.

들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낭패한 얼굴로 급하게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췄다.

그러나 이미 안타르가 순간적으로 작게 입을 벌리며 죄지은 사람의 표정을 하는 것을 케이든이 목격한 후였다.

‘……진짜였군.’

케이든은 안타르의 반응으로 그가 정말 디아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씁쓸해졌다.

그는 잠시간 제게 고개를 숙인 안타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디아나를 따라갔다.

안타르는 케이든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도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한편, 디아나는 올라가는 길의 중간쯤 멈춰서서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정말 예쁘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케이든이 다가왔다. 그는 주변 풍광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디아나를 보고 작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

“네. 정말로요.”

“월포드 남작에게 근처에 사람이 적은, 유명한 곳이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이곳을 알려주더라고.”

“……사람이 적은 유명한 장소라니.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신 것 아니에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긴 하지. 그래서 싫어?”

케이든이 장난스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디아나는 그 말에 마주 웃었지만 전처럼 ‘싫지 않다’라는 말은 내뱉지 않았다.

그 사소한 차이마저 케이든을 미친 듯 불안하게 만들었다.

조금 전, 안타르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왔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케이든은 결국 불안함에 등 떠밀리듯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국에는 여기보다 더 유명한 곳도 많아.”

“…….”

“같이 다니자. 나랑.”

케이든이 그렇게 청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노을과 꼭 닮은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을 본 디아나는 깨달았다.

‘아.’

이 대화가 지난번, ‘고백’에 관해 이야기하던 것의 연장선이라는 걸.

막상 이야기를 꺼낼 순간이 다가오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어찌 보면 체념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디아나는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그녀가 그 자세로 케이든을 마주 보고 서서 웃었다.

“케이든.”

“……응.”

케이든은 다정히 웃고 있는 디아나의 얼굴에서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읽었다.

그녀의 웃음에 반사적으로 심장이 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의 말을 막아야 한다고 아우성치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

시선을 차분히 내리깐 디아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

솨아아-

짙은 침묵 위로 바람이 파도처럼 꽃과 들풀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무엇에 관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는 그저 사과 한마디.

하지만 케이든과 디아나 둘 모두 그것이 케이든의 ‘고백’에 대한 사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과가 아니라…….

‘……거절.’

케이든은 허벅지 옆으로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잠시간 숨을 골랐다.

그는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이다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자아내 물었다.

“……이제야 묻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

“그대가 이혼을 바라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