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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90/145)

90화

“일이 좀 많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디아나는 무릎 위에 토끼 가면을 올려 두고 빙긋이 웃었다. 그녀와 케이든은 다시 가면을 벗고 후드를 뒤집어쓴 차림이었다.

처음에는 토끼 가면이 제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거리를 배회하는 내내 쓰고 있었더니 이제는 조금 정이 든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케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맞아. 그래도 내년에는 부디 아무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

웃으며 말을 잇던 케이든이 순간 낭패 어린 얼굴을 했다.

‘아, 실수했다.’

디아나는 여전히 그와의 이혼을 바라는데, 1년 뒤의 건국제를 언급하다니. 바보 같은 짓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저쪽 봐. 시작한다.”

케이든은 당황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가장행렬이 시작되고 있었다.

화려한 가면과 가발, 옷을 걸친 사람들이 춤을 추며, 혹은 손을 흔들며 수도를 가로질렀다.

색색의 종잇조각이 흩날리고, 그 사이로 반짝거리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 나오자 눈이 황홀해졌다.

케이든은 디아나와 함께 박수를 치다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물었다.

“디아나.”

“네?”

“저기 행렬의 가장 앞쪽에 있는 사람들 말이야. 뭐로 분장했는지 알겠어?”

“음……. 아! 초대 5인의 정령사를 나타내는 건가 보네요.”

그의 물음에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던 디아나가 탄성을 내뱉었다.

가장행렬의 가장 앞에는 제각기 빛, 불, 물, 바람, 대지를 형상화한 듯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케이든이 정답이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물었다.

“그럼 초대 5인의 정령사와 얽힌 건국 신화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네. 그럼요.”

모를 수가 없죠.

디아나는 뒷말을 목 안으로 삼키며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오래전. 대륙에 그 어떠한 나라도, 정령사도 존재하지 않았을 무렵.

마물들의 우두머리인 마룡, 그리고 마물들은 매일같이 마을을 습격하고 인간을 해쳤다.

[아아악!]

[살려 줘!]

수많은 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에 울부짖었고, 소중한 이들을 무력하게 떠나보냈다.

사람들은 제발 이 고통을 끝내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그리고 마침내 신이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한 것인지, 최초로 ‘정령’과 계약한 5인이 나타났다.

빛의 데이지 블루벨.

불의 니오타 핀들레이.

물의 발포르 위버.

바람의 알렌 윅스빌.

땅의 맥시 옐링.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그들은 마물에 대항하기 위해 매일같이 마력을 다루는 법을 연습했고, 그 결과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했다.

정령을 등에 업은 그들은 점차 마물들을 대륙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룡의 심장에 데이지 블루벨의 검이 꽂히며 마물 대범람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데이지 블루벨은 발하나스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초대 5인의 정령사 중 니오타 핀들레이가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니오타 핀들레이는 데이지 블루벨을 제 목숨만큼이나 아꼈고, 금실이 좋은 황제 부부의 통치 아래 발하나스 제국은 대륙 제일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거기까지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발하나스 제국의 건국 신화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초대 정령사들이 ‘5인’이 아닌 ‘6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초의 정령사는 사실 5인이 아닌 6인이었으며, 그들 중 한 사람이 어둠 속성의 정령사를 역사서 속에서 내쫓았다.]

회귀 전, 레베카는 마물 토벌을 다녀오던 길에 잠시 들른 마을에서 그런 야사가 존재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즈필드 저택에서 디아나를 만났고, 그 야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디아나를 거두었다.

이후로 레베카는 디아나가 어둠 속성의 정령사라는 것을 증명할 자료를 백방으로 찾아 헤맸다.

그랬기에 디아나는 초대 5인의 정령사, 발하나스의 건국 신화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어둠 속성의 정령사를 역사서에서 지웠다는 사람이 대체 누구지?’

디아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단순히 속성의 대비됨으로 생각한다면, 빛 속성 정령사였던 데이지 블루벨의 짓일까?

디아나는 조금 심란한 마음으로 케이든을 힐긋 일별했다.

만약 정말로 데이지 블루벨이 어둠 속성의 정령사를 내쫓았던 것이라면, 디아나가 어둠 속성 정령사의 존재를 증명하려 드는 것이 곧 케이든의 정통성에 크나큰 위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케이든 역시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데, 이지…… 블……루벨?]

‘분명 초대 황제의 이름이었지.’

케이든은 낮에 밀실에서 발견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종이 뭉치에 적혀 있던 이름을 상기했다.

데이지 블루벨이 그 밀실을 만든 장본인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그 밀실을 만들어 두고, 후손들에게는 언질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

밀실에는 사용 목적을 짐작할 수 있게끔 하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디아나와 케이든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펑―!

폭죽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며 하늘에 색색의 불꽃이 피어났다. 건국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놀이였다.

디아나와 케이든이 폭죽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비롯해 건국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 모두가 하늘을 수놓는 불꽃의 향연을 눈에 담으며 감탄과 탄성을 쏟아 냈다.

디아나는 하늘에 피어난 꽃 무리에 시선을 둔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예쁘다…….”

복잡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깨끗이 비워졌다. 그 자리를 오색의 불꽃이 채워 나갔다.

문득 후회가 일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았던 걸까.’

회귀 전. 디아나는 언제나 레베카의 뜻에 따랐고, 레베카는 언제나 건국 기념 무도회장을 지키며 정치적 입지를 다지느라 바빴다.

자연히 디아나 또한 그녀의 곁을 지키느라 건국제를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억울하다고, 아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의 그녀에게는 레베카가 세상의 전부였으므로.

하지만 이렇듯 밤하늘에 떠오른 불꽃들을 보고 있자니 그 시간이 사무치게 후회되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그렇게 죽게 될 줄 알았다면, 한 번이라도 레베카의 곁을 떠나 밖으로 나와 봤을 텐데.

이제 와서는 전부 의미 없는 가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하늘을 바라보던 케이든이 문득 고개를 돌려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디아나, 저것 좀 봐. 꼭 토끼 같은 모양도…….”

다음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말과 숨을 멈췄다.

디아나를 눈에 담는 순간 저절로 그리되었다. 숨결 하나까지 온통 그녀에게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디아나는 미소 띤 얼굴로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옅은 청보라색 눈 위로 색색의 불꽃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장식하고 있는, 그가 선물한 꽃이 후드 자락에 밀려 내려가 있었다.

“……?”

제 옆얼굴에 닿아 오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디아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케이든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사르르 웃으며 행복이 그득 어린 음성으로 속삭였다.

“너무 예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웃음을 눈에 담는 순간.

‘아.’

어찌할 도리 없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케이든은 천천히 손을 뻗어 디아나의 머리 장식을 제자리에 단단히 고정해 주었다.

눈을 깜박이며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케이든은 본래 오늘, 이 자리에서 디아나에게 제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 없었다.

낮의 사건으로 인해 매 순간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디아나에게 제 진심이라는 부담까지 얹어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는 적어도 디아나가 아무런 문제 없이 그의 마음에 대해서만 온전히 고민해 볼 수 있을 때, 제 속내를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아무리 주워 담아 보아도, 문득 흘러넘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입술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이.

“……좋아해.”

디아나를 향한 마음이 위태롭게 출렁이다가, 끝내 입 밖으로 쏟아졌다.

“좋아해, 디아나.”

케이든이 조금 전의 디아나를 따라 하듯이, 눈을 접어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용히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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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현실적인 웃음에, 말에.

디아나의 사고가 그대로 정지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오롯이 사로잡은 것은 불꽃놀이도, 가장행렬도 아닌.

케이든의 얼굴에 떠오른 한 줌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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