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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89/145)

89화

이후 케이든과 디아나는 서방에서 한창 유행이라는 찻잎 점도 보고, 이런저런 공연도 구경하다가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당신에게 황금빛 행운을 가져다줄 새끼 돼지를 골라 보세요! 1번부터 8번까지, 총 여덟 마리의 새끼 돼지들이 곧 시작될 경기를 위해 대기 중입니다!”

중앙 광장의 구석에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들어 번호를 적어 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케이든과 디아나가 나란히 걸음을 멈췄다.

“해 볼래?”

“해 보실래요?”

동시에 서로를 향해 물음을 내뱉었던 두 사람이 멈칫했다가 이내 웃어 버렸다.

그들은 손을 맞잡은 채 돼지들의 주위를 둘러싼 울타리 앞으로 다가갔다.

자그마한 아기 돼지들이 귀를 푸르르 털거나 서로의 꼬리를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디아나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울타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케이든, 당신은 어느 아이한테 걸 거예요?”

“나는 저 녀석한테 자꾸 눈길이 가네.”

케이든은 활발하고 애교 넘치는 행동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돼지를 가리켰다.

“그대는?”

“음, 저는…….”

디아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여덟 마리의 새끼 돼지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중 유난히 친숙한 느낌을 주는 돼지를 발견한 그녀가 고개를 멈추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장 왜소한 돼지를 가리켰다.

“저는 저 애로 할게요.”

“왜?”

“그냥 왠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 말에 케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가 고른 돼지와 디아나가 고른 돼지, 두 마리의 번호를 적어 주최인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주최인이 준 좌석 표를 가지고 근처에 설치된 의자로 가서 앉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가 전부 채워졌다.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야!”

“빨리 시작해라! 이러다가 목 빠지겠어!”

“하하, 이렇게 열화와 같은 성원이라니.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레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성난 관중들을 본 주최인은 돈을 세다가 말고 급히 돈뭉치를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활짝 웃었다.

주최인은 울타리 안에서 뛰놀던 돼지들을 한 마리씩 들어 칸막이가 세워진 출발선에 내려놓았다. 그는 모든 돼지가 이상 없이 출발선 앞에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셋을 세는 것과 동시에 손을 내리겠습니다. 그러면 돼지들이 달리기 시작할 겁니다. 과연 500만 모트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지! 하나, 둘…… 셋!”

와아아아!

주최인이 손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돼지들이 출발선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잔뜩 흥분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쳤다.

“3번! 3번이 앞서 나간다!”

“아니야, 7번이야!”

“2번, 힘내라!”

“3번이 이기겠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돈을 건 돼지를 열렬히 응원했다.

개중 케이든이 돈을 건 3번 새끼 돼지가 가장 빨랐다. 3번이 본격적으로 다른 돼지들을 추월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발을 굴렀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대로 결승선까지 쭉 달려라!”

디아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그런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자신이 돈을 건 4번 돼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직후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분명 새끼 돼지의 형상이던 4번 돼지의 얼굴이 파도치듯 요동치고 있었다. 그 섬뜩한 광경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이내 4번 돼지의 주둥이가 쑥 자라나며 눈이 붉게 물들더니, 돼지의 입 안에서 불덩이가 튀어나왔다. 무언가 행동을 취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콰앙!

“꺄아아악!”

“마, 마, 마물이다!”

“변종 마물이 섞여 있었나 봐!”

돼지들을 가두고 있던 구조물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주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디아나, 이쪽으로 와!”

케이든은 불덩이를 내뿜으며 날뛰는 마물을 피해 다급하게 디아나를 끌어당겼다. 그가 사람들과 디아나를 마물이 있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대피시키며 이를 악물었다.

‘검이라도 뽑아 들었다가는 그대로 정체를 밝히는 꼴이 될 텐데. 그랬다가는 1황비 측에서 어떻게 해서든 자질 문제를 걸고넘어지려 하겠지.’

케이든의 손끝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듯 움찔거렸다.

하지만 정령의 힘을 빌려 만들어 낸 금빛 검, 혹은 무기들은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금빛 무기는 어느새 ‘3황자’의 상징이나 다름없어졌기에, 그가 쓸 만한 무기를 꺼내 들자마자 3황자가 무도회장이 아닌 저잣거리에 있었다는 소식이 1황비 측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케이든이 끝까지 무도회장을 지키지 않고 중간에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이유로 들어 그의 자질을 왈가왈부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가는 곤란해졌다.

‘혼자였다면 모르겠지만, 디아나까지 함께 입방아에 오르내릴 테니까.’

“엔카.”

결국 케이든이 할 수 있는 건 빛의 하급 정령 엔카를 이용해 경비대가 도착할 때까지 변종 마물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변종 마물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제 시야를 가리는 금빛 나비들이 거슬렸는지 성난 소리를 내지르며 날뛰었다.

“이쪽! 이쪽으로 오십시오!”

케이든은 급한 대로 근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경기장의 잔해를 몽둥이처럼 쥔 채 사람들에게 외쳤다.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서둘러 그의 등 뒤로 모여들었다.

디아나는 케이든과 함께 사람들의 대피를 돕다가 돌연 등줄기로 내리꽂히는 섬뜩한 감각에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힘을 끌어올려 엔카를 떨쳐 낸 변종 마물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아이와 그의 부모를 향해 달려드는 광경이 느리게 눈에 들어왔다.

“아……!”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눈이 찰나 선명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유로.’

서걱―

직후, 허공으로 뻗어 나간 가느다란 보랏빛 선이 소리 없이 마물을 반으로 갈랐다.

간발의 차를 두고 목숨을 구한 아이와 부모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무슨…….>

한편, 케이든과 엘판드는 순간적으로 곁에서 마물에 가까운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이라고는 창백한 얼굴의 디아나뿐이었다.

‘설마 근처에 다른 변종 마물이 남아 있었나?’

케이든은 디아나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경계심 서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은 디아나에게로 돌아왔다.

‘하지만…….’

분명 조금 전, 정확히 디아나가 서 있는 방향에서 섬뜩함이 느껴졌는데.

“케이든?”

디아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무구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혼란스러워하던 케이든이 입술을 달싹이던 차였다. 저 멀리서 경비대가 허둥지둥 달려와 소리쳤다.

“괜찮으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최인은 어디 있나!”

“아이고, 저는 정말로 저런 변종 마물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주최인은 주변 환경에 맞추어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변종 마물이 존재할 줄 몰랐다며 울부짖었지만, 경비대는 진상을 조사할 의무가 있었기에 우선 그를 포박해 데려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사이, 사람들은 혼란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그들을 보호하려 애썼던 케이든과 디아나에게 몰려들어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바람에 케이든은 디아나에게서 느꼈던 섬뜩함에 관해 묻지 못한 채 의아함을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무의식 한구석에는 점차 손톱만 한 의심이 쌓여 갔다. 그렇게 모인 의심의 조각은 이내 하나의 의문이 되었다.

혹시 디아나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의문.

* * *

건국제의 밤은 아름다운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져, 케이든과 디아나는 가장행렬을 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일이 좀 많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디아나는 무릎 위에 토끼 가면을 올려 두고 빙긋이 웃었다. 그녀와 케이든은 다시 가면을 벗고 후드를 뒤집어쓴 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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