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45)

86화

이윽고 달이 황궁의 첨탑 끝에 걸리며 건국 기념 무도회의 시작을 알렸다.

아를라스 왕국, 라비크 왕국을 비롯해 각국에서 건국제를 기념해 모여든 사신단은 샹들리에 아래에서 물결처럼 춤추는 남녀를 보고 너 나 할 것 없이 감탄을 흘렸다.

“아름답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한 달 정도 만에 결혼식을 치르셨다더니, 과연 척 보기에도 굉장히 잘 맞는 한 쌍이로군요.”

“마치 초대 황제와 그의 반려를 보는 듯합니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동의할 정도로, 서로를 틈 없이 끌어안은 채 춤을 추는 케이든과 디아나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케이든은 유려하게 춤을 이어 가며 이따금 디아나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면 디아나가 볼을 붉히며 그에게 무어라 핀잔을 주다가 끝내 웃어 버리고, 케이든이 장난스럽게 키득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러한 광경에서 그들이 얼마나 서로에게 푹 빠져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간질거리게 했다.

이윽고 음악이 끝났다. 케이든과 디아나가 움직임을 멈추고 사람들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한바탕 박수갈채가 지나간 후, 케이든과 디아나가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에서 물러났다.

그들의 주위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인 양 눈치를 보고 있던 사신단이 앞다투어 달려갔다.

“3황자 전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3황자 전하. 지난번 건국제에서는 제가 낯선 탓에…….”

“이번 방어전에서 큰 활약을 하셨다지요. 오, 이분이 바로 대륙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소문의 주인공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3황자비 전하.”

지난 몇 년간, 건국제의 행진을 도맡았던 것은 레베카와 제1연대의 기사들이었다.

하여 타국에서는 암묵적으로 레베카를 황태녀로 여겼고, 사신들 또한 제국에 방문하면 그녀에게 대화를 건네기 바빠 케이든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올해, 케이든이 극적으로 방어전에서 승리하여 우승을 거머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솔직히 그 소식이 들렸을 때는 결과가 조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제국에 직접 방문해 케이든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런 의심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사신단의 머릿속에는 건국제 행진에서 흠잡을 곳 없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던 그의 모습, 그리고 조금 전 춤을 추던 그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난 시간 동안 케이든을 무시한 만큼 필사적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려 애썼다.

케이든은 너무 비굴하지는 않게, 그러나 너그러운 모습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디아나 또한 그의 곁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대화에 참여했다.

사신들은 케이든이 저와 제 나라에 앙심을 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서야 만족하여 그를 떠났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여 떠나보내고 나니 어느새 케이든과 디아나의 주위는 상당히 한산해져 있었다.

“디아나, 나가자.”

케이든은 사람들의 시선이 처음과 달리 여기저기로 분산된 것을 확인하고 작게 속삭였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나란히 손을 잡은 채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이쪽으로.”

케이든은 복도 끄트머리의 휴게실로 디아나를 잡아당겼다. 그가 방 안에 미리 준비해 둔 옷 꾸러미를 내밀고 헛기침을 했다.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준비했는데, 그…… 치수가 맞을지는 모르겠어. 우선 안에서 입고 나와 봐.”

케이든은 그렇게 말하고는 디아나를 휴게실 안쪽의 드레스 룸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얼마 후 디아나는 옷을 갈아입고 한쪽 팔에 클로크를 걸친 채로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

그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어느새 저처럼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케이든을 빤히 응시했다.

“옷이 아주 꼭 맞던데요.”

“흠, 그래? 그거 다행이네.”

하지만 케이든은 시치미를 뚝 떼며 그녀의 팔에 걸려 있는 클로크를 집어 들었다. 그가 그것을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고 리본을 매어 주며 물었다.

“특별히 하고 싶은 거나, 가고 싶은 곳은 없어?”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케이든은요?”

“그대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갈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저는 처음이라 아는 게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디아나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그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나 평소 같았다면 아프다고 칭얼거리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을 그가 우뚝 손을 멈췄다.

“디아나. 큰일 났어.”

“네? 무슨…….”

디아나는 케이든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흠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간을 살짝 좁힌 케이든이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못된 심보라는 건 아는데, 그대가 처음으로 즐기는 건국제를 내가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아졌어.”

그 말을 들은 디아나가 황당함에 입을 작게 벌렸으나 케이든은 나름 진심이었다.

그는 어릴 적 엘리엇과 함께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 건국제를 즐긴 적이 있었기에, 큰 행사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자정이 가까워지면 가장행렬이 거리를 가로지르기 시작하고, 종소리로 자정을 알리는 대신 하늘로 색색의 불꽃을 쏘아 올린다는 사실과 같은 것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디아나의 ‘처음’이 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들떴다. 그가 진지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 좀 변태 같나?”

“……왜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처럼 말씀하시는 거죠?”

“뭐, 그래도 그대는 이런 나를 좋아하잖아. 그렇지 않나?”

케이든은 디아나의 클로크 리본을 마무리 지으며 재빨리 그녀의 코끝에 입 맞추고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디아나는 뻔뻔한 그와 달리 귀를 붉히며 그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실 거예요?”

“미안, 미안. 이제 그만할게. 슬슬 갈까?”

케이든이 웃음을 터트리며 항복 자세를 취했다. 직후, 그가 마력을 움직이며 나직한 부름을 읊조렸다.

“엘판드.”

그 부름에 순간적으로 실내에 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허공에 흰 빛무리가 어른거리더니 이내 흰 표범이 꼬리 끝을 살랑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든이 엘판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후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소개할게. 디아나, 이쪽은 빛의 상급 정령인 엘판드. 엘판드, 이쪽은 디아나.”

그들은 황궁을 몰래 빠져나가야 했으므로, 거리까지 엘판드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디아나는 저를 빤히 응시하는 금빛 눈을 보며 애써 긴장을 감추고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닿으면 내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눈치챈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다른 정령사들 중에 그런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긴 했는데…….’

케이든으로부터 미리 엘판드를 타고 이동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무도회장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더 철저히 마력을 갈무리해 두었다.

그녀는 케이든처럼 정령을 소환해 둔 것도 아니니, 엘판드에게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정령사라는 사실을 들키지는 않겠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엘판드 님.”

<……음? 네가 그렇게 공손하게 말할 줄도 알았어?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렇게 거리낌 없이 구는 거지?>

‘유로, 조용히 좀 해…….’

디아나가 머뭇거리다가 엘판드 쪽으로 손을 내밀고 인사하자, 머릿속으로 유로가 구시렁대며 불평했다.

디아나는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로 엘판드가 서서히 제게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크르릉.

낮게 목을 긁는 소리를 낸 엘판드가 디아나의 손 가까이 코를 들이밀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디아나의 심장이 작게 뛰었다.

‘그냥 넘어가라, 제발.’

그녀는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엘판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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