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누님.”
케이든이 나직이 입을 떼자 습관적으로 투덜대던 카를롯타가 헙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이 그녀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작게 물었다.
“입구를 부쉈던 그 부엉이 가면. 어디로 갔습니까?”
그 물음에 카를롯타는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보면 몰라? 나는 아래에 묶어 두고, 너만 둘러업고 사라지더니 곧 돌아와 나를 여기에 꺼내 두고 사라졌어.”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까? 목소리는?”
“가면을 벗지도 않았고, 내내 한마디도 안 하더라.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꽁꽁 싸매서는.”
카를롯타가 입을 삐죽였다. 그녀는 부엉이 가면이 케이든만 데리고 사라질 때, 저도 데려가라며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으나 부엉이 가면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사라졌었다.
홀로 돌아온 이후에도, 이거 풀라는 그녀의 발버둥을 깡그리 무시한 채 그녀를 밀실 바깥에 앉혀 두고 사라졌고.
‘대체 누구길래…….’
케이든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파트라슈는 케이든의 실종 소식을 디아나와 제4연대의 몇몇 기사, 그리고 이 일에 연관된 2황비 측 인물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파트라슈가 주위의 눈을 의식해 조용히 사람들을 움직인 것도 있었고, 애초에 케이든이 사라진 시간은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어디론가 정보가 새어 나간다고 해도 그가 숨이 넘어가기 전에 그를 찾아내기는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내 근처의 인물이라는 건데…….’
부엉이 가면이 2황비 측의 사람이라면, 케이든이 중독됐을 때 그가 죽도록 내버려 뒀으면 뒀지, 그를 살리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디아나, 혹은 제4연대의 누군가가 그를 구했다는 건데…….
‘밀실의 입구를 단번에 부술 만큼의 힘이 있다면 아무래도 정령사일 테고. 그렇다면 제4연대의 기사들뿐인데. 만약 부엉이 가면이 제4연대의 기사라면 내 앞에서 굳이 얼굴을 가릴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의뭉스러운 점들을 하나둘 지워 나가자 남는 것은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말도 안 되지.”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나는 정령사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그가 있는 곳을 찾아냈으며, 또 밀실의 문을 무슨 수로 부수고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터무니없는 가정이었다.
‘차라리 D. 옵스큐르가 직접 찾아왔다는 가정이 더 신빙성 있겠군.’
케이든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내 상념을 한쪽으로 미뤄 둔 그가 카를롯타에게 말했다.
“그 부엉이 가면에 관한 이야기는 우선 함구하십시오. 제가 중독되었던 것 또한.”
“내가 왜 네 말을…….”
“함구하라 하였습니다.”
카를롯타는 발끈해 입을 열었으나 케이든은 살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 기세에 눌린 카를롯타가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 케이든 세이릭 블루벨이 제게 명령한다는 생각에 습관적으로 발끈했던 마음이 가시고 나자 현실이 보였다.
[……젠장.]
욕지거리를 뱉긴 했지만, 케이든은 결국 카를롯타의 위험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고 그녀를 따라와 주었다. 더불어 2황비가 그녀를 찌르려 할 때 막아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를롯타는 케이든이 자신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줄 알았다.
그녀는 1황비의 측근인 2황비의 딸이었고, 지금까지 그에게 저지른 잘못도 상당했으니까.
하지만 케이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본인이 사경을 헤매면서까지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어쩐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리고 2황비로 인해 강제당하긴 했다지만, 객관적으로는 카를롯타 또한 이 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문책이 시작되면 분명 그를 밀실로 끌어들인 그녀의 잘못 또한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케이든에게 더한 무례를 저질러 보았자 사형당할 가능성만 키우는 짓이었다.
결국 카를롯타는 주눅 든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그의 눈치를 보는 그녀는 함부로 입을 열고 다닐 것 같지는 않았다.
케이든은 그녀의 곁에 기사 두 명을 남겨 둔 뒤 밀실 아래로 내려갔다.
“정리는 어떻게 됐나.”
“시신은 우선 한쪽으로 모아 두었습니다. 그, 2황비 전하께서는 이쪽에 계십니다.”
“모서리에 마도구로 보이는 것이 설치되어 있기에 제거했습니다. 잔해는 모아 두었고요.”
케이든의 말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기사들이 움직임을 멈추며 설명했다.
2황비가 고용한 용병들의 시신은 밀실의 입구 옆쪽에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고, 2황비의 시신은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케이든은 피가 말라붙은 바닥 위로 발을 뻗어 2황비의 시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몸을 굽혀 2황비의 시신을 임시로 덮고 있는 망토를 살짝 젖혔다.
“…….”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2황비의 모습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녀의 시신을 수습한 기사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를 다한 것인지 지금 그녀의 눈은 감겨 있었다.
케이든은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망토를 다시 끌어 올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냉정한 얼굴이 된 그가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습격자들 이외에도, 이런 장소가 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은 적이 없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 둔 것인지 최대한 알아내도록.”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차렷 자세를 취하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케이든은 그들과 함께 밀실 구석구석을 뒤지고 살폈다.
하지만 밀실 안은 대체로 텅 비어 있었다. 약간의 초, 그리고 마도구의 잔해가 남아 있었으나 그것은 2황비가 가져다 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케이든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천장과 벽, 바닥을 두드려 가며 숨겨진 것이 없는지 찾아 헤맸다. 그의 직감이 이 장소의 인위적임을 끈질기게 지적하고 있었다.
퉁―
그러던 중 바닥의 어느 부분을 두드리자 아래가 빈 듯한 소리가 울렸다. 케이든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망설임 없이 검을 만들어 바닥을 내리찍었다.
쾅!
작게 먼지가 일며 바닥이 조각조각 부서져 구멍이 생겨났다. 그 안으로 손을 넣자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 낡은 종이 뭉치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지?”
케이든이 미간을 좁히고 중얼거렸다. 그는 손 안의 종이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내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인지 종이에 쓰인 문장들은 그 형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고, 문자도 지금과 달라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케이든은 어릴 적 엘리엇을 따라 초창기 제국 공용어를 약간이나마 익혀 두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읽을 수 있는 부분을 해석했다.
‘데, 이지…… 블……루벨?’
이윽고 하나의 단어를 완성한 케이든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니라면, 종이에 적혀 있는 것은 분명 초대 황제인 데이지 블루벨의 이름이었다.
갈수록 의구심이 커졌다. 케이든은 바닥의 구멍에서 발견한 종이 뭉치를 조심조심 하나로 겹친 후, 그것을 망토에 싸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따로 해석이 필요할 것 같으니 챙겨 둬.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존명.”
* * *
케이든은 밀실에서 발견한 증거들을 가지고 황제에게 돌아갔다. 황제는 케이든과 합의한 끝에 2황비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건국제가 끝나고, 사신단이 돌아간 후로 미루기로 정했다.
발하나스 제국의 영광과 안녕을 기리는 건국 기념일에, 2황비가 혈족인 3황자를 죽이려다가 실패해 목숨을 잃었다는 불미스러운 소식을 알렸다가는 민심은 물론이거니와 타국에조차 좋지 않은 인상을 줄 것이 분명해 내린 결정이었다.
2황녀 카를롯타는 습격 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우선은 건국제가 끝난 후 재판이 열릴 때까지 황족들을 가두는 탑에 연금되었다.
건국 기념 무도회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 약속대로 케이든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디아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