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연지곤지]
“3황자 전하께서 많이 늦으시는군요.”
“허어, 곧 행진이 시작될 터인데, 대체 어디에 계신 것인지…….”
“그러게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방어전의 우승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
본궁의 정문 앞. 건국제 행진을 돕기 위해 모여 있던 귀족들이 불안하게 웅성거렸다. 그들 중에는 황제도 있었다.
“……어떻게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것들이 없어.”
그가 사정없이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건국제 행진의 핵심은 방어전의 우승자였다. 사람들은 매년 방어전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낸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그러니 우승자가 빠진 채로 행진을 강행했다가는 외려 비웃음만 사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몇 분이나 남았지?”
“10분입니다.”
황제는 시종장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사람이라도 급히 데려와 행진에 세워야 할 판이었다.
레베카는 현재 근신 중이긴 하지만, 이전까지의 방어전 우승자로서 식순 역시 숙지하고 있었다.
올해의 우승자는 케이든이었으나, 그가 스스로 행진에 불참한다면 그 우승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권리 또한 없는 법이니까.
“……1황녀를 불러라.”
황제가 결국 내키지 않는 어조로 명했다. 그 말을 들은 시종장이 하인에게 명을 전달하려던 찰나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디아나와 손을 맞잡은 케이든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사람들의 앞에 멈춰 섰다.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디아나가 앞장섰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녀의 체력이 급격히 빠진 탓에 지금은 케이든이 앞장선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케이든의 손에 기대다시피 한 채 몸을 반으로 접고 헉헉댔다.
신하들이 케이든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그들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3황자 전하!”
“어디 계시다가 이제야 오신 겁니까!”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옷이 찢어져서 갈아입고 오느라…….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폐하.”
케이든이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며 황제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은 2황비의 일을 밝힐 만한 때가 아니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흘겨보던 황제가 이윽고 고개를 홱 돌렸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행진이 끝난 뒤 직접 듣도록 하지.”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케이든은 순순히 답했다. 황제는 다시 한번 그를 흘끔 노려보고는 말에 올랐다.
케이든은 그를 따라 말에 오르기 전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디아나가 매무새를 간단하게나마 정돈해 준 덕에 아침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봐 줄 만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디아나.”
“허억, 네?”
“아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잖아. 괜찮다면 다녀와서 설명해 줘도…… 될까? 미안해.”
케이든이 머뭇거리며 디아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 덕에 한결 숨을 쉬기가 편해져 그녀가 몸을 바로 세웠다.
디아나가 빙긋이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하시지 마세요. 대신 이번에는 꼭, 무사히 행진을 마치고 돌아오셔야 해요.”
“……응. 고마워.”
“기다릴게요.”
그 말에 어쩐지 울컥 목이 메었다. 케이든은 디아나와 맞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가, 곧 손을 놓으며 말에 올랐다.
“1분 남았습니다!”
디아나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시종의 외침에 제4연대의 기사들 또한 서둘러 말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뿌우우―
기다란 뿔 나팔 소리가 행진의 시작을 알렸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황궁을 뒤흔들 만큼 커졌다.
“이랴!”
황제가 먼저 말고삐를 가볍게 내리쳐 앞으로 나아갔다.
케이든은 그의 뒤를 따르기 직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디아나가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속삭였다.
“가세요.”
그녀의 손길에 푸르르 고개를 턴 말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케이든은 마지막까지 디아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황궁의 정문을 나선 후에야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와아아!”
“리카르도 로건 블루벨 황제 폐하 만세!”
“발하나스의 영광이여, 영원하라!”
“3황자이신 케이든 세이릭 블루벨 전하, 만세!”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자 색색의 종잇조각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흩날렸다.
길의 양쪽으로 백성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쉼 없이 소리를 질렀고, 건물의 2층 창가에서는 아이들이 바구니에 수북이 쌓인 종잇조각을 흩뿌렸다.
“웃어라.”
황제는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나직이 충고했다.
그에 조금 먹먹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케이든이 엷은 웃음을 띠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환호성이 귀를 가득 메울 것처럼 커졌다.
‘……잘 어울린다.’
한편, 디아나는 황궁의 정문 안쪽으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케이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따라 박수를 치면서도 어쩐지 멍한 기색이었다.
“발하나스 만세!”
“3황자 전하 만세!”
케이든은 쏟아지는 환호와 빛의 한가운데 있었다.
햇빛을 받은 그의 머리카락이 흑진주처럼 반짝였다.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저 자리에 있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모순되게도, 그래서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없었더라도, 케이든은 어떻게든 잘 헤쳐 나갔겠지. 이전의 삶에서도 어떻게든 발작을 잠재우고 레베카에게 맞섰던 것처럼.’
케이든은 햇빛 아래서 말 그대로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와 달리 디아나는 황궁 담벼락의 그늘이 진 곳에 서 있었다. 발 앞으로 늘어진 그림자의 경계가 꼭 그와 자신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저릿했다.
그 모습이, 그는 그녀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의미처럼 느껴져서.
디아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조금 아린 마음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2황비 전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건국제 행진과 연설이 끝난 후, 건국 기념 무도회까지는 조금의 틈이 있었다.
케이든은 연설까지 모두 마친 후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에게 2황비가 카를롯타를 이용해 자신을 습격했다는 것, 그 전투로 인해 끝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설명했다.
“……내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지.”
처음엔 조금 놀란 것처럼 보이던 황제는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쯧 찼다.
1황비를 위해서 감히 저를 기만하고 황궁에 기어들어 오기를 택한 여인이었다. 늦든 이르든 그녀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케이든을 죽이려 했을 것이었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고는 케이든에게 약간의 기사를 붙여 주고 현장을 수색해 카를롯타를 체포하라고 일렀다.
케이든은 황제가 붙여 준 기사들과 함께 2황비가 자신을 끌어들였던 밀실로 향했다.
‘아직 거기 있으려나.’
케이든은 수풀을 헤치고 숲 안쪽으로 향하는 내내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부엉이 가면이 그를 밀실에서 꺼내어 치료하고, 3황자궁의 후원까지 데려다 놓은 것으로 보아 그를 적대하는 이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경계심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케이든은 부엉이 가면이 밀실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반, 남아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반으로 발을 움직였다.
“어? 저기…….”
“2황녀 전하 아니십니까?”
이윽고 밀실의 입구가 보이는 곳에 다다랐을 즈음. 무언가를 발견한 기사들이 정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부서진 밀실의 입구 옆, 수풀 위에 포박당한 채 주저앉아 있는 카를롯타가 눈에 띄었다.
“으읍!”
카를롯타는 재갈 때문에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는 못하고 팔을 버둥거렸다. 아무래도 풀어 달라는 뜻인 듯했다.
“……너희는 먼저 안쪽을 수색해라. 시체도 수습해 두고.”
“존명.”
케이든은 고민하다가 기사들을 먼저 밀실로 내려 보내고 카를롯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막은 천을 풀어 주었다. 그녀는 재갈이 풀리자마자 거칠게 기침했다.
“콜록, 콜록! 대체 왜 이제야 오는…….”
“누님.”
케이든이 나직이 입을 떼자 습관적으로 투덜대던 카를롯타가 헙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이 그녀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작게 물었다.
“입구를 부쉈던 그 부엉이 가면. 어디로 갔습니까?”